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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백석의 ‘여승’

기자명 김형중

여승 일생 사실적·애상적 묘사
일제하 가족 해체된 모습 담아

‘사슴’에 수록된 백석 대표작
신경림 등 후대 시인들 극찬
여승은 누이와 어머니 모습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취나물)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금광)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이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일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마당 귀퉁이)에 여인의 머리오리(머리카락)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흠모했던 백석(1912~1996) 시인은 한국의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운명적으로 슬픈 시대적 삶을 살았다.  해방 후 북한에 남은 시인으로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동조하지 않고 삼수갑산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다가 1996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남한에서는 1988년에 해금되어, 한국문단에 지워졌던 그의 시가 부활하여 1936년에 100부 한정판으로 간행되었던 시집 ‘사슴’은 헌책방에서 눈이 벌겋게 달은 노다지를 찾는 시인들에게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희귀본이 되었다.

신경림 시인은 “백석의 시집 ‘사슴’을 읽은 저녁, 밥도 못 먹고 밤을 새웠다”고 고백하였다. 안도현 시인은 “20세에 백석의 시를 만나 그의 시를 닮아보려고 베끼고 읽으며 간절한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하며 백석의 시가 “나의 둥지요 스승이다”고 하였다.

‘여승’은 ‘사슴’에 수록된 백석 시의 대표작이다. 이 시는 여승의 일생을 사실적이고 애상적으로 묘사한 시로서 일제강점기 우리 농촌의 몰락과 가족공동체가 해체된 모습을 읊은 시이다.

전쟁이 나서 나라가 망하면 여인이 가장 슬프다. 남편은 전장에 나가 죽고, 어린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파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니면 머리를 깎고 세상의 인연을 끊는 여승이 된다. 여기에 어떤 도덕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

4연으로 구성된 이 짧은 시는 한 여승의 일생을 드라마틱하게 읊고 있다. 한국 근대시에서 한용운이 최초로 사상과 관념을 시화시킨 시인이라면, 백석은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서사시화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1연은 합장하는 여승의 모습을 묘사하고, 2연에서 4연은 여승이 된 과정을 시간상으로 절제와 압축으로 서술하고 있다. 금광으로 돈을 벌러 간 남편을 옥수수 장사하며 10년 동안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고, 어린 딸마저 죽었다. 이렇게 한 가정이 해체되고, 새롭게 탄생한 것이 ‘여승’이다. 여승은 당시 우리 누이와 어머니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생명이 붙어있는 한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극한 상황이라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두가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다. 이것이 생명공동체의 본성이다.

백석 시인의 영원한 연인인 나타샤 김영한 보살은 1000억원이 넘는 대원각 요정을 법정 스님에게 보시하여 성북동의 길상사라는 청정도량으로 탄생시켰다. 이때 기자가 묻는 말에 “대원각은 백석 시인의 시 한 줄 값도 안 된다”고 했다.

관세음보살이나 자모(慈母) 여승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우리 곁에서 함께 울고불고 고통받던 누이가 보리심을 내서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전미개오(轉迷開悟)하면 부처가 된다. 땡감이 홍시가 된다.

‘여승’은 당시 깜깜한 절벽에 선 시인에게 슬프고 가련한 조선 여인의 모습이면서 또 한편은 한 줄기 빛이요 희망이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364호 / 2016년 10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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