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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너는 왜 하필 지금이냐?

기자명 김용규

모두가 움츠리는 엄혹한 시기에도 꽃은 핀다

상강(霜降)이 지나자 많이 서늘해졌습니다. 두툼한 옷과 이불을 꺼내 쓰기 시작했고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구들방을 따끈하게 데운 뒤에야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곳 괴산의 ‘여우숲’도 본격적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붉나무와 화살나무, 산벚나무와 층층나무들이 제일 먼저 빨강이거나 노랑의 단풍으로 제 잎 색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맑은 이슬이었던 새벽 수분이 금방이라도 희뿌연 서리로 바뀌어 내릴 기세입니다.

산중에 사는 나나, 숲에 사는 생명들에게 서리는 준엄한 명령서입니다. 가을 끝자락에 내리는 서리는 자연에 사는 모든 존재에게 겨울의 출입문이 이제 열리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전령사입니다. 이제 성장의 욕망을 닫고 서둘러 한 해의 욕망을 갈무리하라 요구하는 자연의 냉정한 명령입니다. 서리의 전령을 받아든 모든 자는 새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다시 근원을 살피고 지켜야하는 시간이며 다가올 혹한을 견디고 건너낼 준비를 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서릿발 앞에서는 대부분의 풀잎들이 단박에 그 푸른빛을 잃게 됩니다. 대부분의 꽃들이 사라지는 시간이고 따라서 곤충들이 먹을 꿀과 꽃가루도 함께 사라지는 시간이며 꽃에 연기하여 살아가는 연쇄적 먹이관계 속의 생명들 역시 삶을 전환하거나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마침내 땅도 서서히 얼어들어가기 시작할 것이요, 연기(緣起)하여 대지의 표면과 토양 속에 기대어 사는 생명 역시 삶의 모드를 극적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시간은 따라서 한마디로 준엄한 시간입니다. 서리가 자연의 생명들에게 얼마나 엄중한 계기이면 옛사람들의 은유적 일상어 속에 ‘추상(秋霜)같은 호령’이라는 표현이 있었겠습니까?

첫서리가 내리고 점차 농도를 더해 가면 산하 전체의 빛깔마저 어두워집니다. 봄날부터 농도를 더해왔던 푸름이 절정의 빛, 단풍으로 타올랐다가 마침내 회색빛 무채색으로 완전히 전환되는 것이지요. 그 무채색은 엄숙한 색입니다. 자연의 준엄한 명령을 받은 숲의 생명들이 제 양분을 뿌리로 회수하고 제 잎을 떨궈 얼어들어가는 땅에 이불로 덮어쓰는 의식이 빚어내는 색입니다. 결국 제 근원을 지키고 엄혹한 시간을 통과하고 견뎌내려는 절박함이 빚어내는 색인 것이지요. 소나무나 주목, 동백처럼 욕망을 멈춰 욕망을 지키는 데 긴긴 세월 단련을 거친 식물이 아니면서 이때까지도 성장을 욕망하여 악착같이 제 푸른 잎을 유지했다가는 자칫 동해(凍害)나 냉해(冷害)를 입을 수 있습니다. 욕망을 멈춰 욕망을 지키는 경지를 터득하지 못한 다른 생명들은 욕망을 근원으로 회수하여 그 핵을 지키고 간수하는 방법을 씁니다. 물과 양분 대부분을 제 뿌리로 거두어들이는 풀들이 그러하고 단풍을 거쳐 낙엽을 만드는 나무들이 나목(裸木)의 상태로 겨울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그러합니다.

따라서 상강이 지난 숲에서 꽃을 만나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엄중한 계기에도 여전히 찬란하게 자신을 피워내는 몇 안 되는 꽃이 있습니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지금 나의 산방과 ‘여우숲’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으니 그 꽃은 바로 ‘산국’입니다. 세상에 고귀하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마는 나는 서리가 내리는 때를 골라서 피어나는 저 산국에게서 해마다 장엄한 고결함을 느낍니다. 숲을 참구하고 차츰 숲을 깊게 느끼기 시작할 즈음 나는 저 꽃에게 이렇게 저렇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너는 왜 하필 지금이냐? 매화며 벚꽃이며 진달래처럼 봄날 모두의 주목을 끌며 피어나는 꽃도 아니고, 따뜻하고 넉넉하고 안전한 여름을 택해 피어나는 꽃도 아니라, 너는 왜 하필이면 상강(霜降) 그 엄혹한 절기에 때를 맞추어 피어나는 것이냐? 또 어느 여염집 울 밑에 피는 단아한 수선화이거나, 어느 인간의 손을 빌어 잘 구워진 도자기에 옮겨지고 그래서 누군가의 방 창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쉬운 귀한 난초가 아니라, 너는 왜 하필 복잡하고 치열한 숲의 가장자리나 길섶에서 호시절에는 주목도 받지 못하다가 무채색이 온통 세상을 장악하는 늦은 시점에나 피어나는 것이냐? 또한 너는 사람들 열광하는 큼직한 꽃도 아니고 도대체 어쩌자고 아가들의 손톱 크기만큼의 보잘것없는 크기로 피는 것이냐?’

산국에게서 느낀 대답을 다음 편에 담아보겠습니다. 다음 글을 만나기에 앞서 숲이나 길 언저리에서 지금 막 피고 있는 야생의 노란색 국화, ‘산국’을 먼저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65호 / 2016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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