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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수미정사 회주 종연 스님

사랑 알아차리는 바로 그 순간 불생불멸 부처님 오롯이 현현

▲ 종연 스님은 “가치관이 다르더라도 본래 모습은 모두 완벽하게 갖춰진 부처님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귀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처님은 어떤 분입니까.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보통 자성불,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등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을 말이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인연과 인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현상법이라고 합니다. 중생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만 부처님을 찾고 있지만, 실상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곳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천국과 피조물의 세계를 나눠서 봅니다. 하지만 불자인 우리들이 극락과 사바를 나눠본다면, 그 순간 부처님을 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중생은 시공간서 부처님 찾지만
말·언어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
실상은 시공간 벗어난 곳에 존재

현상은 인과에 의해 발생하는 것
인연에 가려 참모습 보지 못하면
무명·행·식 연기 계속 이어져

다르마로 관찰하지 못하면
원리 깨닫지 못하고 육도 윤회
다른 가치관·생활 인정할 때
본래 자기로 회귀할 수 있어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부처님은 대체 어떤 분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 우주의 생명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보면, 다시 말해 실상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같은 마음이요 하나의 마음입니다. 부처님은 출가하시기 전,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였을 때 ‘왜 생명은 평등한 삶을 살지 못할까’를 두고 깊은 번뇌를 했습니다. ‘누구는 무슨 복이 있어 잘 사는 데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여러 명이 잠을 청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 태어나게 될까.’ 여기서 나아가 ‘중생들은 왜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농민들이 농사짓는 것을 참관하다 먹고 먹히는 생명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잡아먹는 게 익숙한 사람들은, 그때 고타마 싯다르타가 느낀 감정을 잘 모를 것입니다. 소를 먹고 돼지를 먹는 사람들의 영혼은 맑지 못합니다. 육식을 하면서도 성불하겠다고 하는 것은 모래로 성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계(戒) 없이 정(定) 없고 혜(慧)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오계를 잘 지키고 있습니까.

고타마 싯다르타가 본 것은 약육강식이었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고뇌하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은 하나이고 평등한데 왜 먹고 먹히느냐. 저 농부들은 왜 농사를 지어 왕족들을 먹여 살리고 세금을 내는가. 실상으로 보면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이 다 존귀하고 평등하다. 그런데 왜 인간 위에 인간 있고 인간 밑에 인간 있는 것인가. 충격을 받은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를 하여 6년 동안 고행을 한 뒤 부처님이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떤 분은 전생서 연등불에게 수기를 받아 부처님이 됐다고 하고 어떤 분은 6년 고행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됐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전생의 수행공덕으로 부처님이 됐다고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십니까. 부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이 만약 살아있는 부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부처님은 업보불입니다. 중생의 눈에는 현상밖에 안 보입니다. 현상은 인과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인연에 의해 어떤 존재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없던 것들이 새로 태어난 것을 ‘인연’이라 하고, 그 인연 때문에 실상을 모르는 것을 ‘연기한다’라고 합니다. 없던 것들이 소, 말, 돼지, 산천초목의 형상으로 있는 것이 인연이고, 그로 인해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연기인 것입니다. 생명의 참모습, 실상을 보지 못해 무명이 생기고, 무명이 연해서 행이 일어나고, 행이 연해서 식이 일어납니다. 연기는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없던 게 새로 탄생했다면 이는 인연에서 발생한 것인데, 우리는 이 과정을 다르마, 즉 법의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왜 보지 못합니까? 탐진치 욕망에 차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으로 보지 못하고 존재를 각각 봅니다. 연기에서 ‘기’는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는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존재하고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게 중생입니다. 그러나 실상으로 보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나누지 못합니다. 나누지 못하는 걸 나누는 게 무명입니다. 부처님은 거꾸로 보라고 하셨습니다. 역관(逆觀)입니다. 순관(順觀)으로 보니까 부처님이 있고 거지가 있습니다. 역관으로 보면 부처님도 없고 거지도 없고 극락도 지옥도 없습니다.

존재는 탐욕과 애착에서 나옵니다. 물이 왜 있습니까. 물을 먹고 싶은 애착과 갈애가 있기 때문에 물로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역관으로 보면 마지막에 무명에 이르게 되니, 이 무명이 사라지고 비로소 실상불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명이 사라져야 실상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명은 어떻게 사라집니까. 진실하고, 양면적이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고 삼귀의를 받들며 오계를 지킬 때 무명이 사라지고 실상불을 볼 수 있습니다. 삼귀의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에서 ‘족’은 부처님 두 발을 말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신 부처님께 목숨 바쳐 귀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득불 세상에 펼쳐놓은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입니다. 그래서 ‘이게 법이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법은 모든 탐욕을 여의게 하기 때문에 ‘존’, 거룩하다고 씁니다. ‘귀의법이욕존’, 법에 귀의하면 탐욕이 사라집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7세 때 법으로 관찰한 끝에 모든 생명은 존귀하고 평등하다고 외쳤습니다.

실상불을 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물이 돌아가는 원리를 깨닫지 못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고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내가 내 옆에 존재하는 사람을 법의 눈으로 관찰하지 못하면 육도윤회에서 돌고 도는 것입니다. 법의 눈으로 관찰하면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잘났든, 못났든 그 사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정하지 못하면 법의 눈이 아닙니다. 만약 법의 눈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잘난 사람을 보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는 고해의 중생에 불과합니다. 한없는 고통 속에서 나도 죽고, 남도 죽는 끝없는 윤회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고 있는 중생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곧 부처님이기에 귀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논쟁을 하다가 자기의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해에서 끝없는 윤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의 파도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바다를 떠난 파도가 있습니까. 바람이 잔잔해지면 파도가 사라지고 물밖에 남지 않습니다. 오로지 물입니다. 파도가 탐욕입니다. 탐욕과 애착을 버리니 바다는 잔잔한 호수가 됩니다. 그게 본래 자기입니다. 본래 자기로 회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끝없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다면서 마구니처럼 살고 있는 분을 많이 봤습니다. 30~40년 불교를 믿었다고 하면서도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픕니다. 때에 따라 시기질투하고 하루아침에 절을 떠나는 사람을 보면, 왜 본래 자기로 회귀하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가치가 다른 존재와 중생들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다르더라도 본래 모습은 모두 완벽하게 갖춰진 부처님입니다. 그 외의 모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진을 해야 합니다. 본래 다른 게 아닌 완벽하게 갖춰진 부처님 모습을 보기 위한 정진입니다.

삼귀의와 오계만 지키면 참불자라 할 수 있습니다. 삼귀의와 오계도 지키지 못하면서 뭐를 한다고들 합니다. 다시 부처님에게 돌아가 봅시다. 연등불에게 수기를 받아서였든, 6년 고행을 했기 때문이었든, 전생의 수행공덕으로 인한 것이었든,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따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서로 다른 모습과 가치관의 사람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공장주가 고용인을 봉급쟁이로 여긴다면, ‘내가 너에게 이만큼을 월급으로 주기 때문에 월급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자연스럽게 직원들을 우습게 보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직원들도 사장을 똑같이 바라보게 됩니다. 여기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나와 똑같은 생명으로 인정한다면 공장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떠나 ‘인연 따라 와줘서 희망을 주는 분’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평등한 관점은 새로운 관계를 열어줍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또 부처님이 여러분을 사랑한다고도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부처님은 내가 사랑하는 순간 존재합니다. 사랑 이전에 부처님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지금 알아차릴 때, 부처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실상불입니다. 부처님이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 태어난 후에 있었다, 이런 개념은 허망한 부처님입니다. 진짜 부처님은 내가 이 순간 지금 사랑을 알아차릴 때 실상불로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 알아차림을 놓치면 안 됩니다. 놓치지 말고 정수리에 이고 다녀야 합니다. 염불입니다. 염불하는 사람들은 부처님과 같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대부분은 법당을 나가면 놔버릴 것입니다. 온갖 탐욕에 찌들어 놔버리고 맙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영생의 부처님, 불생불멸의 부처님을 친견해야 합니다. 무상·무아의 부처님을 보아야지, 유상·유아의 부처님을 보면 안 됩니다. 허망한 것들입니다. 이런 부처님을 보게 되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아차릴 때, 그 순간 부처님이 오롯이 존재합니다. 그 부처님을 보아야 합니다. 허망한 부처님을 보면 눈만 아픕니다. 공부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정리=허광무 수도권 직할 지사장


이 내용은 10월28일 인천 수미정사에서 열린 일요법회에서 회주 종연 스님의 설법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366호 / 2016년 11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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