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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태승 한국불교연구원장

“수행·학문 융합으로 사회에 행복의 길 제시”

▲ 이태승 원장은 “수행과 학문이 각자의 길을 걷는 것을 지향하고, 교류와 소통을 넘어선 융합을 통해 정의·행복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대를 휩쓴 근대화의 부산물들이 온 국민의 정신을 급속하게 개조하고 있던 1974년 4월. 서울 중구 묵정동 한국학생회관 자그마한 사무실에서 한국불교연구원이 첫 발을 내딛었다. 당시 창립을 주도했던 불연 이기영(1922~1996) 박사의 문제의식은 창립 취지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급격한 전통 가치관의 몰락,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혼돈, 깊은 불신으로 말미암은 인간성 상실 등의 어둠을 밝히는 예지의 빛은 불교’임을 천명하는 동시에 ‘관념의 유희로서가 아니라 이 시대에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산실로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도량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 이론과 실천, 앎과 행함, 신해와 행증을 통합하겠다는 한국불교연구원의 이 선언은 두 영역을 별개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시도로 평가받았다.

이기영 박사 주도 1974년 창립
‘연구와 실천 도량 될 것’ 선언
구도회·원효학당·무량감로회 등
다양한 활동으로 신해행증 실천
‘불교문화’ 발간·학술대회 개최

2015년 4월 제6대 원장에 부임
대학생 시절 이기영 박사 인연
서울구도회 대학생부장 등 역임
다방면에 걸친 연구 이어오며
최근엔 일본 근대불교사에 성과

이후 한국불교연구원은 보살도 실천을 향한 이기영 박사의 발원을 사회에 투영시키며 자신의 선언을 현실화했다. 1974년 7월14일 불교기초과정 강좌 개설에 이어 같은 해 10월27일 서울구도회가 만들어졌다. 토요강좌, 월례법회, 사찰순례, 수행정진 등을 통해 ‘바른 이해’ ‘바른 수행’의 씨앗을 뿌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를 맑게 만들겠다는 목적이었다. 특히 이기영 박사의 불교기초과정 강좌에 감화 받은 불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어서 의미가 남달랐다. 서울구도회가 뿌린 씨앗은 1976년 대구구도회, 1977년 부산구도회, 1999년 대전구도회 창립이라는 결실을 낳으며 한국불교연구원의 지향을 전국에 전파했다. 1989년에는 전국교사불자회가 닻을 올리기도 했다.

1987년 4월 한국불교연구원 대학원과정 강좌인 ‘원효의 윤리관’을 개설했는데, 이는 부설교육기관 ‘원효학당’ 설립으로 이어졌다. 원효학당에서는 동·서양 철학사상에서부터 현대의 제반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분야에 대한 강의가 진행된다. 1990년 교양학부 과정을 이수한 25명의 ‘동장법사’가 탄생한 이래 현재까지 500여명의 법사를 배출하며 명실상부한 불교인재 양성 거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2000년 1월 산하기구로 창립된 의료봉사단체 ‘무량감로회’도 눈여겨볼 만하다. 김종화(현재 한국불교연구원 이사장) 이사 등을 주축으로 설립됐으며 현재 의사, 간호사, 약사, 자원봉사자 등 25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매월 둘째 주 일요일, 조계사 불교대학 2층에서 300여명의 환자들을 진료하며 마하이주민지원단체협의회의 ‘이주민 어울림 한마당’은 물론 라오스와 네팔에서도 의술을 펼치고 있다.

구도회와 원효학당, 무량감로회와 더불어 ‘불교연구’ 발간, 학술세미나 개최는 이론·실천의 통합을 위한 한국불교연구원의 원력과 노력을 대변하고 있다. 1985년 8월 창간된 ‘불교연구’는 현재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로서 1년에 두 차례 발간을 이어오고 있다. 학술세미나는 1976년 11월 ‘고려시대 불교와 사회’를 시작으로 ‘한국불교중흥의 제문제’ ‘인도철학과 불교사상’ ‘불교와 민주주의·공산주의’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불교의 보편성과 특수성’ 등 교리, 역사, 신행에서 인접 학문과의 소통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담론을 형성시키며 불교학 발전에 밑거름이 돼왔다.

하지만 한국불교연구원은 1996년 이기영 박사의 갑작스러운 타계와 2000년대 재정적 어려움 등을 겪으며 활동이 침체되는 위기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구도회가 잠시 힘을 잃기도 했으며, 회원이 이탈하고 몇몇 이사가 사임하기도 했다. 2010년대에 접어들어 점차 안정되긴 했지만 매년 적자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지난해 4월 제6대 원장으로 선출된 이태승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는 “젊을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한국불교연구원이 다시 활성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하며 재도약을 다짐했다. 실제 이태승 원장은 이기영 박사와의 인연으로 학문의 길을 걸어왔으며, 이제는 원장으로서 한국불교연구원의 지향을 다시 한 번 펼쳐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원장은 1980년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입학해 2학년 때 이기영 박사를 처음 만났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지도교수로서 이기영 박사는 이 원장에게 형언하기 힘든 환희심을 주었다. 그리고 1981년 여름, 10일간의 한국불교연구원 불교기초과정 강좌는 이 원장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불교를 믿으면 행복하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줬던 이기영 박사를 따라 한국불교연구원 구도회 대학생부장, 청년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신행의 의미와 필요성을 몸에 녹여냈다. 당시 이 원장에게 한국불교연구원은 그야말로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8년 일본 고마자와(駒澤)대학으로 건너가 인도 후기대승불교철학을 공부했다. ‘이제분별론세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에 돌아와 1998년 위덕대에 부임했다. 이후 반야학술상을 수상한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철학’을 비롯해 ‘을유불교산책’ ‘인도철학산책’ ‘실담범자입문(공저)’ ‘지성불교의 철학’ 등 다방면에 걸친 연구 활동을 이어왔다. 특히 ‘실담범자입문’은 불교경전을 통해 전래돼 동아시아에서 폭넓게 활용된 실담범자에 대한 국내 최초의 입문서로서 현재까지 각광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근대불교 사상과 역사에 관심을 두며 ‘일본 메이지시대 신도와 불교의 갈등’ ‘일본 근대 인도철학의 성립과 하라 탄잔(原坦山)의 역할’ ‘일본 근대불교계의 전쟁에 대한 인식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학문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한 일본불교가 정작 사회에서 이렇다 할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의구심은 그간의 연구를 통해 한국불교와 불교학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승화됐다. 수행과 학문이 각자의 길을 걷는 것을 지양하고, 교류와 소통을 넘어선 융합을 통해 정의·행복을 제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현대불교연구원’을 만들고 2011년까지 2대 원장을 역임하며 지식의 사회 회향을 통한 불교학자 역할 모색에 치중했던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대승불교에서는 출가냐 재가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보살도를 실천하고 있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고 강조한 이기영 박사의 뜻을 시대에 아로새기고 있는 한국불교연구원. 이론·실천의 양 날갯짓을 다시 한 번 펼쳐내기 위한 이 원장과 회원들의 노력은, 이기영 박사의 유지가 그러하듯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다.

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367호 / 2016년 1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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