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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늦게 피어 더 고결한 꽃

기자명 김용규

색을 잃은 숲에 봄부터 준비한 향기를 뿜다

봄 숲은 눈부시고 여름 숲은 치열하며 가을 숲은 찬란합니다. 그리고 헐거워지다가 간결해지는 것으로 숲의 한 시즌은 억겁의 한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따라서 겨울 숲은 비움과 간결함의 시간입니다. 지금의 숲은 단풍이라는 찬란한 제 빛깔의 향연이 절정을 통과하는 지점입니다. 연이어 비움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

비움의 지혜를 발휘하는 모든 낙엽수들은 바야흐로 속절없이 제 잎을 떨궈내기 시작했습니다. 숲의 바닥이 그 미련을 거둬낸 나뭇잎들의 색으로 아름답게 장식되고 있습니다.

비워내는 것들은 잎만이 아닙니다. 나뭇가지들도 너부러지듯 떨어져 숲 바닥의 입체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떨어지고 있는 나뭇가지들은 모두 어떤 나무가 생장을 탐하며 힘차게 뽑아 올렸던 욕망의 흔적들입니다. 제 욕망을 멈추고 거두어 바닥으로 자신의 가지를 떨궈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다양합니다. 어떤 나무의 가지는 다른 나무가 뽑아 올린 가지에 가려져 빛을 잃었을 테고, 어떤 가지는 비바람에 꺾였을 것이며 어떤 가지는 예기치 않은 다른 생명의 간섭으로 부러지거나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은 살고 있던 지형이 어떤 원인으로 바뀌면서 제가 살던 자리에 가뭄이나 과한 습기의 미기후 조건을 맞으면서 욕망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맞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연기의 법이 한 그루의 나무의 잎과 가지에 작용했을 것입니다.

겨울 입구에 작용하는 연기의 법은 나뭇가지만이 아니라 잎과 꽃들에게도 가차 없습니다. 무참하기까지 합니다. 된서리가 내리고 난 다음날 숲을 거닐어보니 미처 욕망을 거두지 않은 나뭇잎들은 초록색인 상태로 서릿발을 맞았더군요. 어떤 생강나무나 층층나무는 노란색 단풍을 만들지도 못한 상태에서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낙엽을 만들어 툭툭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꽃은 이미 열매로 바뀌거나 씨앗으로 성숙해 있었지만 때늦게 피웠던 어느 민들레는 제 싱그러움을 모두 잃은 채 움츠러들고 있었습니다. 된서리는 꽃을 더 이상 숲의 주인공으로 허락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독, 지난 글에 소개한 야생의 국화 ‘산국’만은 여전히 샛노란 빛깔로 찬연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지난 글에서 나는 “‘너는 왜 하필 지금이냐?”라고 물으며 글을 마무리 했었지요.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생명은 모두 극복해야 할 저마다의 과제를 안고 태어나는데, ‘산국’이 감당해야 할 삶의 과제는 바로 볼품없는 제 꽃의 크기를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산국은 곡식 ‘피’의 씨앗만큼 작은 크기의 꽃을 피웁니다. 바늘을 세우고 위에서 바라본 크기 정도로 상상하면 될 것입니다. 그 볼품없는 크기로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 매개곤충을 부를 수 있을까요? 산국은 그 가혹한 과제를 놀랍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첫째 바늘 크기의 꽃 수십 개를 촘촘히 모아서 동그랗게 핍니다. 다음으로 더 크게 보이기 위한 장치를 그 가장자리에 달아맵니다. 꽃잎처럼 보이는 그 녀석을 전문가들은 설상(舌狀)화라고 부릅니다. 이제 새끼손가락의 손톱 크기만큼 커 보이지요. 한 송이처럼 보이는 수십 개의 묶음 꽃들을 다시 우산살 모양의 꽃줄기로 묶어 여러 개를 합칩니다. 이제 더더욱 커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서리를 견딜 수 있는 정도의 부동액을 꽃에 배치해 놓고 이제 서리를 기다립니다. 서리가 내리면 다른 풀들은 모두 사위고 시들고 초록의 빛깔을 잃습니다. 하지만 ‘산국’은 그 무채색의 배경 속에서 제 노란 빛깔을 당당히 뽐냅니다. 마지막으로 녀석은 봄부터 준비하고 길러올린 깊고 그윽한 향기를 뿜어냅니다. 이즈음 겨울 입구에 살아 있는 모든 곤충은 꽃이 절박할 때입니다. 당연히 산국의 자태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이 산국은 미당 서정주의 시구에 적시된 것처럼 ‘소쩍새 우는 봄’부터 이 날을 준비합니다. ‘천둥 먹구름 속에서 우는’ 그 여름날, 앞 다퉈 피어나는 다른 꽃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오직 침묵하고 견뎌냅니다. 마침내 ‘간밤에 무서리가 그리 내리면’ 그때서야 피어나는 꽃입니다. 그리고 겨울 입구의 곤충들에게 꿀과 꽃가루와 향을 나누며 자신을 마침내 결실로 바꿔냅니다. 그래서 내 눈에 산국은 늦게 피어 더 고결한 꽃입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67호 / 2016년 1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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