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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불영산 청암사-백련암-수도암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듣다

▲ 청암사 사천왕문과 대웅전을 잇는 길에 늦가을 정취와 초겨울의 한산함이 내려 앉았다.

시어(詩語)의 힘을 말할 때면 스치는 시 한 편이 있다. 윤동주의 ‘눈’이다.

눈이
새하얗게 와서
눈이
새물새물하오.

조선 인조 때 전소됐던 청암사
벽암 각성 명으로 허정이 재건
그 인연으로 대강백 회암 탄생

쌍계사 중수·수도암 중창한 이도
선교에 정통한 선지식 벽암 각성
청암사∼수도암 이어지는 ‘수도길’
‘인현왕후길’ 표기는 지자체 오만

참 짧은 시다. 그리 대단한 시로 보이지 않는데 자꾸 읊조리게 되는 건 눈(雪)과 눈(眼), 새하얗게와 새물새물이 이뤄 낸 운율 때문일 것이다.

새물새물! 사전 의미로는 ‘입술을 한쪽으로 약간 비틀며 소리 없이 자꾸 웃는 모양’이다. 하얀 눈 보자마자 눈이 부셔 살짝 눈을 감거나 엷게 뜨며 실눈이 되는 모양새, 그와 함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가는 찰나를 포착한 시인. ‘새물새물’을 즉흥적으로 떠올리고는 직관적으로 ‘이거다!’하고 선택했을 게 분명하다. 첫 눈 안은 청암사(靑岩寺)를 보는 순간 나그네의 눈도 새물새물 했다. 

▲ 사진 오른쪽 ‘회당비각’에 회암 정혜 스님의 비가 서 있다.

산사는 부처님의 서기(瑞氣)가 깃든 불영산(佛靈山)이 품고 있다. 옛적부터 선과 교를 나누지 않았던 청암사라 하지만 따져 보면 교학세가 크다. 조선시대 허정 혜원(虛靜 惠遠) 스님을 필두로 회암 정혜, 취봉 진철, 고봉 태수, 우룡 종한 등의 대 강백이 부처님 법을 설파했던 도량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청암사는 승가대학과 율학승가대학원이 설치된 조계종 비구니 교육도량이다. 반면 불영산 7부 능선에 자리한 수도암은 선도량이다. 경허, 한암, 고봉, 동산, 금오, 전강, 구산 등 오늘날까지도 한국 선의 지남이 되어 주는 선사들이 정진했던 암자다.

고봉 스님의 부도전을 지나 백련암 옆으로 난 산길로 들어선다. 200여미터 쯤 걸었을까? 작은 계곡 건너고 나니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았던 듯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한 여름 비에 토사가 밀려 내려 와 길이 끊겨 있기도 하다. 오늘 여정이 예사롭지 않다.

▲ 청암사 대웅전 전경.

청암사와 수도암을 관통하는 스님 한 분이 있다. 벽암 각성(碧巖 覺性)! 잠시 조계종의 선맥을 살펴보자.

태고보우국사 선맥으로 내려오면 부용영관을 만난다. 부용영관에게는 두 명의 걸출한 제자가 있었으니 서산대사로 유명한 청허와 부휴 스님이다. 청허의 맥은 편양 언기로 넘어가 풍담, 환성, 만화를 거쳐 경허로 이어지니 지금의 조계종 문도 80%가 편양 언기의 법맥에 닿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휴선사 또한 벽암 각성이라는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 냈다. 그의 법맥은 모운 진언, 보광 원민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부휴 선사는 조계종에서도 면밀하게 조명되지 않아 그의 제자가 누군지조차 아는 이가 많지 않다. 부휴 선사가 고승임에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 폐위된 인현왕후가 ‘복위 기도’를 올렸다는 청암사 극락전으로 가는 길.

그러나 청암사는 기억하고 있다. 인조 때 청암사가 불에 전소되자 허정 혜원(虛靜 慧遠) 스님에게 청암사 재건을 명한 스님이 벽암 스님이기 때문이다. 허정 스님은 벽암 스님 문도다. 그 때의 불사가 아니었다면 청암사 강맥은 끊어졌을 것이다. 벽암의 발원과 허정의 원력 인연으로 우리는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 定慧, 1685~1741)를 만날 수 있다. 청암사 사천왕 앞에 세워진 ‘회암비문’을 통해 스님의 행장을 엿볼 수 있다.

회암 스님은 9세가 되자 스스로 범어사 산문을 열고는 자수(自守) 선사를 스승으로 출가했다. 남다른 총기를 엿본 자수 선사는 제자를 충허 스님에게 보냈고, 그 인연으로 가야산 해인사에 주석하고 있던 보광 원민 스님을 참례하고는 구족계를 받는다. 회암이 벽암과의 숙연이 맺어지는 순간이다. 경학에 매진한 회암 스님은 세납 27세에 강단에 섰다. 그의 강설이 어느 정도였는지 다음 구절이 대변한다.

‘강설이 무르익고 능란하여 이르는 곳마다 학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서교대종사(西敎大宗師)라고 칭송했다.’

▲ 고봉 스님(사진 맨 오른쪽 사리탑) 부도전 전경.

교학에 정통했음에도 선을 멀리 하지 않았던 회암 스님은 선지식을 친견하던 중 ‘남의 보배 헤아려 봐야 무슨 이익 있겠는가!’라며 돌연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고승의 말씀이라 해도 자신이 체득한 게 아니면 소용없음을 간파한 회암이었다. 

금강산서 확실한 낙처를 보았던 듯싶다. 금강산 하산 후엔 안변 석왕사를 비롯해 명봉사, 벽송사, 청암사 등의 명찰서 회암만의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을 편다. 만년에 이르러 강단서 내려 와 선정에만 들어 있어도 결단코 학인들이 떠나지 않았다. 시적에 이를 때(세납 57)까지 강단에 선 건 후학을 위한 자비심의 발로였으리라. 다비할 때 ‘우박이 내리고 기이한 빛이 비쳤다’고 한다. 사리는 불영산 청암사와 지리산 상무주암에 봉안됐다.

어렵사리 이어간 작은 산길이 끊겼다. 대신 세 사람이 나란히 걸을 만한 큰 길이 나왔다. 지자체가 명명한 ‘인현왕후 길’이다.

▲ 백련암 도량엔 아직 따지 않은 감이 매달려 있다.

1689년 기사환국의 여파로 폐위된 인현왕후는 저 아래 청암사 극락전 별채에 머물렀다. 복위 기도를 올리며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청암사의 기도 효험이었을까? 인현왕후는 갑술환국과 함께 복위된다. 지자체가 이 이야기를 내세워 청암사, 수도마을, 수도암으로 이어지는 ‘수도길’ 일부 구간과 청암사와 수도암으로 곧바로 이어진 길 일부분을 떼 내 총 9㎞의 ‘인현왕후 길’을 냈다. 그러나 마땅치 않다.

인현왕후가 청암사에 머문 건 사실이지만 이 산길을 걸었을 지 의문이다. 더욱이 이야기 꽃이 핀 청암사와 길 끝에 만나는 수도암은 쏙 빼놓았다. 그래놓고는 지도상에도 나와 있는 ‘수도길’을 ‘인현왕후 길’로 덮어 버렸다. 산길 좀 정비했다고 지자체 마음대로 이름 바꿔 놓아도 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수도길’로 고쳐놓고 청암사와 수도암 길을 이어 ‘인현왕후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

오던 길 돌아가도 수도암으로 이어진 길 다시 찾기 어렵다 싶어 큰 길 따라 걸음 하고 만다. 충북 보은에서 태어난(1592) 벽암 선사! 법주사와 화엄사 부도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 스님의 여정을 그려 보며 길을 걷는다.

▲ 수도암 선원에 첫 눈이 내려 앉았다.

효심이 지극했던 벽암은 어려서부터 ‘풍채와 기골이 바르고 엄정하였고 눈은 번개’처럼 빛났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4세에 설묵(雪默)장로를 따라 출가해서는 보정노사(寶晶老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부휴(浮休)대사가 한 눈에 재목임을 간파하고는 제자로 삼았다. 부휴대사를 따라 속리산(俗離山)으로 들어갔고 덕유산(德裕山), 가야산(伽耶山), 금강산(金剛山)으로 걸음하며 정진했다. 선에 매진하면서도 경전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세납 24세인 1616년 신흥사에서 강석을 열 당시 학인 700명이 모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스님의 강설은 일품이었던 듯싶다. 선기도 비범했다.

선사가 일찍이 몇 명의 사문과 함께 밤길을 가는데 큰 호랑이와 마주쳤다. 승려들은 혼비백산해 두려움에 떨고만 있었다.

그 때 벽암은 웃었다. ‘이 놈이 우리 앞길을 인도해 주려 하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호랑이를 따라 20여리를 가니 절에 이르렀다. 선사는 호랑이를 돌아보며 일렀다. ‘멀리서 와 만났는데 서로 헤어지게 되니 너 또한 애썼다.’ 호랑이는 선사 주위를 세 번 돌고는 떠났다.

벽암 스님은 사명 대사와 함께 임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조선 당시 서산대사의 공로에 기인해 나라에서 스님에게 내리는 최고 지위가 있었다.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이다. 제1대 선교도총섭이 서산이고, 2대가 사명, 그리고 3대가 벽암이다. 벽암 선사는 남한산성 축조를 총 감독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당시 의승군 3000명을 규합한 ‘항마군’을 이끈 인물도 벽암 선사였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전언을 듣고는 스스로 항마군을 해산했지만 선사의 호국정신은 후학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항마군 해산 후 지리산 화엄사로 돌아 온 벽암 선사는 쌍계사를 중수하고는 만년에 이른 세납 75세 때 저 수도암을 중창했다.

▲ 보물로 지정된 3층석탑과 약광전, 그리고 대적광전.

그 수도암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말라는 듯, 하늘은 선원에 눈을 내려 찬 기운을 끼얹었나 보다. 아직 채 녹지 않은 잔설이 남아 있다. 벽암 선사도 여기 어느 곳에 서서 한 해의 첫 눈을 바라보다 눈이 새물새물 했을 것이다.

‘계를 실천함에 뛰어났고 인연에 따라 태연하고 담박하였다’는 강백, ‘곡기를 끊고도 굶주리지 않았고 밤을 새우고도 잠을 자지 않았으며 늘 옷은 닳고 해져 있었다’는 대 선사 벽암 스님은  어느 날 청암사를 떠나 자신이 중창한 화엄사로 돌아가 입적(1660)에 든다. 선교에 정통했던 선지식이 염송설화를 소재로 임종게를 남겼다.

대경에 8만 게송이 있고 (대경팔만게大經八萬偈)/ 염송은 30권이나 되니(염송삼십권拈頌三十卷)/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로운 것(시칙겸이리是則兼二利)/ 그런데 또 다시 무슨 게송을 원하는가 (하욕별위송何欲別爲頌)

사리는 조계산 송광사, 지리산 화엄사, 종남산 송광사, 속리산 법주사 네 곳에 분장됐다. 불영산에 함박눈 내려도 벽암 각성 스님이 후학에게 전한 일언은 덮어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함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허리를 굽히지 말라!’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청암사 주차장. 10m 거리에 일주문이 서 있고 100m 거리에 회당비각과 사천왕문이 있다. 청암교를 건너 백련암 옆으로 난 큰 길을 따라 오르면 수도사(불영산 정상) 오르는 초입에 이른다. 200m 거리에 작은 계곡이 나타난다. 왼쪽에 계곡을 두고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른다. 1시간 거리에 인현왕후 쉼터가 보인다. 수도리 마을회관과 수도암으로 나눠지는 갈림길에서 수도사 앞으로 난 찻길을 따라 30여분 정도 오르면 암자에 닿는다. 3시간 정도 소요된다. 하산길도 2시간은 잡아야 한다. 청암사서 수도암으로 바로 이어지는 산길은 찾기 어렵다.

이것만은 꼭!

 
수도암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석굴암 불상보다 80㎝ 작으며, 9세기에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북석리에서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물 307호다.

 

 

 

 

 

 
수도암 약광전: 약광전의 석불좌상은 도선 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오산 약사암과 직지사 삼성암에 있는 약사여래와 함께 방광했다고 해서 ‘3형제 불상’으로 불린다. 약광전 석불좌상은 보물 296호다.

 

 

 
수도암 3층 석탑:  도선 스님이 창건 당시 이 절터가 ‘마치 옥녀(玉女)가 베를 짜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지대’라 하여 베틀 기둥을 상징하는 두 탑을 세웠다고 한다. 대적광전과 약광전 앞에 각각 서 있다. 

 

 

 


 

[1370호 / 2016년 1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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