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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난제의 현대적 의미 정답(正答)과 정답(定答) [끝]

기자명 주수완

문화재 난제, 정해진 답 아니라 올바른 답 찾을 때 해결

▲ 봉화 청량사 건칠불좌상. 고려, 혹은 근대로 편년논쟁이 있었으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통해 통일신라시대로 편년되어 새로운 난제로 떠올랐다.

2016년은 유난히 미술과 관련된 큰 사건들이 많았다. 조영남 대작사건부터 이우환 화백과 고(故) 천경자 화백의 작품 진위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으로 큰 조명을 받은 미술적 문제들이 터졌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다양한 전문가들이 나와서 인터뷰도 하고 칼럼도 소개되었지만, 뾰족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이들 모두 미술사의 난제들인 셈이다. 더불어 정답을 찾아내지 못한 전문가들의 발언에 예술이란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인식만 부각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특히나 이들 사건들은 작품의 창작자가 살아있거나 혹은 작고했더라도 분명한 입장을 밝힌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었던 사건들이다. 비평가나 미술사가의 힘이 창작의 주체인 작가의 견해마저 이런저런 이유로 압도하는, 그래서 마치 역전된 인과 관계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어느 때인가 만들어진 것들은
시대·지역 따라 새 환경에 노출
후대 예술가는 새 시대에 맞게
이를 변화시키려 끊임없이 노력

변화하는 현실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한 가지 만 고집할 때 문제

과학적 조사는 정답을 원하지만
인간은 정답없는 문제 능력발휘

근래 진위문제에 답 제시 못함은
논리 개발 안했던 학계 관행 때문

작가가 살아있는 현대미술도 이러할진대, 작가가 일찌감치 작고한 역사 속 문화재의 상황은 어떨까? 당연히 더욱 오리무중이다. 특히 올해는 불교문화재에 있어서도 불상의 연대판정이나 진위문제가 대두된 사건이 적지 않았고, 그밖에 직지(直指)보다 연대가 올라간다는 최초의 금속활자 ‘증도가자(道歌字)’의 진위문제 등도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지만 결국은 해결되지 못했다. 이런 문제들도 해결하지 못하는 학문은 과연 쓸모 있는 학문일까?

예술은 애초부터 모호한 개념으로 형성된 감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너무 규정짓거나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일련의 사태에서 보다시피 누군가는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법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음을 참작해야 한다. 특히 재판과 같은 과정을 빨리 끝내야하기 때문에,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모호한 가능성보다는 분명하게 한쪽을 옳다고 손들어주는 정답을 요구하며 그 정답도 가급적 빨리 내놓을 것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이들이 언제부터 석가·다보탑으로 불려왔는지가 새로운 난제로 떠올랐다.

이를 위해 급기야는 과학적 방법이 동원되기에 이르렀다. 천경자 화백 작품의 진위문제를 가리는데 있어서 붓의 터치를 조사하는 과학적 감식방법이 동원되었고, 봉화 청량사 건칠불상의 편년을 규명하는데 있어서도 제작에 시용된 직물의 일부를 채취하여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을 동원했다. 특히 청량사 건칠불의 경우는 과학적 조사 전에 주장되었던 고려, 혹은 근대라는 두 편년이 무색하게 오히려 통일신라시대라는 연대가 나옴에 따라 연구자들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과학적 조사방법은 그렇다면 전적으로 믿을만한 것인가? 또 만약 과학적 방법이 전적으로 믿을만 하다면 과연 감식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술사는 그 영역마저 점차 과학과 인공지능에 넘겨야하는 것일까?

그러나 문화재의 과학적 조사라는 것은 문화재 연구의 극히 한 부분이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 진위 조사에 활용된 3D 멀티 스펙트럼 카메라 조사기법은 특정 작품이 같은 작가의 작품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위작인가의 문제를 조사하는 방법이었고,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은 유물의 대략적인 편년을 밝히는 작업에 활용되는 기법이지만, 동일 작가의 작품, 혹은 편년은 여러 문제의 시작일 뿐, 끝은 아니다. 우리가 원하던 작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그 작품이 이미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경우라면 문화재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을 수 있으며, 또 그 작품이 이미 역사적으로 오래전부터 회자되고 있던 작품이라면 이렇게 후대에 작품에 덧붙여진 역사 역시 그 작품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 호류지 금당벽화 중의 아미타삼존불. 담징의 작품인가 아닌가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예를 들어 불국사 석가탑·다보탑의 경우 석가탑에서 출토된 묵서지편을 통해 고려시대에는 이들 탑들이 무구정광탑, 또는 서석탑으로 불렸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석가·다보탑이라는 ‘법화경’에 근거한 조형설은 이제 폐기될 처지에 놓였다. ‘석가·다보’라는 해석은 18세기에 쓰여진 ‘불국사사적’에 처음 보이는 내용일 뿐 통일신라시대 불국사가 창건될 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최소한 200년 이상 사람들이 생각해온 석가·다보의 개념은 모두 오류로 간주하고 전부 없애 버려야할까? 도대체 이 두 탑을 석가·다보라는 멋진 개념으로 해석한 것은 누구이며, 왜 그렇게 해석했던 것일까? 혹시 원래부터 석가·다보탑이었으나 고려시대 사람들이 석가탑을 중수하면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발견하고는 무구정광탑으로 기록했던 것은 아닐까?

편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하던 시대의 작품이 아니라 하더라도 후대에 뛰어난 작가에 의해 제작된 모작이라면 그 역시 나름대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설령 문화재일지라도 전혀 아름답지 않거나 학술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경우도 있고, 의도적으로 속이기 위해 제작된 위작이 아닌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모작, 방작이라면 비록 우리가 원하는 편년이 나오지 않을지라도 충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때문에 호류지 금당벽화의 경우, 호류지 금당에 현존하는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활동하던 시대 이후에 일어난 화재 이후 다시 그려진 것이기 때문에 담징의 작품일 수 없다는 주장은 마치 세상에 정답은 하나 밖에 없다는 것처럼 너무 획일적인 판단이라 생각된다. 글에서 밝혔다시피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호류지의 도상 및 그 배치, 뛰어난 채색감각 등은 기존 담징의 작품, 최소한 고구려의 도상과 채색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때문에 성급하게 아니라고 하기 보다는 현존하는 작품 가운데 숨어있는 담징의 단편들을 찾아보는 것이 더 건설적인 논의가 아닐까 한다.

더불어 과학적 조사는 그나마 유물 중에서도 주로 유기물로 만들어진 것에 대한 조사가 대부분이다. 무기물, 예를 들어 금속이나 돌로 만들어진 유물은 과학적 조사도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최근 ‘증도가자’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것도 재질이 금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활자에 의해 인쇄된 서체를 규명하여 진위를 가리는 방향에 더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무기물로 만들어진 유물의 연대도 측정하고,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측정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결국에는 예술창작까지 인공지능이 담당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직도 명품 가방이나 옷은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것이 선호되는 것처럼, 또 자동차가 발명되었어도 올림픽 경기에는 여전히 육상경기가 있는 것처럼 “인간의 노동이 이루어낸 것의 가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장곡사 괘불. 1673년. 높이 8.09m. 석가불 도상이 미륵불 도상으로 인식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이 고유의 영역으로 지켜낼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인공지능이나 과학적 조사는 늘 정답을 원한다. 정답을 찾아내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그러나 인간은 정답이 없는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더 큰 능력을 발휘한다. 나아가 문제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의 몫이다. 지난 1년간 다룬 불교미술사의 난제들은 바로 난제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다루어보고자 했다.

문제는 왜 생겨나는 것일까? 처음 창안된 어떤 것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문제가 생길 수 없다. 그러나 그 창안된 것은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면서 새로운 환경을 접하게 되고 그에 따라 후대의 예술가들은 이를 환경에 맞게 변화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장곡사 괘불처럼 화기에는 석가모니, 방제에는 미륵불의 기록을 지닌 경우가 아마도 석가도상에서 미륵도상으로 인식이 변해가는 중간에 걸쳐있는 좋은 사례이다. 불교 제1의 명제라고도 할 수 있는 ‘제행무상’이 말하듯이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모방한 작품에서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바뀐 시각으로 인해 원작도 새롭게 재해석된다. 그래서 오랜 기간 살아남은 작품들은 그만큼 여러 이름을 가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겐 지금 난제, 즉 풀기 어려운 문제일지 모르지만, 이것을 만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 이런 변화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그들이 분명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문제(question)가 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이렇게 변화하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하나의 해석만 고집할 때 문제(trouble)가 발생한다. 

근래의 진위문제 등에 대해 학계가 유효한 답을 내어놓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만 정답이라 생각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별다른 논리를 개발하지 않았던 학계의 관행 때문이다. 반대되는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고 공허한 한 가지 정답만을 고집한다면 학계는 현실에 결코 유효한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정답(正答) 즉, 올바른 답보다 정답(定答), 즉 정해진 답만 찾아왔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멋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자유를 지녔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이 의문에 답을 주는 기능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문제를 만들어내는 특권은 아직 인간의 영역으로 보인다. 이제 교육의 방식도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의 함양으로 바뀌어야 한다. 비록 이러한 난제들의 답이 언제 풀릴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답은 없어도 괜찮다. 문제가 곧 답이다. 문제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편견과 선입견을 끝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팔정도에 정견(正見)은 있어도 정답(正答)은 없는 것이 아닐까?

지난 한 해 동안 미술사학의 상상게임에 참여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72호 / 2016년 1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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