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인 증명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간은 뇌의 2~5% 가량을 사용한다고 본다. 19세기 하버드 윌리엄 제임스 교수가 ‘천재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뇌 사용량이 훨씬 높다’고 쓴 내용을 작가 로웰 토마스가 책으로 옮기다가 잘못 쓰면서 지금까지 뇌의 10%를 활용한다는 부분이 인정받는 가설로 존재할 뿐이다. 흔히들 아인슈타인도 겨우 뇌의 10%를 활용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영화에서 뇌의 활용량에 따라 시공간을 초월하는 장면들이 나타난다. 시간 여행을 통해서 과거로, 우주로 공간을 넓혀가는 장면들. 하지만 루시는 시간 여행을 한 것이 아니다. 그녀의 뇌 사용량이 극대화되고 세포핵이 그 경계를 허물면서, 그녀 몸속에 내재된 선대로부터 이어온 세포에 저장된 정보를 스스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더 강한 충격이었다. “나는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않고, 이대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이다.
나에게 수행이란 무엇일까? 매 시간마다 나를 객관화시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고, 손녀 연우를 보면서 ‘지금 연우의 기분은 이럴지도 모르겠구나!’하고, 남편을 보면서 참 걱정 없이 사는 모습에 오히려 짜증이 날 때면 ‘저 사람의 저런 부분이 우리를 지켜 주었구나!’하면서 아침마다 108배를 하며 모두의 마음이 되어 관세음보살님을 부른다.
매일 아침 108배를 한 지는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불가피하게 도저히 절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매일 아침 어디에서든 어김없이 108배를 한다. 물론 108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예불문부터 주력까지 아침마다 하는 기도는 108배를 포함해 30분에 이른다. 20년 전 아침 일과수행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1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예불문이 외워지고 절에도 익숙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수행의 시간이 단축된 것 같다.
아침의 일과수행을 시작한 것은 정토회 1000일 기도에 동참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40년 가까이 교사 생활을 해 온 나는 교직에 머물 던 중 삶의 전환점을 찾고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정토회 1000일 기도에 입재했다. 교직에 있던 터라 그런지 난 매우 까다로운 편이었다. 당시만 해도 주위 사람들에 의하면 “흐트러진 상황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비판도 곧잘 했다.
매일 새벽 5시, 수행을 시작한 이후 나는 조금씩 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잠도 잘 잤다. 때론 누워 있으면 머리 위로 화기가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럴 때면 쉽게 잠을 설치곤 했다. 그런데 일과수행이 어느 정도 무르익자 그 증상이 싹 사라졌다.
절을 하고 나면 굳어있던 몸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굳은 몸이 풀리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닫혀있던 생각이라는 틀의 문도 열렸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해졌고 이 마음을 학교에서 청소년들을 대할 때마다 적용해 나갔다.
[1373호 / 2016년 12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