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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구의 중간 깨달음

작은 성찰들과 과감한 결단이 삶을 뒤바꿔

▲ 그림=근호

백범 김구의 본명은 김창수이다. 창수의 출생 신분은 상민이었다. 그것이 한이었던 그는 만민평등을 외치는 동학 사상에 귀의하게 되고, 절에 들어가 들어가 불교와 연을 맺기도 한다.

비범한 자질 가졌지만 범부중생
명성왕후 살해범 보고 갈등 직면
죽을 작정 하면서부터 ‘재탄생’
사람 크게 변화시키는 건 깨침

자신의 얼굴이 못생겼다고 생각한 창수는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관상법을 배운 적이 있다. 그가 배운 관상법의 결론은 관상 좋은 것이 심상 좋은 것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창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오랜 방황을 거쳐 창수는 고능선이라는 한학자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에 의해 고산림이라 불리고 있었던 그는 의병장 유인석과 동문이었고, 실천을 중시했다. 창수는 고산림의 제자가 되었다. 고산림은 의기를 강조하면서 사람이 의기롭지 못한 것은 판단-실행­계속이라는 세 단계 중 판단 단계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얼마의 세월이 흘러 명성황후가 일본인 미우라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민심은 분노로 들끓었고 살해범은 숨었다. 그 무렵 창수는 평안도 해주의 치하포 근처에서 한 객주에서 미우라로 보이는, 허리에 칼을 숨기고 있는 일본인을 발견하게 된다. 창수의 가슴은 이 자를 죽여 나라의 원수를 갚고 싶은 생각으로 요동친다.

그렇지만 자신은 빈손인데 비해 그는 칼을 지녔고, 그의 동행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창수의 마음은 한 걸음 물러서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불안이 엄습해왔다. 이렇듯 심신이 혼란한 상태에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에서 ‘한 가닥 광선’이 가슴으로 비쳐들어온다. 스승 고능선으로부터 들은 구절이 홀연히 떠올랐던 것이다.

‘가지를 잡고 나무 꼭대기에 오르는 것은 기이할 것 없다(得樹攀枝不足奇)
벼랑에 매달려 두 손을 놓아야만 대장부라 할 수 있다(懸崖撤手丈夫我)’

창수는 자문자답해 보았다.

문: 네가 어릴 적부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느냐?
답: 그렇다.
문: 그런데 너는 지금 거사를 망설이고 있다. 이는 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는 게 거짓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단지 몸에 이롭고 이름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자문자답을 한 끝에 창수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 부분을 백범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그렇게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범한 자질을 가졌으나 그때까지는 평범한 사람이었던 김창수는 그 결단을 거쳐 큰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무명 청년 김창수가 그때를 분기점으로 하여 민족 지도자 백범 김구로 눈부시게 재탄생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때 창수의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가 깨달음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은 선정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표준인데 그때 창수의 마음에서 일렁이던 파도가 잠잠해진 것은 선정에 든 상태와 유사하고, 깨달음은 지적인 진보도 의미하는데 창수의 마음에서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일어난 것은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앎, 즉 인지이다. 다만 그 인지는 점진적이 아니라 비약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 사람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깨달음이 사람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그것이 경험적 인지이기 때문이다. 불이 뜨겁다는 것을, 말로만 들은 어린이는 인지적으로 알고, 불을 만져본 어린이는 경험적으로 안다. 앞의 어린이는 불장난을 할 가능성이 있지만 뒤의 어린이가 그럴 가능성은 없다. 이 사례는 경험으로 얻은 앎이 곧 ‘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앎은 닦아 실천함으로써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깨달음으로 얻은 앎은 닦아 실천할 필요가 없다. 몰록 깨달으면 몰록 닦아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이후로 더 이상 닦으실 필요가 없었던 것, 깨달음이 곧바로 성불이라는 됨으로 이어진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단지 사색을 했기 때문에 그때 얻으신 지혜가 인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그때 부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거신 상태였다는 점을, 6년에 걸친 치열한 구도적 헌신이 밑받침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우 수행자의 심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경험이 된다.

필자는 치하포에서의 백범의 깨달음이 완전한 깨달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완전한 깨달음은 오직 부처님만이 이루셨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는 사리불과 목련 존자의 깨달음, 달마대사와 혜능대사의 깨달음, 외도 성자들의 깨달음이 부처님에 비할 때 약간이나마 부족했다고 본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내가 어찌 감히 곧바로 완전한 깨달음을 바라겠는가. 이로부터 성불을 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생에 걸쳐 닦고 또 닦아야만 한다는 이치가 설해지지만, 이 이치에만 국집할 경우 우리 불제자의 여정은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목표가 너무나도 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멀고 먼 목표에도 불구하고 암담해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때 요청되는 것이 바로 ‘중간 깨달음’이다. 바꿔 말해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100의 경지를 목표 삼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당장 가능한 중간 깨달음을 목표 삼아야만 한다. 나의 깨달음 수준을 20 정도로 잡아보자. 그 경우 나는 기본적으로는 100을 지향하되 인지적으로는 21로, 비약적으로는 25 이상으로 높이는 데 마음을 기울여야만 한다.

돈오돈수(頓悟頓修: 깨닫는 순간 다 닦아짐)인가 돈오점수(頓悟漸修: 깨닫고나서 닦아야 함)인가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부처님의 경우로 보더라도 둘 중 돈오돈수가 맞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이후에 닦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돈오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점수를 거쳐야만 한다. 돈오면 즉 돈수이지만 돈오는 점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백범의 예에서도 보듯이 점수, 즉 작은 성찰과 노력이 쌓이고 쌓인 끝에 죽기를 각오하는 결단을 하게 되고 그 순간 돈오가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나는 지금 점수의 길을 잘 가고 있는가. 나는 몸과 마음을 내던져야만 하는 중대한 순간에 과감한 결단을 내린 적이 있는가, 또는 내릴 수 있을까. 수시로 이를 점검하는 것은 불제자의 엄정한 의무이자 긍지높은 권리일 것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74호 / 2017년 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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