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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살고 싶던 소녀, 인홍 스님 첫 친견에 출가 단행

  • 새해특집
  • 입력 2017.01.03 15:39
  • 수정 2017.01.03 19:56
  • 댓글 3

신년에 만난 큰 스님 가지산 석남사 선원장 법희 스님

▲ 법희 스님은 은사 인홍 스님이 췌장염으로 쓰러졌을 당시, ‘너희 대장 지금 죽으면 안된다’는 성철 스님 말씀에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만은 생생하다고 한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15살에 ‘천수경’ 완벽 암기
절 못가면 어쩌나 결혼단념
산을 갈아 밭 일구는 중에도
땅에 그린 ‘원’보며 윤회공부

'삼서근' 들며 60여년 정진일로
백장·성철·인홍 스님 뜻 받들어
선원 3개 운영·재가자 용맹정진
비구니 고품격 도량으로 ‘우뚝’

태백산 각화사 암자서 춘양으로 20리 길을 걸어 탁발 나오는 보살이 있었다. 그 보살 문 앞에 서 있으면 냉큼 마루에 앉혀드리고 시원한 냉수 한 그릇부터 건넸다. 절에서 사는 사람이라니 그냥 좋았더랬다. 잠시라도 혼자 있게 되면 보살은 무엇인가를 읊조렸다. 그 소리 청아하다. 귀를 쫑긋 세워 들어 보고는 가르쳐달라 조르니 ‘천수경’이라 했다. 열다섯 살 되던 해 그 경을 완벽하게 외웠다. 얼마나 깊은 뜻 담겨 있는지를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가장 높고도 깊은 미묘한 부처님 법/ 한없는 세월 지나도록 만나 뵙기 어려워라/ 제가 이제 듣고 보고 받아 지니오니/ 부처님의 진실한 뜻 알기를 원하옵니다.’

한 낮, 마을 어귀서 두 명의 비구니 묘경, 도용 스님을 만났다. 태백산(정확히는 비룡산) 홍제사서 내려와 탁발하는 길이라 했다. 소천에서 춘양까지는 50리 길. ‘저희 집으로 당장 가시자’했으나 ‘탁발도 순서가 있는 법’이라며 기다리라 했다. 큰 바가지에 쌀보리 잔뜩 담아 놓고는 틈만 나면 대문 열고, 폴짝폴짝 뛰어 담장 너머도 바라보았다.

초봄의 저녁 노을빛 산마을에 차오를 즈음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의 두 손을 꼭 잡고는 간청했다. ‘제가 공덕 짓도록 하룻밤 묵어가 주세요.’ 두 비구니 모두 ‘그리 하겠다’ 했다.

두 스님 방에 들자마자 천길 벼랑서 떨어지는 듯한 ‘폭포수 질문’을 쏟아냈다. 경전엔 어떤 말씀 담겨 있는지. 수행은 왜 하는지. 어찌 하면 목탁을 잘 칠 수 있는지. 몇 시에 일어나 몇 시에 잠자리에 드는지.  절에서 공양하는 밥반찬은 무엇인지.

▲ 지금의 석남사는 인홍 스님의 40년 불사와 법희 스님의 20년 불사로 서 있다.

꽃망울 틔워내는 4월이었을 것이다. 예전처럼 비구니스님들 하룻밤 지내고 길 나서려는데 마침, 춘양서 홍제사 쪽으로 가는 트럭 한 대가 있었다. ‘이 때다!’ 싶어 비구니스님들 따라 나섰다.

처음 보는 홍제사는 아담한 암자였다.  절 뒷산 길을 따라 한 스님이 내려오고 계셨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이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산하대지가 사라지고 딱 한 스님만 걸어오는 듯했다. 동행했던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일러주었다.

“도솔암서 내려오는 저 스님이 인홍 스님이네!”

깊고도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아이인가? 내가 보고 싶어 했다. 잘 왔다. 자고 가라!”

그날 저녁 난생 처음 108배 참회기도를 올렸다. 부처님 전에 몇 배를 올렸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절 하던 중 신고 있던 버선코가 큼지막하게 찢어져 버렸다는 기억만은 생생하다. 법희 스님의 출가 길은 그렇게 열렸다.

인홍 스님의 도반 성우 스님이 공양주였을 때다. 성철 스님 열반 때 해인사 한 귀퉁이에서 거적 하나 깔아 놓고 가부좌 틀고 앉았다던 혜춘 스님도 와 계셨을 때다. 화두는 ‘삼서근’을 들었다. 1954년의 일이다.    

탁발 나온 이유를 알겠다. 산에 논이 없으니 쌀 한 줌이라도 공양하려면 마을로 내려와 얻어야 했다. 감자 한 개, 옥수수 한 톨이라도 손에 쥐려면 산을 갈아 밭으로 일궈야 했다. 하여 괭이, 낫, 호미는 반나절이라도 제 자리에 있지를 못 했다.

▲ 성철 스님이 손수 써 인홍 스님에게 내려 준 경책.

인홍 스님도 지게를 지었다. 당신께서도 지게 지고 일어나다 기우뚱해 넘어져 수확한 콩을 죄다 쏟는 적이 많았다. 밭고랑에 넘어진 인홍 스님은 ‘그리 많이 해봤는데 아직도 서투네!’하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지게 일으켜 세우는 법희 스님 손 잡아끌고는 앉아 보라 한다. 작대기로 붉은 땅 위해 둥그런 원 하나를 그리신다.

“저 벌레들 보이지? 윤회란다. 공부 제대로 안 하면 우리도 다음 생에 저런 벌레로 태어난다. 어찌 할래?”

인홍 스님 명성 봉화 땅 너머 이웃 고장에까지 퍼지니 묘엄, 불필 스님을 필두로 비구니 스님들이 바랑 메고 줄을 이어 온다. 어느 새 대중은 예닐곱에서 30명에 이르렀다. 땅은 작고, 식구는 날이 갈수록 느니 초근목피 삶의 연속이다. ‘바다고기(미역, 김)라도 먹으려면 남으로 내려가야 한다’며 머물 곳 알아보러 길 떠난 인홍 스님이 돌아 오셨다.

“가자! 기와 전각에 도량도 넓다. 석남사로 간다.”

그렇다 해도 대중 전원이 석남사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석남사는 지금의 암자 수준의 규모였다고 보면 딱 맞다. 열 두 명만이 석남사로 걸음 했고 나머지는 윤필암으로 길을 떠났다. 1957년 5월은 그렇게 지나갔다.

초여름에 이르렀다. 까마득한 하늘서 내려 온 장맛비는 대웅전 천장을 뚫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한 두 곳 새는 게 아니었다. 대중은 성급히 달려가 바가지며 깡통들을 갖다 대는데 여념이 없었다. ‘산을 갈아 밭을 일구는’일은 석남사에서도 지속됐다. 해 뜨며 시작된 일, 해가 져야 끝났다. 절 찾은 사람들이 소곤댔다. “석남사에는 스님은 없고 시커먼 소들만 있네!”

세속 사람들의 말 언짢게 들리지 않았다. 승가의 법도에 따른 운력이었기 때문이다.

면벽 수행은 달과 별이 떴을 때 부터다. 정진하다 졸면 산에 가 나무 한 짐 해서 내려와야만 했다. 자는 시간 아닌데 누워 있다가 인호 스님의 주장자로 머리며 어깨, 종아리를 강타당한 적이 몇 번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얼굴에 끼얹어진 찬물에 비명 지르며 깨어난 비구니들 역시 한 둘이 아니었다.

며칠 연이어 배가 아프다 하셨던 인홍 스님이 쓰러졌다. 병명을 알 수 없어 부산 병원으로 내려갔다. 

 


중은 똥 밟아도 언 땅 걸어도 불평 않는 신발이어야 해요!

 

▲ 법희 스님은 “2016년도 새해였고, 2018년도 새해로 다가올 것”이라며 “숫자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지금’만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인홍 스님께서는 조석예불 빠진
제자만은 용서치 않았습니다.
일주일 참회정진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혹독한 벌을
내려 엄히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부엌에 오래
머물지 말라 하셨습니다.
수행자의 마음이 먹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절은 많이 하셨으면 합니다.
업장 녹이는 데 절만한
방편이 없고, 하심(下心)을
세우는 토대가 됩니다.”


출가 해 처음 겪는 일!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불필 스님 붙잡고 성전암 성철 스님을 찾았다.

“너희 대장, 지금 죽으면 안 돼!”

눈물이 흘렀다. ‘살아야만 한다’는 그 말씀 너무 고마워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석남사로 돌아와 성철 스님이 일러준 대로 했다. 16 비구니 4인1조. 두 명은 108 대참회 올리고, 둘은 능엄주 염송에 집중했다. 목탁염불소리는 하루 24시간 21일 동안 1분1초도 끊이지 않아야만 했다. 전 대중이 간절하게 호소했다.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예경하나이다. 부처님이시여! 우리 스님을 위해 기도하나이다!’ 

석남사 전 대중이 기도를 올릴 때 부산 병원에서는 수술이 시작됐다. 췌장 염증이 심각해 목숨이 촌각을 다투고 있었다. 법희 스님이 내려가 병실을 지켰다.

인홍 스님이 깨어났다. 법희 스님 보자마자 한 말씀 하셨다. “수술실 들어 갈 때 마취돼 막 잠이 드는데 그 때 보살님 네 분이 오셨어. 관음, 문수, 보현, 대세지보살님! 내 배를 만져 주셨는데 아프던 배가 싹 가시는 거야!”

금새 쾌차한 인홍 스님은 석남사로 돌아와 사부대중과 함께 21일 정근에 동참했다. 그 때가 1964년. 이후 석남사 대중은 1997년 4월의 봄까지 주장자에 맞고 찬물을 뒤집어썼다. 

인홍 스님이 입적에 든 지 20년이 되었지만 석남사는 지금도 가지산 아래서 꿈틀거린다. 윤회를 끊고 피안의 세계로 뛰어 오르려는 용솟음이다.

▲ 법희 스님이 초겨울의 감나무 길을 포행하고 있다.

선원만도 용맹정진에 매진하는 ‘심검당’, 결제철 때마다 운수납자들이 가부좌 트는 금당선원, 그리고 석남사 대중이 정진하는 정수원  세 개가 운영되고 있다. 매월 1일(음력) 새벽 3시면 삼천배하겠다는 재가불자들이 몰려온다. 새해 정초 3일(음력)부터 7일간 철야정진(108대참회, 능엄주 염송)도 이어진다.

백장 선사의 ‘하루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 성철 스님의 ‘부처님 법대로 살라’, 그리고 ‘일과 수행이 둘이 아니다’라는 인홍 스님 가르침이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석남사다. 은사의 뜻을 올곧게 받들며 이어가는 법희 스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어느 문중, 그 어느 선원의 스님들보다 ‘강골’이라는 석남사 대중을 보고도 법희 스님은 걱정이다.

“공부하려는 마음과 이생에서 윤회 끊겠다는 원력은 우리 때와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몸이 약해! 그래서 쉬어야 할 땐 쉬어야만 해. 그렇다 해도 눈 푸른 납자로 키워 내야지요!”

석남사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 어디서 분출되는지 확연히 알 법하다.

▲ 10대 초반의 소녀 때부터 결혼을 단념했다고 들었습니다.
“절에 못 갈까 봐! 시집가면 남편, 시아버지, 시어머니 눈치 봐야 하지 않습니까? 시댁이 불자 집안 아닌 이상 절길 나서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겁니다.”

▲ 홍제사 처음 당도했을 때의 감회가 지금도 남아 있는지요.
“평생 못 잊습니다. 도솔암서 내려오시는 은사스님의 모습은 참으로 거룩했습니다. 그날 저녁 내내 절하면서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나도 정진하면 저런 풍모 내 보일 수 있을까?”

▲ 은사 인홍 스님은 어떤 분으로 남아 있습니까?
“호랑이! 홍제사 도솔암서 정진하셨을 때, 밤이면 문 앞을 서성이는 호랑이가 있었답니다. 문을 툭툭 치기도 했는데 꿈쩍도 안 하셨다 해요. 홍제사와 도솔암 인근의 산 중턱에 사냥꾼들이 덫을 자주 놓았는데, 은사 스님이 눈에 보이는 대로 다 걷어 냈어요. 사냥꾼들의 항의가 빗발쳤지요. ‘스님이 뭔데 남의 덫 함부로 치우’냐고. 우리 스님 목소리가 더 컸어요. ‘여기는 절이 있는 부처님 산입니다. 당신들은 왜 절 허락도 없이 불산(佛山)에 들어와서는 함부로 생명까지 해칩니까? 서(署)에 가서 따져 볼까요?’ 그 호통에 다들 혀를 내두르며 두 말 않고 돌아갔지요.”

석남사 대웅전에 비가 얼마나 샜기에 다들‘콩나물 시루’라 하셨던 겁니까?

“기와 전각이라 해서 큰 기대감을 안고 남으로 내려왔지요. 그런데, 비가 오니까 전각이며 요사채며 여기저기 다 새요. 대웅전 천장서 새는 빗물 받는 깡통 댄 곳만도 50군데였어요, 그러니 ‘콩나물 시루’라 했지요. 그 대웅전 천장 기와 인(仁)자 홍(弘)자 스님이 손수 이었어요. 우리가 사다리 타고 올라가 잘게 썬 짚과 흙을 반죽한 흙덩이와 기와를 드리면 큰스님이 받아 기와들을 하나씩 이었지요. 혹시라도 큰스님 떨어질까봐 허리에 줄 감아드리고 우리는 아래서 그 줄 꽉 잡았어요. 내 목숨 떨어져 나가도 이 줄만은 놓치지 않겠다며 꽉∼ 잡았지요! 불면 ‘훅’ 날아가는 안남미(태국쌀) 한 숟갈 뜨고 한 운력이었어요. 지금도 우리는 기와불사 할 때 와공만 불러요. 흙덩이 만들고 기와 올리는 건 우리 스님들 몫입니다.”

▲ 법희 스님은 은사 인홍 스님을 매일 찾아뵙는다.

▲ 홍제사에 이어 석남사 운력도 엄청났군요.
“창고 문 열면 지게가 즐비했어요. 족히 20개는 됐을 겁니다. 지게 끈에 대중 이름도 새겨 놓았을 정도였습니다. 해우소 거름 퍼다 밭에 뿌리는 일도 우리가 직접 했지요. 지금도 무성히 서 있는 절 뒤편 숲 속 대나무도 베어다 소쿠리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남의 힘 빌리지 않고 자신의 노력으로 살 생각만 하면 세상에 어려울 일 없다’하셨던 스님이셨습니다. 이후락씨가 석남사 살림 도와준다 해도 그 힘 있으면 역경불사에 보태 달라 해 역경불사가 시작됐지 않았습니까?”

▲ 천길 벼랑의 나뭇가지 잡았던 손도 거침없이 놓으셨을 큰 스님인 듯싶습니다. 말 안 듣는 제자라면 가차 없이 내치셨겠습니다.

“그 누구도 내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한 중생을 제도하려고 백 천생을 따라 다닌다’며 그 누구든 재목으로 키워내시려 온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 모든 대중을 안는 큰 품의 소유자이셨군요.
“그런데, 절대 용납 안 하시는 게 있었어요. 석남사서 큰 장을 보려면 언양으로 가야 하는데 왕복 60리 길입니다. 짐을 손에 들고 머리에 이며 걸어서 돌아왔으니 얼마나 노곤합니까? 그렇다 해도 조석예불엔 반드시 참석해야 했습니다. 이를 어기면 일주일 참회정진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혹독한 벌을 내려 엄히 다스렸습니다.”

▲ 승려의 길을 걷는 이에게 당부하셨던 말씀도 있으셨겠습니다.
“‘승(僧)’자를 파자하면 사람 인(人)변에 ‘일찍 증(曾)’이니, 스님이란 그늘진 곳이든, 남들이 가기 두려워하는 곳이든 보통 사람보다 ‘먼저 가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인천(人天)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계정혜를 구족한, 생사를 벗어 난 수행자를 의미합니다.”

▲ 인천의 사표를 육성하고자 했으니 남다른 방편을 쓰셨겠습니다.
“한 예로 도량 내에서는 모자를 못 쓰게 하셨어요. 한 여름 폭염에도 밀짚모자 쓰고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밭에 나갈 때도 다 해진 모자를 써야만 했어요. 눈바람 날리는 겨울에도 털모자마저 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털모자는 노스님들만 쓸 수 있었지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 여름의 태양빛도 받지 않으려는 정신으로 무슨 공부를 하느냐는 겁니다. 젊은 시절부터 찬바람에 머리를 단련해야 산사의 혹독한 추위도 견뎌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부엌에 오래 머물지 말라 하셨습니다. 수행자의 마음이 먹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스승의 말씀 중 지금도 가슴에 새겨두시고 있는 말씀이 있으신지요?
“중은 신발과 같이 살아야 한다 하셨습니다. 발은 신체의 가장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발은 그 발을 보호하지요.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이라도 의미가 있을 터이니 마음을 다하라는 뜻일 수 있겠습니다. 불평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똥을 밟아도, 언 땅을 걸어도 신발은 아무 말 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걷는 발을 조용히 받치고 있을 뿐입니다.”

▲ 경전 말씀 하나를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화엄경에 ‘믿음이 도(道)의 근본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온갖 선법(善法)을 길이 기르며, 의망(疑網)을 끊고 애류(愛流)에서 벗어나 열반의 무상도(無上道)를 드러낸다’했습니다. 믿음 없는 해탈은 불가능합니다.”

▲ 재가불자님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나름의 정진을 하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다만, 어떤 수행법을 택하고 있든 절은 많이 하셨으면 합니다. 업장 녹이는 데 절만한 방편이 없고, 하심(下心)하는 토대가 됩니다. 그리고 오계를 지키는 데 마음을 다하셔야 합니다. 스님들도 삭발염의한 순간부터 다짐합니다. ‘지금 이 몸이 불신(佛身)에 이르기까지/ 금하는 계율 견고히 지켜 훼범(毁犯)하지 않으리니/ 원컨데 모든 부처님께서 증명해 주소서/ 차라리 신명을 버릴지언정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이제 2017년 새해입니다.

“2016년서 보면 새해이고, 2018년서 보면 지난해 입니다. 분명한 건 2016년도 새해였고, 2018년도 새해로 다가올 거라는 겁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만 있을 뿐입니다. 올해도 최선을 다해 정진하는 불자가 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법희 스님은

1930년 경북 봉화 춘양 출생. 1954년 봉화 홍제사서 인홍 스님 은사로 출가. 1955년 홍제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7년∼1968년 석남사 총무. 1961년 통도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8년∼1975년 석남사, 내원사, 약수암, 윤필암 등의 선원서 안거 성만. 1976년∼1984년 석남사 주지. 1984년∼1992년 석남사 안거 성만. 1993년∼현재 석남사 선원장.  

 

[1374호 / 2017년 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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