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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에게 길을 묻다] 2. 그림으로 읽는 원효의 일생

기자명 조정육
  • 새해특집
  • 입력 2017.01.03 18:31
  • 수정 2017.01.03 18:34
  • 댓글 1

천촌만락서 노래하고 춤추며 가난한 이 교화한 보살정신 실천자

▲ ‘화엄연기회권-원효회’ 부분, 카마쿠라 시대, 종이에 색, 31.7×1,414.5cm, 일본 교토 고잔지. 이 부분에는 원효가 여러 승려들을 대상으로 설법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일본 교토(京都)의 고잔지(高山寺)에는 한국과 관련된 중요한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617~686)의 진영 및 두 고승의 행적을 그린 ‘화엄연기회권(華嚴緣起繪卷)’이 그것이다. ‘화엄연기회권’은 줄여서 ‘화엄연기’ 또는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이하 화엄연기)이라고도 부른다. ‘화엄연기’는 ‘의상회’ 3권과 ‘원효회’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시 유행하던 그림 형식인 에마키(繪卷:가로로 긴 두루마리 그림)로 그려졌다. ‘화엄연기’를 제작한 사람은 고잔지를 창건한 묘에(明惠, 1173~1232)다. 묘에는 제자인 죠닌(成忍)을 시켜 두 고승의 행적을 그리게 했다. 그림을 제작하게 된 배경에는 자신이 평소 흠모하던 두 고승의 행적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가 가장 컸지만 고잔지를 화엄종 사원으로 부흥시키고자 한 의도도 숨어 있었다. 원효의 전기(傳記)는 현재 ‘송고승전(宋高僧傳)’ ‘고선사(高仙寺)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세 종류가 전해진다. 그 중 ‘화엄연기’는 ‘송고승전’을 바탕으로 그렸다. 본고에서는 ‘화엄연기’를 기본으로 하고 세 종류의 원효 전기를 참고하여 그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 가다
시체 썩은 물 마시고 확철대오
‘삼계유심 만법유식’ 체화한 뒤
요석공주 만나 아들 설총 낳아

환속하고 인도·중국서적 독파
황실·관료들 앞에서 강설 펼쳐
‘화엄연기’는 묘에 스님 제작
원효·의상 널리 알리려는 의도

단순 학자·이론가로 살지 않고
자신의 이론을 실천 통해 증명
사람들 ‘나무아미타불’ 부르도록
거리 돌아다니며 조롱박 두드려

원효는 성이 설(薛)씨로 압량군(지금의 경산)의 불등을촌(佛等乙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담내(談)는 신라의 17등급 중 11위인 나마(奈麻)였다. 어머니는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했는데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그가 출가하기 전까지의 젊은 날에 대한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가 지은 ‘발심수행장’을 보면 당시 수행자로서 얼마나 진지하게 구도정진에 진력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절하는 무릎이 얼음 같아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고, 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아도 밥을 구하는 생각이 없다. 백 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게을리하랴!”

원효는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에 평생의 도반이었던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당나라의 장안에서 현장(玄)이 펼쳐 보인 새로운 불교의 세계를 배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경인 요동에서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661년(문무왕 원년), 40대 중반에 이른 그는 다시 당나라를 향해 길을 떠난다. 학문을 향한 열정 혹은 구도를 향한 열망은 나이를 먹는다 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 의상과 함께였다. 두 사람은 배를 타기 위해 남양만으로 향하던 중 직산에 있던 무덤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무덤에서 시체 썩은 물을 마시고 확철대오한 일화는 워낙 많이 알려진 내용이라 생략하겠다. 다만 이때 원효는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이 비로소 육화(肉化)되었음을 깨달았다. 더럽고 깨끗함이 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깨달음이 삼계유심이고 만법유식이었다.

다시 신라로 발길을 돌린 원효는 요석공주를 만나 아들 설총을 낳은 후 승복을 벗고 환속한다. 자신에 대한 명칭도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 불렀다. ‘소성’은 ‘마음이 작다’는 뜻이고 ‘복성’은 ‘아래 하(下)자도 못 된다’는 뜻이니 매우 낮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의 파계와 환속은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중생교화를 위해 스스로를 낮춘 것일까. 원효 스스로 그 사정을 밝힌 적이 없으니 내막이 분명하지 않다. 정확하지 않으니 수많은 비약과 억측이 난무한다. 출가했다 환속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걸핏하면 원효를 들먹거릴 때면 견강부회의 느낌마저 든다. 원효의 환속이 단순히 순간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님은 그 이후의 행적이 말해준다.

소성거사가 된 원효는 엄청난 양의 인도서적과 중국서적을 독파하며 교학에 정진한다. 콧대 높은 신라 황실 사람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조정 관료들이 그에게 귀의하여 강설을 들었다.  ‘화엄연기’에 그려진 부분은 원효가 여러 승려들을 대상으로 설법하는 장면이다. 난간 오른쪽에는 관료와 거사가 합장을 하고 설법을 경청하고 있다. ‘송고승전’에는 그가 황룡사에서 경전을 강설한 모습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강경(講經)의 날이 되어 왕과 신하, 그리고 도속(道俗) 등 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법당을 가득 에워싼 가운데 원효의 강론이 시작되었다. 그의 강론에는 위풍이 있었고, 논쟁이 모두 해결될 수 있었다. 그를 찬양하는 박수소리가 법당을 가득 메웠다.”

그림에서는 원효를 소성거사가 아닌 출가자로 그렸다. 단순히 추앙하기 위해 출가자로 그린 것이 아니다. 그는 환속한 이후에도 많은 시간을 절에 머물렀고 학문 연구와 강설은 만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일체의 도리를 모두 다 통달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은밀하고 미묘한 이치를 연구하고 분석’했다. 55세에 행명사에서 ‘판비량론’을 지었고, 분황사에서는 ‘화엄경소’를 지었다. 한국불교사에서 원효를 뛰어넘는 저술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그의 업적은 눈부시다. 그는 뛰어난 학승(學僧)이었고 불교학자였다. 그러나 원효는 단순한 학자, 이론가로 살지 않았다. 이론은 실천 속에서 증명되었다.

사실 원효에게는 승과 속이 다르지 않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곳이라면 세간과 출세간이 따로 없었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불성에 있어서는 한 치의 차이도 없는 똑같은 부처였다. 황제든 정승이든 광대든 백정이든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없이 많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조롱박을 두드리고 노래하고 춤췄다. 일체의 걸림이 없는 무애행(無碍行)이었다. 이런 원효대사를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 스님은 ‘불기(不羈)의 자유인’이라고 표현했다. 굴레가 없고 매인 곳이 없다는 뜻이다. 조롱박을 가지고 ‘천촌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돌아다녔으며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다. 입으로 부처를 부르고 귀로 부처를 듣는 것. 그것이 염불이다. 염불은 사람들이 부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는 비법이었다. 원효는 사람들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했다. 아니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는 이곳이 바로 정토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소망했다. ‘삼계유심 만법유식’의 차원을 삶 속에서 확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염불이었다.

원효가 살았던 시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마무리하는 단계였다. 어느 누구도 전쟁의 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힘든 사람들은 버림받은 빈민계층이었다. 시시때때로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야하는 그들에게 조롱박은 원효가 민중속의 부처를 만나는 매개체였다.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 때 활동한 구야(空也, 903~972)와 가마쿠라(鎌倉) 시대의 잇펜(一遍, 1239~1289)도 춤염불로 불법을 전파했다. 염불에 가락을 붙여 징이나 호리병박을 두드리며 추는 춤염불은 기아나 질병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 어려운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라 염불을 통해 불법을 전하기 위한 최고의 포교방법이었다. 춤염불의 출발선에 원효가 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벗어버리면서까지 대중교화에 나선 원효대사야말로 진정한 보살정신의 실천자였다. 이런 원효의 행동은 당시 신라 불교계에서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승려사회에서 ‘만인의 적’으로 매도당하며 국왕이 개최한 백고좌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 조정육
미술평론가
삶 자체를 불꽃처럼 뜨겁게 산 원효는 70세에 혈사에서 입적했다. 환속하였기에 문도를 이루지 못한 원효의 죽음은 쓸쓸했다. 그는 입적 이후 통일신라불교계에서 차츰 잊혀갔다. 그러나 11세기 후반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에 의해 재평가가 이루어져 화쟁국사로 추봉되었다. 지금까지도 원효는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수행자로 평가받는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74호 / 2017년 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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