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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에게 길을 묻다] 3. 원효의 사상

  • 새해특집
  • 입력 2017.01.03 18:42
  • 수정 2017.01.03 18:44
  • 댓글 1

걸림없이 서로 열고 서로 안는 ‘통섭’의 지평을 열다

▲ 원효 대사 추모를 위해 신라 때 건립했던 서당화상비 탁본.

매력은 끌리게 하고, 마력은 홀리게 한다. 매력은 끌려가는 자의 주체성을 허용해 주지만, 이것저것 재보는 거리두기마저 없앨 정도는 못된다. 마력은 거리두기를 허용하지 않는 흡인력을 보여주지만, 성찰에 필요한 주체성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맹목성이 있다. 끌리지만 홀릴 정도로 들어서지 않는다면 간보기로 끝날 것이고, 홀려 하나가 되지만 성찰의 자리를 쉽게 내준다면 맹목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원효 대사 통섭은 다양한 것들이
각자자리서 서로 열고 안는 지평
권력적 위계·흡수유혹 원천 해체

화쟁논법 역시 통섭 위해 펼쳐
모든 실천과 염원도 통섭 향해
삶의 문제 해결과 치유력 강해
성찰적 불교탐구의 주목할 모범

탁월한 보편적 수준을 정교한
지식·언어에 담아 춤추듯 굴려

그런데 마력적인 매력, ‘홀릴 정도의 끌림’이라면 어떨까? 요리조리 재보고 간보는 손님자리에 머물게 하기도 하지만, 끌려들어 갈수록 더욱 주인 눈 밝혀 주는 흡인력이라면 어떨까? 부처님 이래 그 계보 안에서는 그런 마력적 매력을 뿜어내는 영성들이 그 어느 계보에서보다 즐비하다.

1400년 전 한반도에는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인물 하나가 등장한다. 원효! 그가 남긴 행적과 언어는 지금도 줄지 않는 마성의 매력을 강렬하게 뿜어낸다.

원효사상은 다채로운 결이 중층적, 융섭적으로 어우러져 직조되어 있다. 그의 사유를 구성하는 언어는 그 깊이와 높이, 넓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상찬을 위한 수사적 과장이 아니다. 한 글자, 한 문장, 한 단락씩 짚어가며 대화를 시도하다 보면, 언제나 예상보다 앞선 자리에서 손짓하는 원효를 보며 흠칫 놀라게 된다. 이런 수준의 인물을 등장시킨 한반도 토착지성의 역량이 놀랍기만 하다.

원효사상을 관통하는 원리로서는, 그가 구사하는 일심(一心), 화쟁(和諍), 무애(無碍), 회통(會通), 화회(和會) 등의 용어가 자주 거론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중 어느 말을 잡아도 원효사상의 면모가 적절히 포집된다. 어느 면모에 가중치를 두느냐에 따라 선호가 갈리지만, 어느 하나를 택하여도 다른 면모들이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원효사상의 특징이 여기에 있다. 원효가 펼치는 다채로운 통찰과 언어는 ‘서로를 향해 열려 있고’ ‘서로를 껴안아 들이는 면모’가 특히 뚜렷하다. 그의 사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원효사상은 단연 통섭(通攝)적이다. 열려 있기에 ‘서로 통하고’(通), 걸림 없이 받아들이고 또 들어가기에 ‘서로 껴안는다’(攝). 그래서 필자는 원효사상을 관통하는 원리를 담아내는 말로서 ‘통섭’을 선호한다.

근자에는 학제간 융합의 요청이 통섭(統攝)이라는 말에 담겨 유행한다. 융합을 추구하는 일련의 방법론적 경향을 아예 통섭학(統攝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통섭(統攝)과 통섭(通攝)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통섭(統攝)은, 다양한 것들을 하나로 수렴하려는 지향이라는 점에서 편입과 통합의 권력적 속성이 수반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통섭(通攝)은, ‘다양한 것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열고 껴안을 수 있는 지평’이라는 점에서 권력적 위계나 흡수의 유혹을 원천에서 해체시킨다.

▲ 원효사상의 완숙한 경지를 담고 있는 ‘금강삼매경론’.

원효사상에서 보자면, 융합은 통섭(統攝)이 아니라 통섭(通攝)이어야 한다. 끌어다가 한데 묶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각자 그 자리에서 제 역할 하게하고, 제 자리에서 사방으로 열게 하며, 서로를 밝게 비추고 따사롭게 안게 하는 것이 원효의 통섭이다. 실제로 원효는 통섭(統攝)이 아니라, 통섭(通攝), 통(通), 섭(攝), 총섭(總攝), 회통(會通), 화회(和會)라는 말을 즐겨 구사하는데, 그 용어들이 채택되는 맥락을 보면 모두가 ‘통섭(通攝)’지평의 언어적 변주이다.

원효가 화쟁철학을 전개할 때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문(門; 조건인과의 맥락/계열)의 식별과 구분’인데, 문(門) 구별을 통해 펼치는 화쟁논법은 결국 ‘통(通)’과 ‘섭(攝)’으로 귀결된다. 통섭을 위해 화쟁논법을 펼치는 것이다. 또한 원효가 즐겨 구사하는 무이(無二)/일미(一味) 등의 용어도 통섭으로 들어가고 통섭에서 발산된다. 이런 사정은 일심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심철학과 화쟁철학 모두를 관통하면서 그 통찰의 핵심을 드러내는 용어와 내용이 바로 ‘통/섭’인 것이다. 원효의 모든 탐구와 성취, 실천과 염원은 통섭을 향하고 있다.

개인과 인간세상은 비(非)연기적 관점/욕망/행위에 의해 칸칸이 ‘닫히고 막혀’ 있다. 이 폐쇄와 불통의 프레임은, 차이와 타자를 밀어내고 제압하려는 폭력성을 원천으로 품은 채, 그 살기를 분출할 기회만 기다린다.

인간이 집단의 구성원으로 생존을 도모한 이후, 집단이익의 확보전략과 맞물려 축적되어 온 이 불통과 배제의 체계는, 국가방식의 군집전략이 정착한 이후로는 논리와 사상, 문명과 문화, 관습과 제도에 의해 보호되고 강화된다. ‘닫힘과 밀어냄’을 속성으로 삼는 이 무지와 폭력의 구조적 경향성은, 개인에게는 본능처럼 내면화되었고 사회와 세상에게는 지배적 운영원리로 군림하게 되었다.

인간의 행적 전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종합적으로 성찰하게 된 작금에서야, 우리는 붓다의 연기(緣起) 법설이 지닌 문제해결력과 치유력의 수준 및 의미를 조금씩이나마 제대로 들추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닫힘과 밀어냄’의 무지와 폭력, 그에 수반하는 배타적 소유문명의 조건인과를 원천에서 짚어볼 수 있게 되었고, ‘열림과 끌어안음’의 지혜와 자비, 그에 수반하는 연기 공동체문명의 내용과 전망을 구체적으로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원효는 부처님 법설의 이러한 면모를 ‘통섭’으로 읽어 소화하고 실천한 인물이다.  

▲ ‘기신론해동소’.

통섭에 초점을 두고 원효와 대화하면, 그의 사상이 지니는 삶의 문제해결력과 치유력을 길어올릴 수 있게 된다. 일심(一心)사상을, ‘저 높은 신비의 자리’로 올려놓고 온갖 찬사로 숭앙하거나, 사변적 유희의 땔감으로나 즐긴다면, 원효의 모든 것은 박제화 되고 관람용 전시유품이 되고 만다. 원효를 ‘지금 여기’로 소환하여 그와 함께 ‘오늘의 세상’을 만들어 가려면, 원효사상의 통섭적 면모에 집중하는 것이 적절하다.  

원효가 눈떠 걸어간 통섭의 길은, 걸어볼 엄두도 못 내고 황홀하게 쳐다보기나 해야 할 구름 위의 신비가 아니다. 그의 통섭은, 붓다의 법설처럼, 개인치유력과 사회치유력의 근원적 수준이 동시적으로 결합하여 일상에서 작동하는 지평이다. 이 문제해결력은 깊고 탄탄한 철학적 성찰을 딛고 있기에, 당위적 구호나 반복하는 사회적 열정 수준을 훌쩍 넘어선다.

원효사상의 이러한 힘을 오늘의 관심으로 읽어내려면, 그의 언어를 읽어온 전통적 독법에 머물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읽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가 구사하는 일심이나 본각, 진여, 여래장 등의 긍정형 기호를, 본체/현상론의 ‘본체(本體)’나 발생학적 ‘기체(基體)’를 지시하는 것으로 읽는 것은 심히 부적절하다. 본질/실체주의나 그것의 다양한 변형문법들을 끌어들여 원효의 언어를 요리하는 방식은 분명 극복되어야 한다.

원효의 유식학적 통찰을 유심적 발생론으로 치환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우리는 아직 원효를 읽는 독법들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불교를 읽어온 전통독법의 틀로 원효를 찍어내는 방식은 충분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새로운 독법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전통교학의 독법이 붓다의 언어를 충분히 제대로 읽어왔을 것이라는 암묵적 합의에도 갇히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원효의 언어를 원전형태로 재구사하면서 이리저리 조합하고 분석하는 교학적 독법은 넘어서야 한다. 불교학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원효연구를 비롯한 불교연구는 이제 문헌학과 교학의 방법론적 관행과 내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문헌학/교학의 성과를 품으면서도 오늘의 관심과 현재어로 자유롭게 재성찰하는 ‘성찰적 탐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응용불교나 비교철학적 격의(格義)불교가 ‘성찰 불교학’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그 한계가 명백하다. 전통시선이 확보한 해석학적 권위에 주눅 들지 않는 기백과 역량 계발이 수반해야 가능한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원효야말로 이러한 ‘성찰적 불교탐구’의 주목할 만한 모범이라는 점이다. 원효는, 접할 수 있었던 모든 불교문헌과 교학을 정밀하게 탐구하면서도 결코 능동적 성찰의 끈을 놓지 않는다. 또 자신의 실존적 갈증과 무관한 메마른 사변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찰적 탐구의 성과를 그 시대의 현재어에 담아 정밀하게 펼친다.

그는, 지적 성취로 우쭐대려는 현학적 지식 학인도 아니고, 중심부 지식을 조금 익혀와 행세하려는 주변부 식민 지성도 아니며, 지식권력 비위 맞추며 기생하려는 기지촌 지식인도 아니다. 그는 당당한 태도로 성찰하였고, 치열하게 실험하였으며, 거칠게 자기를 검증하였다.

▲ 박태원울산대 철학과 교수
그의 성찰적 구도는 ‘지식과 지식 이후’ ‘언어와 언어 이후’를 모두 담아내는 것이었다. 또 그렇게 성취한 탁월한 보편적 수준을 정교한 지식과 언어에 담아 춤추듯 굴린다. 성찰의 깊은 주름을 품은 용맹, 격렬하게 경계와 만나면서도 빠져들거나 갇히지 않으려는 현장적 자기초월, 그리하여 경계 타고 노니는 힘 있는 자유. 좋구나! 원효여. 

twpark@ulsan.ac.kr


 

[1374호 / 2017년 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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