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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에게 길을 묻다] 4. 원효사상이 아시아에 미친 영향

  • 새해특집
  • 입력 2017.01.03 18:47
  • 수정 2017.01.1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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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사상 회통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 제고

▲ 중국 상해사범대 딩위엔 교수가 2015년 동국대에서 ‘대승기신론소’최고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분황 원효(617~686)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사상가이다. 그는 부처와 중생이 지니고 있는 ‘일심지원’(一心之源)과 ‘일심’(一心)의 구도를 통해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다. 분황 원효는 두 차례의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으나 도중에 ‘일심’을 발견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원효의 깨침은 ‘일심’ 즉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심층마음을 발견함으로써 더 이상 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후 그는 103부 210여권의 저작을 통해 이 땅의 사상가로 태어났다.

인도·중국·일본서 해설서 봇물
인도의 진나 문도는 당나라에서
‘십문화쟁론’ 보고 천축 가져가

당나라 논사 ‘판비량론’ 접하고
동쪽에 절하며 “진나보살 후신”

일본 정토진종 비조로 불린 친란
정토원생 앙신 원용해 사상 개진
명혜는 성인에게 부탁해서 그린
‘화엄종조시화전’을 펴내기도 해
18세기 전 인용 확인 저술만 25부

진나보살·구룡대사 등 별칭서도
아시아 학승들에 미친 영향 보여

원효에게 부여된 서당(誓幢), 원효(元曉), 새부(塞部), 시단(始旦), 소성거사(小性/姓居士), 원효거사(元曉居士), 구룡(靑丘潛龍), 구룡대사(丘龍大師), 해동법사(海東法師), 고선대사(高仙大師), 원효성사(元曉大師), 해동(海東), 해동교주(海東敎主), 원효보살(元曉菩薩), 초지보살(初地菩薩), 화엄지(華嚴地)의 대권보살(大權菩薩), 진나보살(陳那菩薩)의 후신(後身),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 화회(和會), 화쟁국사(和諍國師) 등의 무수한 별호와 자호 및 존칭과 시호 등은 그의 지명도와 대중적 기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효는 삼승(별/통교)과 일승(분/만교)의 구도로 구축한 사교판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승과 함께 하는 삼승은 삼승교를 함께 배우지만 아직 존재의 공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별상교인 ‘사제경’과 ‘연기경’ 및 연기된 제법의 공성을 통털어 설하는 통교인 ‘반야경’과 ‘해심밀경’에 의거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승과 함께 하지 않는 일승교 중에서 아직 보법이 나타나지 않은 수분교인 ‘영락경’과 ‘범망경’ 및 보법을 궁구해 밝히는 원만교인 ‘화엄경’과 보현교에 의거한다고 보았다. 이같은 공정한 교판은 이후 중국의 법장과 혜원(慧苑), 징관과 종밀, 한국의 태현과 표원, 견등과 균여 등의 불교 이해와 교판 구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원효는 일체 중생 개성론과 오성 각별론 즉 유성론과 무성론에 대해 서명학통의 개성설과 자은학통의 각별설에 대한 화회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의지문 즉 ‘유가론’ 등에 의거한 상호 지지의 교문에서는 생멸연기적 전개[開]를 보이며, 연기문 즉 ‘열반경’ 등에 의거한 상호 작용의 교문에서는 환멸연기적 수렴[合]을 보이고 있다. 그는 두 주장이 모두 성스러운 가르침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두 주장이 모두 맞다고 하였다. 진리에 들어가는 문은 하나가 아니어서 서로 걸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원효는 ‘마치 큰 허공이 바람 등을 의지하는 것과 같은’[猶如大虛持風輪等] 의지문에 의거하면 진과 속이 같지 않아서[非一] 중생이 본래 그러하듯 서로 차별된다. 이 때문에 무시이래로 생사에 즐겨 집착하여 구제해 낼 수 없는 중생이 있다. 반면 ‘마치 큰 바다가 파도의 물결 등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猶如巨海起波浪等] 연기문에 입각하면 진과 망이 둘이 아니어서[無二] 일체법이 모두 일심을 몸체로 삼는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무시이래로 이 진리세계의 흐름과 같지 않음이 없다. 이처럼 원효는 의지문의 차별적 관점과 연기문의 동일적 관점은 서로 방해함이 없이 모두 옳다고 회통하였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이후 태현과 균여 등에게 인용되고 원용되었다.

원효는 먼저 무명(無明)으로 념(念)이 일어나는 ‘무명업상’(無明業相, 業相)과 마음이 자신을 찾아 바라보려고 하여 능히 보는 모습인 ‘능견상’(能見相, 轉相) 그리고 그 눈에 보여지게 하는 경계로서 나타난 모습인 ‘경계상’(境界相, 現相)의 삼세상(三細相)을 제8(아려야)식에 짝지었다. 이러한 배대는 그의 앞 시대 학승이었던 담연(曇延)과 혜원(慧遠)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어 원효는 나를 개별 자아로 잘못하는 모습인 ‘지상’(智相)을 제7(말나)식에 배대한 뒤, 잘못된 념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모습인 ‘상속상’(相續相), 유근신의 나는 자신과 자신 밖의 세계를 자와 타, 주와 객으로 이원화해서 집착하는 ‘집취상’(執取相)과 이러한 분별에 사용된 언어에 매인 모습인 ‘계명자상’(計名字相), 의식의 분별 집착에 따라 업을 짓는 모습인 ‘기업상’(起業相)을 제6(요별경)식에 대응시키고, 그 업에 따라 고통의 보를 받는 모습인 ‘업계고상’(業繫苦相)을 고과(苦果)에 배대하여 육추상(六麤相)의 구도 아래 망념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분별사식)과 의(말나식과 아려야식)의 작용, 다시 그것을 상응염(執, 不斷, 分別智)과 불상응염(現色, 能見心, 根本業)으로 해명하고 있다.

▲ 독일에서 발견된 ‘대승기신론소’투르판 필사본 단간(왼쪽) 원효 저술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원효가 근본번뇌에 해당하는 삼세상을 현식(現識)인 제팔식에 배대한 것은 부처의 지위에서 비로소 무명주지번뇌를 끊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또 분별사식(分別事識)인 육추상의 지상을 제칠말나식에, 생기식(生起識)인 상속상·집취상·계명자상·기업상을 제육요별경식에, 그리고 소생과(所生果)인 업계고상을 고과(苦果)에 배대한 것은 일승과 삼승의 전관적 구도 아래 파악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반면 담연은 삼세상을 제칠식이라 하고, 육추상을 제육식이라 하였다. 정영사 혜원은 무명업상·능견상·경계상·지상·상속상까지는 제칠식이라 하였고, 집취상·계명자상·기업상·업계고상을 제육식이라 하고, 아리야식은 직식(直識)이라 하였다. 또 법장은 무명상·능견상·경계상의 삼세상을 아리야식에 배대하면서도 지상·상속상·집취상·계명자상·기업상·업계고상의 육추상은 육식이라 하여 제칠식은 논하지 않았다.

원효가 이들과 달리 삼세상을 아리야식에 배대하고, 육추상을 각기 제7식과 제6식 및 고과에 배대한 것은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원효 심성론의 독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저술과 행장은 신라의 경흥, 둔륜, 태현, 표원, 견등 등과 고려의 균여, 의천, 지눌, 일연 그리고 조선시대의 설잠, 추사와 대한시대의 최남선, 장도빈, 조봉암, 김동화, 조명기, 이기영 등에게서 인용되거나 거론되어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원효의 대표작인 ‘십문화쟁론’은 인도의 진나(陳那) 문도가 당나라에 왔다가 이것을 천축으로 가져갔다는 일본 순고(順高, 1254~1261)의 ‘기신론본소청집기’(권제2말)의 기록으로 볼 때 범어로 번역되어 읽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원효는 당시 널리 통용되었던 불교인식논리학의 주요 기호인 현량(지각)과 비량(추론) 중 특히 비량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구하였다.

그는 55세(671)에 행명사(行名寺)에서 비량(比量)에 대해 설명한 논서인 ‘판비량론’을 지었다. 원효는 불교교리에 관한 ‘비량들을 비판하여 결판을 낸다’는 ‘판비량론’에서 진나(또는 商羯羅主)의 ‘인명입정리론’에 보이는 오류론에 근거하여 유식과 인명 등과 관련된 다양한 논증식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특히 원효는 ‘판비량론’에서 소승논사의 유법차별상위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대승불설에 대한 승군(勝軍)과 현장의 교증(敎證)을 비판하고 자신이 고안한 리증(理證)의 논증식을 제시하였다. 또 원효는 현장의 유식 비량(唯識比量)을 비판하기 위해 결정상위비량(決定相違比量), 즉 대립된 주장을 성립시키는 인(因)을 갖는 논증식을 창안하였다. 신라의 순경(順憬)이 이것을 당나라에 널리 알리자 이를 본 논사들이 신라가 있는 동쪽을 향해 세 번 절하면서 원효를 ‘진나보살의 후신’이라고 찬탄하였다.

이후 원효는 신라에서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삼매경’에 대한 최초의 주석을 남겼다. 원효 입적 이후 그의 손자(抱孫)였던 설중업이 신라의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천왕을 만났다. 이때 승려 출신의 재상인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가 “일찍이 원효거사가 쓴 ‘금강삼매경론’을 열람하고 그 사람을 보지 못했음을 깊이 한스러워했는데 그 손자를 만난 것이 기쁜 일이기에 송시를 지어준다”며 원효를 격찬했다고 한다. 이 경전에 대한 주석서는 명나라 원징(圓澄)의 ‘금강삼매경론주해’와 청나라 인산 적진(仁山寂震)의 ‘금강삼매경통종기’ 2종뿐이다. 하지만 이들의 즉자적인 주석서들과 달리 원효는 이 저술에서 대자적인 주석을 통하여 자기의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

원효가 강조한 정토원생(淨土願生)의 앙신(仰信)은 일본 정토진종의 비조인 친란(親鸞, 1173~1262)이 원용하여 자신의 정토사상을 개진하였다. 그가 요석궁의 아유다공주를 만나 설총을 얻은 뒤에는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로 자호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며 대중교화를 한 것처럼 친란 역시 대처(帶妻)하여 많은 자제를 두고 염불신앙으로 민중을 교화하였다. 13세기 일본의 명혜(明惠, 1173~1232)는 신라의 원효와 의상(義湘)을 흠모하여 성인(成忍)에게 청하여 그린 ‘화엄연기’(화엄종조사회전)를 펴내었다. 그리고 그의 저서에서 원효의 설을 자주 인용하면서 그를 ‘구룡’ 혹은 ‘구룡대사’로 일컬었다.

▲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원효의 저술이 일본에 다수 유통되었던 것은 고대 한일간의 교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저술을 인용한 일본 학승이 8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선주(善珠, 723~797), 수령(壽靈, 757~791), 친란(親鸞), 응연(凝然, 1240~1321), 기변(基辨, 1722~1791) 등 30여명에 이르고, 인용이 확인되는 저술이 ‘화엄경소’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보살계본지범요기’ 등 25부에 이르는 점에서 볼 때 그의 저술이 머금고 있는 깊이와 너비가 일본의 학승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koyoungseop@hanmail.net
 

[1374호 / 2017년 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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