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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에게 길을 묻다] 6. 원효를 빛낸 사람들-원효 연구자들

  • 새해특집
  • 입력 2017.01.04 09:40
  • 수정 2017.01.0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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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법장이 첫 연구자…의천은 ‘화쟁’ 추구한 사상가로 존숭

 
한국의 불교 연구에서 원효(元曉 617~686)가 점하는 위치는 특별하다. 우선 한국불교사상의 첫 번째 장을 펼쳐 열었던 인물이 원효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만큼 근현대기의 한국불교 연구사에서 원효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아이콘과 같은 인물이었다. 이것은 동시에 그의 사상이 한국이라는 토양을 넘어 보편적인 경계를 획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원효가 이 땅에서만 추앙되고 전승되었던 인물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서 전승되고 연구되어 왔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최남선이 1930년 잡지 ‘불교’서
“진정한 의미 불교 완성자” 찬양
연구자들 ‘통불교’ 인식에 영향

이기영, 연구 지평 바꾼 개척자
‘대승기신론소’ ‘별기’ 해설서는
이후 원효 연구에서 지남의 역할
문헌학적 연구 관점 대부분 제시

고익진, 동아시아 불교사상사를
분석하면서 새 연구 영역 개척해

박성배, 미국서 연구자 배출하며
원효연구의 장 서구세계로 확대

원효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중국의 법장(法藏, 645~712)은 원효사상을 최초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원효의 첫 번째 연구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의 저술들은 저작된 직후에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도 두루 유통되고 있었다.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薛仲業)이 779~780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일본에서 원효와 그의 저술이 크게 숭상되는 것이 알려지면서, 당시 신라의 정치적 실권자였던 김언승(金彦昇, 후의 헌덕왕)의 후원으로 고선사에 원효의 비가 건립되었다. 이 같은 사실들은 원효의 저술들이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대단히 활발하게 유통되고 연구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원효의 전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전승과정을 추론하자면,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인용하는 ‘종경록’과 직후에 편찬되는 찬녕의 ‘송고승전’에 원효의 깨달음에 관련된 일화와 함께 ‘금강삼매경론’의 연기설화가 등장하고, 이 중에서 깨달음에 관련된 일화가 ‘임간록’으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해골물’ 이야기로 바뀌어간다. ‘삼국유사’의 ‘원효불기(元曉不羈)’는 이 중국의 선어록에 나타난 내용과 신라-고려로 전승된 고려 내의 전승 그리고 당시 유행하고 있던 무애무(無碍舞)를 매개로 한 대중불교의 개척자라는 이미지가 결합되면서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송고승전’의 연기설화가 일본에서 묘에(明惠, 1173∼1232)에 의해 ‘화엄조사회전(華嚴祖師繪傳)’으로 재생산되었던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원효의 전기 편찬을 통해 원효의 이미지가 삼국의 합작품으로서 만들어져가는 과정 역시 원효가 단순히 한국적이기만 한 인물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만큼 한국을 넘어선 보편의 경계를 강렬하게 드러내었던 인물이 원효이고, 그의 사상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원효의 사상에 깊이 감명 받고 그의 사상을 선양하려 노력했던 인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 바로 다름 아닌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다. 그는 교장(敎藏)을 집성하면서 원효 저술의 대부분을 집록했고, 또한 건의를 통해서 고려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도록 했다. 후에 명종대에 이르러 분황사에 화쟁국사비가 세워진 것 역시 의천의 영향일 것이다.

그런데 의천에 의해 착안된 이 ‘화쟁’이라는 시호는 의천이 원효사상을 바라본 관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그가 원효를 계승하여 추구하고자 했던 불교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원효 연구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대목인데, 이후의 원효사상 연구의 역사에서 첫 번째 틀로 작용하는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화쟁’은 단순히 사상의 대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상의 대립을 넘어서 계층과 지역 간의 화합과 원융을 의미하는 틀로서 의천에게 받아들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천의 이 같은 틀을 한국불교를 이해하는 틀로 새롭게 확장하면서 원효를 재조명한 인물이 바로 최남선(1890~1957)이다. 최남선은 1930년 ‘불교’ 74호에 ‘조선불교―동방문화사상에 있는 위치’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의 제4장 ‘원효, 통불교의 건설자’가 근현대 원효 연구에서 확정적이라고 할 만한 이미지를 부여했다.

최남선은 서론으로서의 인도불교와 각론으로서의 중국불교를 넘어 한국불교, 특히 원효에 이르러 불교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원효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교의 완성자라고 찬양한다. 특히 “효성(曉聖)의 불교가 불교적 구제의 실현인 일면에 다시 통불교(通佛敎), 전불교(全佛敎), 종합불교(綜合佛敎), 통일불교(統一佛敎)의 실현”이며, “최고 통일 최후의 완성으로서의 신불교(新佛敎)”라는 표현으로 원효의 불교를 기술하고 있다. ‘조선불교―동방문화사상에 있는 위치’는 이후의 한국불교 특히 원효 연구자들이 원효의 사상을 ‘통불교’ 혹은 ‘종합불교’로 인식하게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 같은 최남선의 인식은 조선시대 이후 종파 통폐합의 길을 걸으면서 어쩔 수 없이 통합적인 양상을 보이게 된 조선불교의 현실을, 의천이 주목했던 ‘화쟁의 원효’라는 이미지와 결합시키면서 나타나게 된 시대의 소산일 가능성이 더 높다. 60년대에 등장한 원효의 첫 번째 연구자들인 박종홍이 ‘화쟁’이라는 초점에 의해 원효의 전체 철학체계를 관통하려고 했던 시도도, 조명기가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에서 원효불교를 ‘통화불교(統和佛敎)’라고 지칭하면서 ‘총화(總和)’ 혹은 화쟁에 주목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정 때문에 원효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인 연구와 평가는 후일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지만, 최남선의 관점이 이후의 한국불교 및 원효 연구에 주요한 지렛대로 작용했다는 것은 여전히 부정하기 힘들다.

원효 연구, 나아가 원효로 상징되는 한국불교에 대한 학문적 지평의 연구를 개척한 연구자로 첫머리에 언급해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연 이기영(1922~1996)이다. 벨기에 루뱅대학에 유학했던 그는 한문불전 외의 불교 원전 연구의 서막을 연 학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원효 연구의 지평을 바꾼 개척자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는 ‘대승기신론소’와 ‘별기’에 대한 전면적인 해설서로서 ‘원효사상1-세계관’(1967)이라는 저술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이후의 원효 연구에 지남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원효 저술의 대부분에 걸쳐서 꼼꼼한 문헌학적 검토를 진행했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른 불교사상가와의 동이점에 대한 검토는 물론 서양철학과의 비교 연구에까지 나아갔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원효 연구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기본적인 문헌학적 연구 관점의 대부분이 이기영에 의해 제시되었고, 연구 영역의 확장에 대한 방향성 역시 그에 의해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기영에 이어서 등장한 연구자로 손꼽아야 하는 것이 바로 고익진과 박성배이다. 고익진은 ‘기신론’ 본문에 대한 원효의 해석학적 관점을 동아시아 불교사상사의 맥락에서 조명했는데, 특히 원효 저술에 나타난 사상적 틀을 중국 화엄종의 그것과 구체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이기영이 문헌학적 관점과 연구 영역의 확장에 기여했다면, 고익진은 원효사상을 동아시아불교사상사 내지는 한국의 고대불교사상사라는 맥락에서 구체적인 분석을 가함으로써 새로운 연구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박성배의 연구는 박종홍의 원효연구에 대한 반성으로서 출발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관점의 측면에서 보자면 60년대 원효 연구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문제의 제기라는 측면에서 원효 연구 영역의 새로운 확장자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박성배는 국내보다는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원효를 포함한 한국불교의 연구자들을 현지에서 배출함으로써 원효연구의 장을 서구세계에까지 확장한 공로를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90년대 이후의 원효 연구는 한마디로 백화만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연구자, 다양한 연구 성과라는 말로 대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집중적으로 원효를 연구하는 학자군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첫째로 역사 및 사상사의 관점에 원효의 전기 및 사상적 입지를 해석하고 천착하는데 주력한 대표적인 학자로 김상현이 있다. 불교사의 입지가 미약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원효사상의 전승과 영향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원효를 역사적 관점에서 한국사의 주요 인물로 형상화해낸 것은 그의 공로라 할 것이다. 그리고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1991)의 역주서 발간을 필두로 원효 저술을 국역하고 있는 은정희, ‘화쟁사상’을 테마로 원효사상의 특징과 적용에 대한 천착을 보여주고 있는 최유진, ‘기신론’ 주석에 대한 연구로부터 ‘금강삼매경론’에 이르기까지 원효의 다양한 저술들에서 철학사상을 논급하는 박태원 등이 있다. 특히 박태원은 최근 논리적 방법론으로서 원효의 ‘화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 지평을 제시한 것은 물론, 원효의 텍스트 전체에 대한 새로운 역주를 진행하고 있다.

▲ 석길암
동국대학교 경주 불교학부 교수
무엇보다도 최근에는 동아시아불교사상사 혹은 불교사상사 전체의 맥락에서 원효에 대한 연구가 국내외에서 공동연구가 새롭게 진척되고 있으며, 원효의 저술들에 대한 영역 작업이 최근 20여년간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것 역시 원효 연구의 시야 확장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자 및 연구 시야의 확장이 감추어져 있던 혹은 잊혀졌던 원효의 사상세계를 복원하는 계기인 동시에 원효가 추구했던 보편성을 한국적 사상으로 재구축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라 기대한다.

석길암 동국대학교 경주 불교학부 교수 huayen@naver.com
 

 

[1374호 / 2017년 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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