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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에게 길을 묻다] 7. 원효대사와 사찰연기 설화

  • 새해특집
  • 입력 2017.01.04 10:24
  • 수정 2017.01.0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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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울린 명성·민초에 대한 사랑이 국토 곳곳 전설로 피어나

▲ 불국사 말사인 포항 오어사(吾魚寺)는 원효 스님이 혜공 스님과 물고기를 먹고 똥을 누었더니 물고기가 나와 헤엄치자 서로 자기 물고기라 칭했다고 해서 오어사라 이름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사찰과 스님은 상호 부조하고 의지하는 관계에 있다. 스님은 사찰에 몸을 맡긴 채 종교생활을 영위해 나간다면 사찰은 고승 대덕과의 인연 때문에 절로 사격이 높아진다. 고래로 숱한 사찰들이 고승과의 인연을  내세우지만 역대 고승 중에 원효대사만큼 여러 사찰에서 창주로 많이 모시고 있는 분이 없다.

원효 스님과 인연된 사찰
전국에 100여 군데 넘어

각 사찰의 연기담 속에
탄생·업적·입적 등 담겨

학승과 무애행 섞여 전래
신비한 능력 활약상 많아

중국 사찰 신통으로 구원
중국까지 퍼진 명성 시사

의상·낭지·혜공 스님 등
당대 스님들 흔적도 남아

민초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가장 많은 설화 전한 이유

‘원효’를 직접 편액으로 끌어다 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여러 연기담을 내세워 원효대사와의 인연을 알리는 등 대사와의 연분을 앞세우는 사찰이 전국적으로 무려 100여 군데에 이른다. 이들 이야기를 보면 역사적으로 변증이 가능한 사례가 있는가 하면 세월이 흐르면서 사중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사례가 뒤섞여 있다. 비율로 보면 물론 후자가 훨씬 많다. 그렇다면 왜 사부대중들은 그토록 원효대사를 선호한 것일까. 사찰연기담 속에 그려진 원효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연기설화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있고 흥미위주로 전개되는 경향이 농후하지만 여러 연기담은 이런 의문을 풀고 대사의 가려진 면모, 후인들의 숭앙심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에 탄생, 집필, 교유, 파계, 종명(終命) 순으로 대사와 인연을 맺고 있는 사찰과 그에 딸린 연기담을 살펴보기로 한다.

초개사(初開寺)와 사라사(娑羅寺)는 원효대사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초개사는 경산의 불지촌에서 태어난 대사가 출가하면서 옛집을 내놓아 만든 절이며 사라사는 모친이 길을 가다 황망히 출산할 때 옷을 걸어 놓았던 사라수 나무 곁에 세운 절이라 했다. 그런데 9세기 초 세워진 서당(誓幢)대사 비에는 이 두 절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로 보아 대사의 시멸이후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대사의 성승화(聖僧化) 작업이 추진되면서 건립된 절로 여겨진다. 대사의 탄생마을을 불지촌이라 하고 출산처의 밤나무를 사라수라 명명한 것도 대사를 잊지 못하는 후인들이 그 성인을 추념하고자 하는 열의를 말해준다.

출가이후 원효대사가 누구의 문하에 들어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밝혀진 것이 별로 없다. 그에 비해 출가이후 누구의 인도로 불법을 익히고 오도의 경지에 올라섰는지를 전해주기보다 불교의 철리를 터득한 그가 격에 맞는 도반들과 어울리거나 창사에 나섰음을 전하는 일화는 흔한 편이다.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먼저 오어사(吾魚寺)를 들 수 있다. 혜공(惠空)은 원효대사가 불경의 소를 짓다가 의문이 나면 묻거나 혹은 희롱을 주고받는 상대였다. 어느 때 이들은 시내에서 잡은 물고기,새우 등을 먹고는 변을 보면서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누었다.”며 서로 낄낄댔다고 한다. 항사사(恒沙寺)로 불려 지던 절이 오어사로 바뀌게 된  내력에 해당한다. 스스로 위대함을 갖추어간 인물이지만 누구에게나 배우려 든 것도 대사이다. 미천한 신분이었던 사복(蛇福)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가하면 모친과 연화장에 들어가는 그를 배웅한다. 도량사(道場寺)는 뒷사람들이 사복과 대사의 자취를 기려서 금강산 동남쪽에 세운 절이다. 반고사(磻高寺)는 대사가 저술에 전념하던 장소로 집필 중 의문이 생기거나 막히면 찾았던 이가 낭지(朗智)스님이었다. 반고사의 사미라 칭하고 저술을 티끌과 작은 물방울로 비유하면서 대사는 간곡하게 낭지스님에게 혜찰의 서찰을 올리기도 했다.

설화에서 대사와 자주 등장하는 이는 의상(義湘)대사이다. 둘은 중국 유학을 결행할 만큼 막역한 사이지만 경산 대한리 원효암(元曉庵) 연기 속에서는 원효대사의 도력이 한 수 위였다고 전한다. 곧 의상대사가 하루는 원효암에 있던 원효대사에게 점심을 같이하자고 청했다. 원래부터 의상대사는 천중들이 내려주는 공양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터였는데 원효대사 앞에서 이를 자랑하고 싶어 날 잡아 선녀에게 미리 두 사람분의 공양을 준비해 달라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의상대사는 천중들이 자신을 얼마나 중히 여기는 지를 뽐낼 생각에 들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록 천상에선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원효대사는 마침내 만류를 뿌리치고 암자를 떠났다. 뒤에 알고 보니 선녀가 시간에 맞추어 오기는 했으나 원효대사를 지키는 신장들이 암자를 에워싸고 있어 공양을 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두 대사가 합심해 세운 절의 내력담도 흔하다. 수타사(壽陀寺), 낙산사(洛山寺), 불성사(佛成寺) 등은 두 대사의 인연으로 그 사격이 높아진 경우들이다. 대사가 의상은 물론 윤필(潤筆)대사와 더불어 창주로 전하는 경우도 보이는데 삼막사(三幕寺)가 그것이다. 이 절은 한성지역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사방을 주류하던 원효대사가 의상, 윤필대사와 더불어 관악산에 올라 막을 치고 수행한 터에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사찰연기설화들은 원효대사가 하나의 상으로 고정되는 인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숱한 불서를 지어낸 학승(學僧)으로 볼라치면 그는 어느 결에 천촌만락을 떠도는 민중승(民衆僧)으로 변해있다. 그러다가 범인의 능력을 뛰어넘어 신승(神僧)으로는 돌변하기도 하는 데 사찰연기설화에서는 무엇보다 신승으로서의 활약상이 두드러진다. 대사가 얼마나 신출귀몰한 능력자인지 살피고자 한다면 고선사, 내원사(內院庵), 척반대(擲盤臺)연기를 보면 될 것이다. 대사가 성장한 터에 세워진 절로 여겨지는 고선사에서 대사가 강설할 때였다. 한참 열변을 토하던 대사가 말을 뚝 끊더니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나라 성선사(聖善寺)가 불길에 휩싸여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눈에 비친 것이다. 지체 없이 밖으로 뛰쳐나간 대사는 그쪽을 향해 물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마침 대사의 방 앞에 연못이 있어 이 물로 성선사의 화마를 잠재우고 숱한 이를 구할 수가 있었다.

내원사연기도 중국과 관련되어 있다. 동래군 불광산에서 선정 중이던 대사가 무엇에 홀린 듯 황급히 일어나 부엌의 문짝을 떼어내 쓱쓱 ‘효척판구중(曉擲板救衆)’이라 쓴 후 공중을 향해 냅다 던졌다. 중국의 태화사(太和寺)의 뒷산이 무너져 내릴 조짐을 앞서 간파한 것이었다. 위급함을 모르는 스님, 신도 등 천 여명이 고스란히 산 밑에 깔려 죽을 수밖에 없음을 직감한 대사가 급한 대로 문짝을 날려 사중을 불당 밖으로 유인하려 한 것이었다. 과연 공중에서 선회하고 있는 문짝을 보려고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사중들은 압사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생긴 것이 내원암이다.

묘향산의 척반대 연기도 땅의 함몰로 죽게 된 중국의 승속을 구해낸 이야기로 앞의 것과 같은 유형이다. 흥미롭게도 원효대사에게는 중국의 승속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흔하다. 이는 대사의 명성이 신라는 물론 중국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문화 문물에 있어 선진국이라 자부하던 당에서 적어도 대사의 학덕과 위업만은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말해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원효대사의 생에서 극적인 분기점은 아마도 요석공주와의 결연으로 파계한 일일 것이다. 지천주(支天柱)를 생산하겠다는 큰 뜻에서 요석공주와 결혼하고 호언한대로 설총(薛聰)을 낳게 된다. 이로써 승적을 잃은 후 대사의 주유범위는 더 커진다. 소성거사를 자처하며 그가 사방을 떠돈 끝에 택한 은거처가 경기도 소요산이었다. 그곳 요석궁에 살 때 대사의 모습은 속인과 다를 바 없었다. 공주와 그곳에 머물면서 설총을 낳고 길렀던 것이다. 하지만 자재암(自在庵) 연기는 그가 속승으로 전락하기보다 승속 불이의 높은 경지를 노닐었던 인물이었음을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다시 말해 공주와 같이 산속에 들어왔으나 그는 따로 거처를 정해 전보다 깊이 수행정진에 몰입하였다.

어느 때 대사가 화두를 끌어안고 사념에 빠져들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내다보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찬비를 흠뻑 맞은 한 여인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측은지심이 발동한 대사는 여인을 방에 들도록 하고 요기 거리를 챙겨주고 잠자리까지 살펴주었다. 한데 시간이 흐르자 여인은 교태로 유혹하며 대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대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되뇌이며 금도를 지켜냈다. 유혹 실패에 화가 났는지 날이 밝자마자 여인이 암자 곁 폭포에 가 목욕하자며 대사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폭포에 이르자 대사는 그녀가 더 이상 여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대사의 마음을 흔들 수 없다고 본 여인은 화가 난 채 숲속으로 사라졌다. 한데 다음 순간 맨몸으로 사라지던 여인 대신 대사의 눈에 찬란한 후광 속에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관음보살이 들어왔다. 여색에 무너지지 않았던 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순간이었다.

▲ 김승호
동국대 국어교육과
대사가 파란만장한 생을 접고 혈사(穴寺)에서 시멸에 들자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떨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유해로 소상을 빚어 분황사(芬皇寺)에 안치했다. 그에 설총이 예배를 올리자 소상이 고개를 돌려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사찰연기설화를 통해 우리는 원효대사의 명성과 위업, 그리고 성과 속의 세계를 경계없이 노닐었던 각자의 자취를 한층 생생하게 접하게 된다.  

seung1279@hanmail.net
 

 

[1374호 / 2017년 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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