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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굴에 불교감통설화를 새긴 이유

기자명 오중철

괴리감 상쇄하고 현실·이상 연결하는 교량 역할

 
▲ 막고굴237굴 주실 천정의 서상들(사진 위)과 막고굴323굴 북측벽 부분화면(사진 아래).

‘삼국유사’는 기이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이야기들을 단순히 허황된 옛날 얘기일 뿐이라고 치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이야기들 안에 내재된 당시의 역사와 사상을 읽고, 극적으로 구성된 서사 전개 속에 투영된 신앙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도 당연히 ‘삼국유사’의 내용처럼 불교와 관련된 각종 설화들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흥미롭게도 돈황석굴(막고굴과 주변의 유림석굴, 동천불동, 서천불동을 포함한 광의의 돈황석굴)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시각적인 텍스트로 만날 수 있다.

막고굴 237굴 각양각색 보살상
323굴엔 불교 전파 과정 묘사
‘불교감통화’로 통칭되는 도상
대중에 다가가려는 설계자 의도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돈황 막고굴은 특히 불교인들에게 필수적인 순례코스로 꼽힌다. 아쉽게도 현재 문물보호 차원에서 근 500개에 달하는 굴 가운데 극히 일부만 개방하고 있다. 그 중 참관이 허락된 237굴(9세기 건립)을 방문하게 되면, 주존상을 모신 감실의 천정을 유심히 살펴보시길 바란다. 경사지게 처리된 가장자리를 따라 불상 또는 보살상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양이 각양각색이다. 어떤 상은 서 있고, 어떤 상은 가부좌를 틀고 있고, 또 어떤 상은 의자에 앉아 있다. 수인도 각기 다르며, 또 어떤 상의 경우 의복은 부처님의 것인데, 보살처럼 보관을 쓰고 영락으로 장식되어 있다. 양 손에 각기 해와 달을 들고 있는 상도 있고, 심지어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기이한 모습의 불상도 보인다. 형세를 보아 이것은 흔히 등장하는 천불이나 삼세불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상’들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이보다 앞서 8세기 초에 건립된 막고굴 323굴의 주실에 들어서면 동시대의 다른 석굴과 비교할 때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당나라 이후의 석굴은 주로 통도(通道)를 지나 조성된 주굴의 정면에 주존불을 모시고, 그 외의 벽면을 경전상의 내용을 주제로 한 변상도로 장식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323굴의 좌우 벽면의 경우 변상도가 그려져 있지 않고 하단에는 일련의 보살들이, 상단에는 여러 가지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채워져 있다. 그 내용들은 사람들이 부처(혹은 불상)를 배에 모시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장면, 탑에서 빛이 발산하는 장면, 왕이 예배하는 탑이 무너지는 장면, 승려가 손에서 검은 구름을 내어 도성에 비를 내리는 장면 등등 여러 가지 범상치 않은 상황들을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장면’들은 과연 어떤 상황을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

237굴의 감실 천정부에 그려진 불보살상들은 이른바 ‘서상(瑞像)’들을 표현한 것이다. 서상이란 부처님 본래 모습을 완벽히 재현했다거나(眞容), 빛을 발하고(放光), 길흉을 예시하거나, 예배자의 소박한 서원에 즉시 감응하거나, 스스로 이동하는 등 각종 신이를 보였다고 전해지는 특정한 상을 말한다. 323굴의 장면들은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경이로운 사건과 인물에 얽힌 상황들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남긴 흔적들, 아육왕이 불교를 전파하면서 벌어진 일들, 중앙아시아의 대승불교 중심 우전국 이야기,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기이한 일들과 고승들이 보인 신이(神異)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남북조시기에 유행했던 본생담(석가모니 전생 이야기)이나 불전고사(석가모니 생애 이야기)와 비교할 때, 시공간적으로 보다 현실적인 배경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 막고굴 9굴 통도 천정부.

‘불교감통화’로 통칭되는 이와 같은 도상들은 당대에서 송대 초에 조성된 석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위의 두 사례와 같이 여러 가지 도상들이 집체를 이루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위치를 보면 주존 감실의 천정부에서 통도 천정부, 주실의 벽면 등의 변화양상을 보인다. 그 중 가장 많이 이용된 위치는 통도 천정부이다. 10세기에 건설된 막고굴 9굴을 보면, 237굴 주존 감실 천정부에서 보이던 서상의 배치가 통도의 천정부 양쪽 가장자리로 이동한다. 그리고 천정에는 다시 우전국의 성산 우두산에 자리한 서상과 그 바로 위에 자리한 양주서상을 중심축으로 각종 불교감통설화의 장면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당대 말에서 송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 개굴 또는 중수된 돈황석굴에서는 이처럼 통도 천정부를 온통 감통설화의 장면으로 장엄한 예가 다량으로 발견된다. 이 위치는 변상도와 주존불로 구성된 완전한 부처의 세계(즉 주실)와 분리된 자리이다. 그러나 관객(예배자)이 통도에 들어서는 순간 통도 끝이 자연스럽게 주존불에 초점을 맞춘 프레임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천정의 감통설화와 연결됨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석굴 설계자의 혜안이 드러나는 부분이다.(직접 참관을 원할 경우 340굴이 개방되어 있다.)

석굴을 장엄할 때, 불교감통설화의 장면들을 삽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배자는 석굴에 들어서서 변상도에 둘러싸인 주존불을 마주하면서 하나의 이상적 불국토 속의 부처를 맞이하는 것과 같은 경건함에 젖어들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와 같은 이상적 불국토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라는 그런 괴리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감통설화의 장면들은 이때의 괴리감을 상쇄하고 현실과 이상 사이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한다. 각종 감응과 신이를 보인 불사들은 머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발생한 ‘지금 여기’의 일들이며, 통로와 주존 감실의 천정에 나란히 배열된 서상들은 이 석굴의 불상이 단순한 상(像)이 아닌 불(佛)과 다름 아님을 방증해 준다.

당대는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하고 불교의 본토화 및 세속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시기이다. 이에 따라 불교감통설화도 대량으로 생산되고 채집되었다. 그러나 돈황석굴이라는 시각적이고 입체적인 텍스트는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돈황에 새겨진 불교감통설화는 당시 대중들이 가장 많이 노래하던 불교적 역사이자 서사이고, 또 방편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그 구체적인 내용들이 무엇이고, 이것들이 당시에 어떤 방식으로 유행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재를 통해 소개하기로 한다.

오중철 중국 사천대학 박사과정 ory88@qq.com

[1375호 / 2017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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