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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나의 관리학-하

“빈승의 관리학은 대웅전과 노동울력에 있습니다”

▲ 불광산 성운대사와 제자들이 사중에서 울력을 하고 있다.대만 불광산 제공

“‘불광산 산문규범 12항’을 만들어 사중 사부대중의 수행준칙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준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삭발 날짜를 준수한다. 사적으로 도량을 세우지 않는다. 속가 집에서 밤을 보내지 않는다. 사적으로 신도와 왕래하지 않는다. 금전적인 왕래를 하지 않는다. 사적으로 모연을 하지 않는다. 승가의 윤리를 더럽히지 않는다. 사적으로 청탁을 하지 않는다. 사적으로 제자를 받지 않는다. 사적으로 사업을 하지 않는다. 사적으로 금전을 모으지 않는다. 사적으로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불광산에서는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맞추어 최근 10여년 전부터 아침 5시 반에 기상하도록 시간을 바꾸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전체 대중이 아침 4시 반에 기상하여 5시 아침예불을 하고 6시 발우공양을 하고 7시 교실에서 수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4시간 반이 지나 오전 11시 반이 되면 점심 발우공양을 하였으며 식후에는 포행을 한뒤 한 시간 정도 쉬고 나서 오후 1시 반에서 3시 반까지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런 후 한 시간 동안 울력봉사를 하였고 4시 반 개인 정비를 하고 저녁 식사를 합니다. 저녁 7시부터 자율학습을 하다가 9시 저녁예불을 하고 저녁 10시 종과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잠자리에 듭니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어서 수업 이외의 시간에는 각 반이 돌아가면서 손님의 참관을 안내하고 식사를 대접하였으며 모두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배식봉사를 하였습니다.

외부초청 강사가 시간이 되는 토요일과 일요일 수업을 해주러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오시는 날은 온종일 수업이 이어졌고 심지어 저녁 자율시간까지 수업을 하였습니다. 교리수업 외에도 수행수련으로 사경, 좌선, 삼보일배를 하였으며 온종일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외부에 우리를 비평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빈승은 우리를 비평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매일 6~8시간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당신들은 밥에 채식 한 가지로 매일 세끼 발우공양으로 일 년 열두 달 지낼 수 있습니까? 식전 식후로 ‘공양주’ ‘결재계’를 독송하며 한 끼에 한 시간이 걸리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들은 아침 4시 반에 일어나서 저녁 10시 잠드는 생활을 매일 해낼 수 있습니까? 당신들은 조석예불하고 저녁 종성에 맞춰 잠드는 생활을 매일 할 수 있습니까? 당신들은 사중을 위해 힘들게 울력하고서도 불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불광산의 모든 빈승들은 매일 불교를 위하고 대중을 위해 봉사하느라 바쁘면서도 즐겁고 의미 있게 지내면서도 대부분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마치 하루하루를 설날을 맞이하듯 지내고 있습니다.

만약 저를 빈승이라고 한다면 불광산의 제자 1000여명 모두를 ‘빈승’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그들에게 돈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으면 아마도 없다고 대답할 것이지만 생활이 즐겁냐 그렇지 않느냐를 묻는다면 그들은 아주 즐겁고 편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당신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출가해서 ‘빈승’이 되었겠습니까?

이 뿐만 아니라 불광산 종풍사상을 세우고 산문의 기강기율을 지키고자 빈승은 제자들을 위해서 ‘불광산 산문규범 12항’을 만들어 사중 사부대중의 수행준칙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준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삭발 날짜를 준수한다. ▲사적으로 도량을 세우지 않는다. ▲속가 집에서 밤을 보내지 않는다. ▲사적으로 신도와 왕래하지 않는다. ▲금전적인 왕래를 하지 않는다. ▲사적으로 모연을 하지 않는다. ▲승가의 윤리를 더럽히지 않는다. ▲사적으로 청탁을 하지 않는다. ▲사적으로 제자를 받지 않는다. ▲사적으로 사업을 하지 않는다. ▲사적으로 금전을 모으지 않는다. ▲사적으로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불교에서 이러한 규칙을 말로 하기는 간단하지만 지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불광산은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교단이기에 불광인의 행동 하나하나는 개인적인 안락만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서 단체와 대중을 생각해야 하며 공동체 정신을 고려해야 하고 ‘큰 자아(大我)’의 관념이 있어야 합니다. 대중은 공동의 법칙과 공동의 제도와 공동의 신의와 공동의 의지처라는 생각에서 공동의 자유로써 모든 일을 행하는 준칙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단체 창작과 제도적인 통솔로써 불법이 아닌 것은 행하지 않고 오직 불법을 의지로 한다”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저를 따르는 제자들과 신도가 점차 늘어나면서 대만대학교의 학생들이 스스로를 ‘대대인’이라고 하듯이 모든 불광산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불광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와 공동의 인식을 갖고자 빈승은 “어떻게 불광인이 될 것인가”라는 글 18편을 연속해서 집필해 승가와 신도 대중이 불광산의 종지와 목표, 가풍, 수칙 등에 대해 깊이 있는 인식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이 18편의 내용은 ‘인간불교 시리즈-불광과 교단’에서 참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자들에게 모든 일에 있어서 “영광은 부처님께 돌리고, 성취는 대중에게 돌리며, 이익은 사중에 돌리고, 공덕은 신도에게 돌린다”라는 정신을 구족해 일을 실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부처님의 자비광명에 힘입어 일체의 성취는 대중들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불광산 제자들은 일상에서 필히 실천하고 준칙으로 삼아야 하는 좌우명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불광산은 좋은 기운 가득한 개산 이래 모든 인연과 교감하는 곳이며, 발심하여 출가함은 가장 상서로운 일이라서 가족과 작별하고 고향을 떠났으며, 천룡팔부 모여들어 칭송하고 찬탄하니 지혜의 삶을 추구해 역사에 빛나며, 삭발하고 승복으로 당당함이 드러나고 인욕하며, 지계함을 결코 잊지 않으며, 불법의 펼침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초발심의 의지를 흩트리지 않을 것이며 등이 좌우명의 내용입니다.

“영광은 부처님께 돌린다”라는 말은 비록 불광산에는 대중들이 많아서 같이 일을 하고 있지만 개인이 공로를 차지하려고 하거나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대중을 따르고 수희 동참하여야 하고 모든 영광이 모두 단체창작에서 비롯되었으며 부처님의 자비광명에 힘입어서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취를 대중에게 돌린다”라는 말은 불광산에서 창설한 불교사업은 우리 개인의 능력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전체 대중들이 함께 이룬 것을 말합니다.

“이익은 사중에 돌린다”라고 함은 불광산에서의 모든 것은 부처님께서 건립하신 ‘육화승단’의 이념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육화(六和)’라 함은 계화동준(戒和同遵-법제적인 평등), 이화동균(利和同均-경제적인 균형), 경화동해(見和同解-신앙적 일치), 신화동주(身和同主-화목하게 함께 지냄), 구화무쟁(口和無諍-언어적인 친절), 의화동열(意和同悅-마음이 열림)입니다. 불광산 사중에서 개인은 비록 부유하지 않지만 생활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은 없으며 의식주와 차비, 질병과 여행견학 등 모든 것을 사중에서 돌보고 있습니다. 사적으로 저축하지 않고 자기 것인 양 취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근심걱정이 없는 불국정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덕은 신도에게 돌린다”라고 함은 신도가 이곳에서 신심을 내 수행하고 봉사하고 보시를 하고 있으니 모든 연분과 공덕에 그들도 한 몫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상으로 여러 가지 말을 하다 보니 저를 ‘빈승’이라고 하지만 사실 금전적인 면을 제외하면 이러한 많은 사상과 이념, 제도 등 모든 것이 다 저의 재산이고 법보라고 하겠습니다. 만약 빈승의 관리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빈승의 관리학은 바로 대웅전의 규범 속에 있고, 선방과 염불당의 규제 속에 있으며, 공양간의 발심 속에 있고, 노동울력의 일 속에 있으며, 인간관계의 조화 속에 있고, 불법정념의 깨달음 속에 있습니다. 불광산이 적당히 가난하여 청빈낙도의 생활을 보내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의 관리학입니다. 이 외에 빈승에게 무슨 관리학이 달리 있겠습니까? “불법이 있으면 방법이 있다”라고 함은 불법이 있는데 어찌 남의 탓을 하고 원망을 하거나 스스로 개탄할 리가 있겠습니까?

본래 세상은 돈이 있고 없는가의 기준으로서 빈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느낌에 달려 있습니다. 글을 여기까지 쓰다 보니 자고이래 중국대륙 총림에서 유행해온 ‘빈승’이라는 두 글자가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음이 저절로 당연해집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75호 / 2017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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