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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산다는 것은 관계 맺기

기자명 최원형

아무리 좋은 일도 타인 고통이라면 멈춤이 옳다

새날이다. 묵은해를 보내는 아쉬움이 보신각 종소리와 함께 아주 산뜻한 마음으로 자리바꿈을 했다. 시계 바늘이 자정을 향할 무렵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카운트다운을 합창했고 시계 바늘 두 개가 포개지자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몇 해 전 나는 그렇게 ‘새날’을 열었다. 한해 두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새해, 새날을 나는 어떻게 경험해 온 걸까? 어릴 적에는 새해가 되기 전에 이런저런 계획들을 거창하게 세웠던 것 같다. 작심삼일로 끝나버리는 일이 허다했어도 계획을 세우는 시간만큼은 뭐라도 할 것 같은 기개가 충만 했다. 그땐 왜 그랬을까?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였을까? 새해를 맞이하는 의례였을까? 새로움에 거는 기대였을까? 돌아보면 새해에 세웠던 계획들보다는 하루하루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계획이 생겨났고 그것을 이루는 과정 또한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끊임없이 관계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던 것 같다.

계획보다 현실적인 것이 관계 맺음
상호작용 속에 만유가 얽히고설켜
나무, 크리스마스 불빛 걸치고 신음
빛과 열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있어

그렇다, 결국 관계 맺기다. 계획보다 현실적인 것은 관계 맺음이다. 내가 있고 네가 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좌표 속에서 끊임없이 관계 맺기를 하고 있는 우리가 있다. 관계란 일방적일 수가 없고 선형적일 수가 없다.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 우주만유 일체 사물이 서로 무한한 관계를 맺으며 얽히고설켜 일체화된 그 중중무진 연기가 바로 우리 삶이 아니던가.

재작년 파리에 머물면서 나는 사르트르와 보봐르, 까뮈 등이 자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던 레 듀 마고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노변 카페에 앉아 벵쇼를 마시며 길 건너 셍 제르멩의 데 프렛 성당을 바라보았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그곳은 시간의 켜가 쌓여 있는 곳이었다.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거리엔 성탄을 축하하는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어둠이 내려앉는 시각까지 카페에 앉아 있다가 성당 앞쪽에 반짝이는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와인 잔이 연상되는 모양이었다. 멋스럽다 생각하며 바라보다가 나무가 배려 받고 있다는 게 읽혀졌다. 전기조명이 나무줄기에 닿지 않도록 군데군데 받침대를 세워 나무 주위에 전등을 늘어뜨리듯 장식했다. 성당 앞 가로수의 장식이 나무를 배려하려는 그런 의도를 갖고 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나무에 칭칭 두른 전깃줄이 아니라 나무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일이 받침대를 세워 장식한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풍경을 보면서 내 나라 거리가 떠올랐다. 성탄을 즈음해서부터 나무들은 전깃줄에 몸살을 앓는다. 아름답게 장식한 것이 보는 이들에게는 잠시잠깐의 즐거움이 될 수는 있겠으나 나무 입장에서 보면 그건 고역이다. 백화점이나 호텔 등 번화가에서 시작된 조명장식이 이젠 아파트까지 번져왔다. 내가 사는 아파트도 입구에 번쩍거리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고 신년 초까지 밤을 밝힌다. 어림잡아도 근 한 달의 시간이다.

나무와 나 혹은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나무에게도 칠흑 같은 밤이 필요하다. 칭칭 동여맨 전깃줄과 전등에서 나오는 빛과 열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거리의 장식은 대단히 일방적인 관계 맺기다. 그런 관계는 다분히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삭막한 도시에서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말해주는 나무의 고마움을 왜 연말연시가 되면 헌신짝 팽개치듯 해야 할까? 가뜩이나 빛 공해에 시달리는 도시의 나무들이 이 맘 때면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지적을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한다. 그럴 때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한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그 일은 처음, 중간 그리고 끝이 모두 좋아야한다는 것과 더불어 그 일이 나에게도 너에게도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인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도시의 빌딩 주변 조경을 눈여겨보면 큰 나무 아래 덤불을 이룬 떨기나무들이 심어진 경우가 많다. 빛이 환한 낮에 그 덤불 속을 들어다보면 그곳에는 참새 떼가 들락날락거리며 머물기도 하고 풀거미가 집을 짓고 살기도 한다.

나무는 그저 나무 한 그루, 덤불 한 무더기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반짝거리고 깜빡거리는 전등불빛이 쫓아버린 생명들을 헤아려 보면 참으로 많을 것이다. 내게 아무리 좋은 일이어도 ‘네’게 고통을 주는 일이라면 그건 멈춰야하는 것이 옳다. 지나다니는 행인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시작한 일이라 해도 말 못하는 생명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면 중간도 끝도 좋은 일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는 일은 올바른 관계 맺기를 늘 생각하며 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날, 거창한 계획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힘을 주는 ‘관계’를 생각해보는 건 어떨지.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375호 / 2017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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