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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도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상

부처님은 왕이 다스리는 왕국보다 공화국에 특별한 의미부여

▲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자리에 세워진 보드가야 마하보디사원.

인류문명의 발전과정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라는 비슷한 단계를 거치게 되었는데, 특수한 문화권에는 어느 시기가 결여되어 있고, 분명하지 않은 시기도 있다고 하지만, 대개는 일정한 발전단계를 거쳤던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대개 유사한 단계를 거치면서 삶을 꾸려왔던 인간도 비슷한 단계의 상황에서 거의 유사한 사상적 발전단계를 거쳐 진보해 왔던 것으로 이해된다. BC 8·7세기경부터 철기의 사용이 시작되면서 인도·중국·그리스 지역 등 여러 곳에서 사회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도시국가 형태의 조그마한 국가들이 비로소 그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고, 왕권도 점차 강화되어 갔으며, 농업·수공업·상업도 또한 발달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인 발전에 상응하여 점차 철학적인 사유도 발전하게 되어 세계의 기원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철학적 사색과 논의가 다양하게 이루어졌으며, 보편적인 세계종교를 창립하게 되었다. 칼 야스퍼스는 BC 8세기에서 2세기까지의 600여년의 기간 동안 동서양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사유의 창조적 혁명, 새로운 종교적 에토스의 출현을 인류역사의 기축(基軸), 혹은 차축(車軸)으로 인식하여 ‘축의 시대(axial age)’라는 역사철학적 개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철기문명이 도래하면서
사회전반에 커다란 변화

인도·중국·그리스 전지역
많은 사상가·종교인 출현

국가 주인은 크샤트리아
브라만 계급은 권위 쇠퇴

초기불교 유력한 후원자
왕과 상인출신 거대부호

인도 국가의 정치형태는
왕국과 공화국 함께 공존

공화국, 상가·가나로 불려
불교승가, 상가 이름 차용

회의와 만장일치제 원칙
독단적인 권위 원천 봉쇄

인류문명의 역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시기는 BC 6·5세기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동서양을 포함하여 고금에 독보하는 사상적인 황금기를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인도·중국·그리스 등 3개 지역에서는 거의 같은 시기에 씨족공동체가 해체되고 부족 단위 농촌 공동체의 사회적 압력이 미약해지면서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성립되어 새로운 사회생활의 기본단위가 되었다. 인도에는 16대국을 포함한 500여개의 도시국가, 중국에는 춘추오패(春秋五覇)를 포함한 140여개의 제후국,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포함한 200여개의 폴리스가 난립하여 경쟁적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하면서 대립 갈등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인생의 고통에 대응하여 여러 사상가와 종교인들이 출현하여 자유로운 사색과 다양한 학설을 주장하면서 나름대로의 해결 방법을 제시하였다. 인도에서는 브라만교의 전통적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상가와 종교인들이 등장하였는데, ‘육사외도(六師外道)’, 또는 ‘육십이견(六十二見)’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또한 중국에서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를 맞아 정치와 도덕에 깊이 관련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추구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사유에 치중하였던 인도의 사상조류와 대조를 이루었다.

그리스에서도 수많은 철학자와 소피스트들이 출현하여 윤리적인 인간행위와 진정한 실재인 이데아론 등 실로 다양한 사상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현세와 내세, 세속적인 가치와 출세간적인 가치 등 추구하는 입장의 차이는 있었지만, 나름대로 당시 사회의 정치적인 혼란과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고민과 사색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수많은 사상가와 종교인들 가운데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과 사상이 바로 석존의 불교, 공자의 유교, 소크라테스의 인간 철학으로서 BC 4·2세기경 세계제국으로 발전하는 인도의 마우리아왕조, 중국의 진한제국, 그리고 헬레니즘세계의 중심 이념을 각각 제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아가 불교와 유교는 동양 사상의 두 원류를 이루어 이후 2000여년간 동양 문화를 꽃피우게 하였으며, 그리스철학은 서양철학의 웅대한 전형을 이루게 하였다.

석존(Buddha)이 생존하였던 BC 6~5세기경의 인도사회는 씨족공동체사회가 해체되고 가부장가족 중심의 새로운 사회질서가 형성되면서 수많은 새로운 국가들이 등장하였으며, 그러한 국가들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서 도시(nagara)가 성립되고 있던 사회변혁기였다. 새로 성립되는 도시국가의 주인공은 크샤트리아 출신의 왕(ra-ja)들과 바이샤 출신의 상인(set. t. hi)들이었는데, 이 가운데 특히 크샤트리아 계급은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여 제사를 담당한 최상층의 브라만 계급보다 현실적으로 세력이 더 강해졌다.

초기불교의 전적에서도 4바루나(varn·a)의 구분은 자명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브라만의 문헌에 보이는 것과 같은 엄격한 바루나 규정은 서술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4바루나의 순서는 크샤트리아를 제1로 하고, 그것에 브라만, 바이샤, 수드라가 이어지는 형태로 변하고 있어서 신분으로서는 크샤트리아 쪽이 브라만보다 우위라는 것이 강조되었다. 당시의 갠지스 강 중하류지역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크샤트리아가 주도적인 계급이었다는 것, 석존 자신이 바로 이 크샤트리아 출신이었고, 그의 불교교단이 또한 크샤트리아에 의해서 커다란 보호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불교 사문들이 브라만 지상주의적인 주장에 비판적이었던 반면에 크샤트리아의 세속적 권위를 인정하는 입장이었다는 것 등을 의미한다.

도시를 주 무대로 하던 불교 교단이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왕들의 지원에 의해서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마다가국의 빈비사라왕,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트왕, 카우샴비국의 우다야나왕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도시는 정치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교역활동에 종사하는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의 경제활동 장소이기도 하였다. 특히 교역상인들은 대상(隊商)을 조직하여 육로와 해로를 왕래하였는데, 그 우두머리를 장자( s´restha, 또는 set. t. hi)라고 하였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길드적인 조직을 만들어 가나(gana), 또는 상가(sam.gha)라고 하였다. 상인들이 불교나 자이나교를 지지한 것은 이들 신흥종교가 브라만적인 신분차별을 부정하고 상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긍정하고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석존이 성장하고 활동한 무대가 주로 도시였던 점은 그의 교설로 하여금 브라만교에 대신하여 크샤트리아 계급의 세속적 권위와 함께 상인들의 이익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입장을 취하게 하였다.

당시 인도에서 초기불교 교단의 유력한 후원자는 크샤트리아 출신의 왕들과 함께 평민인 바이샤 출신의 상인들이었다.

석가 생존 당시 최초의 가람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 Ven.uvana)는 가란타 장자, 대표적 가람인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Viha-ra)는 수닷타 장자의 지원에 의하여 세워진 것인데, 그들의 위치가 왕사성과 사위성의 근교였던 점도 우연이 아니었다. 석존은 제자들과 함께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 설법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석가의 모습을 본 당시인들은 ‘대상주(大商主)’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불교성립 시대의 직전(BC 6세기)부터 갠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데칸고원 북부부터 서북인도에 미치는 지역에는 크고 작은 국가들이 성립되어 극심한 분립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유력한 국가를 일괄하여 ‘16대국’이라고 불렀다. 그밖에 16대국에 끼지 못한 소국들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석존의 조국인 카필라국도 변방의 소국으로서 인근의 강국인 코살라국의 보호국 위치에 있어서 주권의 제약을 상당히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국가들의 정치형태를 보면 왕국(王國)과 공화국(共和國)의 체제로 대별되었다. 16대국 가운데 마가다국, 코살라국, 아반티국, 방사국 등 4대 강국을 비롯하여 전통이 오랜 카시국 등은 왕국으로서 어느 정도 정비된 행정체제와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다른 한편 공화국은 상가(sam.gha), 또는 가나(gana)라고 불렸다. 석존이 출생한 카빌라국과 석존이 마지막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Kusinagara)가 소재한 말라국(Mala, 末羅)은 상가국이었다. 그리고 당시 가장 유명한 공화국은 밧지연맹(跋趾國)이었는데, 불전의 기록에 의하면 국가 최고의 의사결정기관은 부족집회(部族集會)였으며, 이 집회에는 라자(왕)의 칭호를 가진 7707인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부족의 구성원, 또는 그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집회를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부족제도의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던 정치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석존은 그 밧지연맹의 본부인 벳사리(Vaisali, 毘舍離)를 친히 방문하여 머물기도 하였다. 벳사리는 특히 상업이 발달하였던 도시로서 불교 교단의 가장 중요한 무대의 하나였다. 이로써 석존은 공화국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고, 공화국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마지막 공화국에서 열반에 드신 바와 같이 공화국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존은 왕국과 공화국을 두루 친히 견문하면서 법문을 설하고 후원을 받고 있었으나, 정치체제로서는 명백히 공화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석존의 공화국에 대한 정치적인 견해는 유명한 7불쇠법(七不衰法, 또는 七不退法)에 잘 나타나 있다. 석존은 대표적인 공화국인 밧지연맹 정책의 특징으로써 7가지를 들고 있었는데, 다른 왕국들과는 달리 다수인의 집회(集會), 공동동작(共同動作), 전통의 준수와 정책의 일관성, 원로의 존경, 여자와 어린아이 등 약자의 보호, 신묘(神廟)의 존숭, 종교가의 보호 지원 등이다. 석존은 여기에서 부족적인 전통을 계승하면서 평등한 관계 속에서 화합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공화국의 정치형태, 즉 상가의 모습에서 불교교단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보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석존 자신과 제자들로서 새로 구성되는 교단 이름을 공화국의 명칭을 그대로 채용하여 상가(sam.gha)라고 칭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불교의 승가는 사문(沙門)들의 회의에 의해서 운영되고, 그 결정과정은 정해진 규칙에 의해서 행해졌는데,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표결방식은 만장일치제(白四作法, 白二作法)가 원칙이었다. 그리고 교단에서는 모든 사문들의 결정권이 같았고, 서로 대등한 입장이었으며, 교단의 화합이 특히 강조되었다. 석존은 제자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였으나, 교단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행동하였을 뿐이고, 특별한 지위와 독단적인 권한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공화국에 대한 석존의 인식과 교단의 운영방식을 통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석존의 새로운 생활의 이상은 씨족적인 혈연적 대립 감정을 없애고,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동일한 시민, 또는 교단에서의 불교도라는 새로운 일체감을 갖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376호 / 2016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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