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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들의 흑역사와 네버엔딩 스토리

기자명 조정육

한겨울 모진 추위는 꽃과 열매에 대한 약속

▲ 송필용, ‘달과 고매4’, 80x117cm, oil on canvas, 2011 : 한 해의 출발은 매화꽃에서 시작된다. 딱딱한 고목에서 꽃이 피어나려면 한겨울의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 휘어지고 비뚤어지면서도 해마다 꽃을 피워 올리는 매화처럼 사람의 인생도 포기하지 않을 때 환한 꽃을 피울 수 있다. 매실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2월에 대학을 졸업하는 큰아들이 취직에 성공했다. 대기업도 아닌 중소기업에 취직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지만 큰아들의 ‘흑역사’를 들여다보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인지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온 식구 정성 다해 키운 큰아들
기대 너무 크자 자퇴·가출 강행
아들 입장서 생각하는 계기 돼
대학입학과 취직…이제는 어른

큰아들은 2대가 절에 가서 기도해 낳은 아들이다. 시어머니는 장손 집안에 시집와 1년이 넘도록 태기가 없는 며느리를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절에 가서 촛불을 밝혔다. 그다지 불심이 깊지 않던 며느리도 1년이 넘도록 대를 잇지 못하자 송구함과 불안함이 더해 덩달아 절에 가서 촛불을 밝혔다. 고부간의 정성 덕분인지 광산김씨 집안에서는 촛불을 밝힌 지 2년 만에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광산김씨 충정공파 40세손의 탄생이었으니 바로 우리 큰아들이 그 주인공이다. 집안 식구들은 장손집안의 어린 생명을 어여삐 여겨 몹시 귀하게 길렀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노심초사하며 온 정성을 다했다. 밤새 잠을 자지 않아 애먹이기도 했지만 온 집안의 보살핌 덕분인지 큰 탈 없이 잘 자라줬다. 장손은 온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 머리도 좋았다.

머리 좋은 위력은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곧바로 증명되었다. 숫자도 모르던 어린아이가 아파트 주차장에 서 있는 수많은 차량들 속을 뒤뚱거리며 달려가서는 정확히 아빠 차를 찾아냈다. 뽀얀 피부에 균형 잡힌 이목구비는 누구라도 탐낼 만큼 귀티가 흘렀다. 천재적인 머리에 잘 생기기까지 했으니 한 번 본 사람들은 결코 그 준수한 외모를 잊지 못했다. 너도 나도 칭찬하기에 바빴다. 머지않아 집안을 빛내줄 큰 인물이 될 것 같았다.

큰 인물에 대한 기대는 큰아들이 고등학교를 자퇴하면서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 살던 큰아들은 2학년 여름방학이 되자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계속 반장을 하던 아이의 느닷없는 결정이었고 기습적인 선언이었다. 설득에 지친 나는 결국 큰아들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큰아들의 생활은 낮과 밤이 바뀌었다. 낮에는 집에서 잠을 자고 밤에는 피시방에 가서 밤새 게임을 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스스로 알아서 길을 찾아갈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큰아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잔소리가 시작되었고 큰 소리가 오갔다.

계속된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급기야 큰아들은 가출을 했다. 그렇게 영특했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자책과 회한이 밀려왔다. 그때 비로소 ‘자식이 있으면 자식 때문에 근심이 생기고, 소가 있으면 소 때문에 걱정할 일이 생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실감 났다. 근심과 걱정의 근원은 집착이었다. 내 아들이 내 욕심을 채워줄 수 있을 정도로 달려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아들을 위하는 마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욕심의 반영일 뿐이었다. 큰아들의 가출은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집안 식구들의 기대가 너무 무거워 질식할 것 같다는 항변이었다. 부모의 욕심에 대한 무언의 경고였다.

막상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억장이 무너졌다. 내가 딛고 있는 삶의 토대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그저 살아 있는 얼굴만 볼 수 있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아들과 연락되지 않는 몇 달 동안 아들의 입장이 되어 현재 상황을 생각해봤다. 비록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자퇴를 했지만 본인 스스로도 그 결정을 얼마나 후회했을까. 안쓰럽고 측은했다. 비로소 큰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후 큰아들은 집으로 다시 돌아와 대입 검정고시를 치룬 후 수능 시험을 봤다. 원하는 대학을 가지는 못했지만 나름 대학생활에 잘 적응했다. 졸업할 때쯤에는 학과를 대표하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큰아들은 돈을 아껴야 한다는 개념이 희박했다. 내가 수술하기 전에 마지막이 될 것 같아 남편 몰래 큰아들에게 통장을 주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어렵게 모은 돈이었다. 그런데 몇 달 후 그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돈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 같은 것이었다. 돈을 낭비하는 버릇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돈의 소중함을 알게 하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큰아들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만 보내주고 나머지는 아르바이트로 충당해서 쓰도록 했다. 학비도 지원하지 않았다. 장학금을 받거나 학자금대출을 받도록 했다.  고생하는 아들을 보면서 모른 척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신 큰아들에게 줄 용돈을 다른 사람을 위해 보시했다. 아들 손에 든 돈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지속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들을 위해서 한 행동 중 가장 현명한 행동이었다. 과연 아들은 얼마나 변했을까.

회사에 가서 계약서에 서명을 하던 날 큰아들이 전화를 했다. 한참 동안 별 내용도 없는 얘기를 계속하던 큰아들이 마지막에 본론을 꺼냈다. 동생과 함께 쓰던 원룸에서 나와 회사 앞에 있는 곳으로 방을 얻어 나가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조심스런 부탁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터라 이미 보증금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취직한 것만으로도 대견해 바로 보내주겠다고 말을 하려던 찰나 큰아들의 말이 조금 빨랐다. 만약 보증금을 빌려주시면 수습기간이 끝난 석 달 후부터 원금을 다 갚을 때까지 다달이 얼마씩 부치겠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말은 느리게 할수록 좋고 상대방 얘기는 끝까지 듣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자식교육 하나는 제대로 시킨 것 같아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 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했을 테니 저런 말도 나오는 거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얘기는 여전히 만고의 진리다.

이렇게 자기 길을 잘 헤쳐 나가는 큰아들을 보니 이제 다시는 속도 썩히지 않고 착한 아들로만 살아갈 것 같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씩씩하게 헤쳐 나갈 것 같다. 과연 그럴까? 모르긴 해도 희비가 뒤섞인 큰아들의 네버엔딩 스토리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그러면서 결혼도 하고 책임감이 생기면서 진짜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덩치만 큰 어른이 아니라 때론 다른 사람의 어려움도 배려해줄 줄 아는 그런 어른 말이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76호 / 2016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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