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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쉽지만 어려운 일

기자명 조정육

저곳을 묻는 그대, 먼저 이곳서 행복하여라

▲ 설종보, ‘기억의 공간-밤의 정경’, 72.7x60.6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2 : 가난하고 허름한 산동네에 보름달이 떴다. 가장이 자전거에 짐을 싣고 달을 등불 삼아 귀가한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아내와 아이들이 문밖까지 뛰어나와 아빠를 반긴다. 웃음소리로 동네가 환해진다. 꽃 중의 꽃 호박꽃과 나팔꽃도 한몫한다. 사랑이 있어 충만한 삶. 행복은 거창하고 화려한 곳에 있지 않다. 세 살 어린아이도 다 아는 진리를 실천하는 데 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할까. 만나야 한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 한꺼번에 만나면 된다. 카페에서 잠깐 만나 얘기 몇 마디 나누는 것으로는 그동안 쌓인 그리움의 허기를 다 채울 수 없다.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잠을 자면서 얘기를 해야 갈증이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찾아간 곳이 쌍계사 템플스테이였다. 쌍계사를 선택한 이유는 그곳에 존경하는 스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전국에 흩어져 있던 그리운 얼굴들이 쌍계사로 몰려들었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안동에서, 전주에서…. 모두 아홉 명이었다. 한 달 전부터 각자의 일정을 확인하고 조정하고 맞추다 보니 1월 둘째 주가 가장 적당했다. 누구는 초코파이를, 누구는 케이크를, 누구는 귤을 들고 만남의 장소로 향했다. 섬진강을 옆에 끼고 오래된 절로 향하는 길은 언제 가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푸른 물결 건너 대나무 숲길 따라 구불거리는 언덕길을 오르자 반갑게 맞아주시는 스님,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 돌 틈으로 흐르는 계곡물소리, 어둠 속에 들리는 법고소리, 드디어 절에 왔다. 법복으로 갈아입고 저녁 공양을 하고 저녁예불을 끝내니 하늘에 별들이 총총 박혀 있다.

도반들과 함께 쌍계사서 템플스테이
이야기는 경청하는 것만으로 힘이 돼
행복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에 있어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다른 팀들과 함께 잠시 스님의 법문을 들은 뒤 우리 팀은 따로 나와 요사채로 향한다. 밤새 천팔십 배를 한다는 팀들의 눈빛에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 나온다. 우리는 삼천 배 아니면 안 해. 우리가 철야정진을 하고 고성염불을 해야 절에 온 것 같은 그런 짬밥은 지났잖아? 그래도 할 때는 사정없이 밀어붙여야 돼. 중얼중얼 수런수런. 고참이 신참 걱정하듯 이상한 논리로 게으름을 변명하면서 요사채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수다삼매에 돌입한다. 우리가 신청한 템플스테이는 ‘아무것도 안 하는 일정’이었다. 그냥 절에 갔다 오는 것만으로도 좋은 템플스테이. 먹고 살기 위해 혹사시키느라 찬바람에 절은 몸을 뜨끈한 방바닥에 뉘어놓기만 해도 좋은 템플스테이. 그것이 우리가 특별 요청한 일정이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수다삼매는 자정이 넘어서도 계속되었다. 결론도 주제도 없는 이야기였다. 결론이나 주제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도반은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주제고 결론이었다. 그저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들이 아닌가. 마음이 하나가 되니 별것 아닌 얘기에도 대굴대굴 구르면서 웃는다. 웃음은 암도 예방한다는데 밤새 허리가 끊어지게 웃었으니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걸신들린 아귀처럼 서로의 얘기를 주고받다가 얼굴이 벌게지고 목이 갈라질 때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을 껐다. 새벽예불에는 꼭 참석하자. 서로가 굳은 결심을 하고 눈을 감았다. 두 시간 후에 일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의지는 높이 살 만 했다. 대신 아침공양시간은 평소보다 빠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철저히 지켰다.

아침공양 후 스님 방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도현 스님의 연암토굴로 향했다. 연암토굴은 지리산 화개동천 끝자락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담한 법당이다. 법당과 살림집을 합해야 네 평 남짓. 우리가 간다는 기별을 받으셨는지 스님이 군불을 지펴 놓아 방바닥이 뜨끈뜨끈하다. 9명이 들어가자 한 평 반 되는 법당이 꽉 찬다. 스님은 젊은 객들을 뜨거운 방에 앉혀두고 당신은 입구에 앉아 여러 가지 차를 끓여주신다. 간식거리도 끊임없이 내어주신다. 빈손으로 갔는데 너무 털어먹는다 싶을 정도로 많이 내어주신다. 일단 먹여주고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에 대한 스님 법문이 시작되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 구절은 ‘법구경’의 대표적인 사구게로 석가모니부처님을 포함한 일곱 분의 부처님께서 공통적으로 강조하신 가르침이라 칠불통계게라고 한다. 한 부처님도 아니고 일곱 분의 부처님이 강조하신 가르침인데 너무나 평범하다. 임펙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역대 부처와 조사들의 어록과 행적을 모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적혀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일이었다. 군수인 백거이(白居易,772~846)가 도림(道林)선사의 명성을 듣고 진망산(秦望山)으로 찾아갔다. 백거이는 이백, 두보와 함께 중국 당나라를 대표하는 3대 시인이다. 도림선사는 늘 나뭇가지 위에서 좌선을 해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조과(鳥窠)선사라고 불렀다. 새둥지스님이란 뜻이다. 또 까치가 그 곁에 둥지를 짓고 자연히 길들여져 가까이했으므로 작소(鵲巢)화상이라고도 했다. 백거이가 찾아간 날도 조과선사는 역시 나뭇가지 위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백거이가 물었다. “스님 그곳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새둥지스님이 대답했다. “그대가 서 있는 곳이 더 위태롭소.” 또 물었다. “저는 지위가 강산을 진압하고 있는데 어찌 위태롭다고 하십니까?” 또 대답했다. “장작과 불이 서로 사귀듯이 식(識)의 성품이 멈추질 않으니, 어찌 위험치 않겠소?” 여기까지 문답을 끝냈으면 백거이도 체면이 섰을 텐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새로운 문답이 시작됐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입니다.”
“그거라면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는 것 아닙니까?”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알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 새둥지스님한테 한 방 먹었다. 그 덕분에 백거이는 더욱 불교수행에 정진했다. 그는 정토결사인 향화사(香火社)를 결성하고 선과 염불을 병행했다. 감히 나를? 그런 아상을 가졌더라면 영원히 한 방 먹은 시인으로 끝났을 텐데 다행히 스승의 가르침을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 또한 보통 인물은 아니다. 그는 ‘아침에도 나무아미타불 / 저녁에도 나무아미타불 / 화살처럼 빠르고 바빠도 나무아미타불에서 떠나지 않네’라는 시를 지을 정도로 정토염불에 전념했다.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에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것에 있지 않다.’ 불교적으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다 아는 칠불통계게만 실천해도 충분하다. 도현 스님의 법문을 들으니 ‘아무것도 안 한 템플스테이’가 더욱 값져 보였다. 천팔십 배를 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니 자부할 만하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77호 / 2017년 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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