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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상의 시작 - 우전왕상

기자명 오중철

세존에게 인가받은 불상…중국 황실 지대한 관심

▲ 막고굴231굴 천정부 서측 모서리에 그려진 세존과 불상(사진 왼쪽). 막고굴231굴 천정부 서쪽 측면에 그려진 우전왕 전단상.

불상은 언제부터 제작되었을까? 고고학의 시각에서 이것은 서기 1세기 전후, 즉 석가모니 열반 후 500여년이 지나서야 발생한 일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조각된 산치대탑의 부조에서 석가모니를 보리수, 법륜, 스투파 같은 상징물로 대체하여 표현한 것을 보면, 당시에 불가사의한 여래의 몸을 형상화하는 것에 대한 모종의 금기가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전에서 불상의 출현은 훨씬 더 이른 시기의 일이며, 극적인 서사 전개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부처님 그리워한 코삼비 우전왕
전단나무로 5척 형상 만들게 해
부처님이 도리천서 돌아왔을 때
불상과 서로 합장하며 예 표해

막고굴 231굴 주존 감실의 천정부에는, 경사지게 처리된 가장자리를 따라 각종 서상(瑞像, 신이나 영험을 표출한 것으로 알려진 특정한 불상)들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그중 서측 북단의 모서리에 배치된 화면에는 두 분의 부처님이 등장하는데 그 상황이 자못 생소하다. 왼쪽의 부처님은 방금 구름을 타고 내려온 상태에서 선 채로 합장을 하고 있다. 마주한 오른쪽의 부처님은 무릎을 꿇고 앉아 합장하며 극진하게 예를 올리고 있다. 공양자나 보살 등의 불제자가 부처에게 예배하는 장면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이처럼 깨달은 자로서 동등한 입장에서 한 부처가 다른 부처에게 자신을 낮추어 예를 표하는 장면은 적어도 도상으로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도대체 어떤 상황을 표현한 것일까?

다행히 231굴의 화면에는 식별이 가능한 방제가 남아있어 그 이해를 돕는다. “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그 (전)단상이 이를 맞아 예배할 때”. 방제를 통해 두 부처의 형상 중에 하나는 본래의 부처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전단나무로 만든 불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제 막 하늘에서 내려온 부처에게 불상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예배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 불상이 바로 경전상의 최초의 불상, “우전왕상”이다.

4세기말 한역된 ‘증일아함경’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있는 동안, 코삼비국의 우전왕(Udayana)이 세존을 너무도 그리워하여 전단나무로 5척 높이의 부처님 형상을 만들게 하였다. 뒤이어 한역된 ‘불설관불삼매해경’에서는 이보다 더욱 발전된 이야기를 전한다. 즉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돌아왔을 때, 우전왕이 만든 불상이 스스로 빛을 발하며 코끼리에서 내려와 세존을 영접한다. 이때 부처님과 불상은 서로에게 합장하며 예를 표하였다고 전하는데, 231굴의 화면은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231굴 주실 천정부의 서측에는 ‘중천축교염미보단극서상(中天竺憍焰彌寶壇剋瑞像)’이란 방제 하에 우전왕상의 형상을 따로 그려 놓았다.

경전에까지 삽입된 이 상서로운 최초의 불상은 각지에 널리 유행하였다. 현장은 코삼비국에서 우전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전단상을 직접 목격하였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상을 모사하였고, 이때 “진(眞)을 얻은 것”으로 여겼다고 전한다. 이것은 우전왕상이 석가모니 입멸 전에 만들어진 상이므로 세존의 본래 모습을 담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상의 전파과정에서 이러한 ‘진의 복제’는 단순한 형상의 복제에 그치지 않고 ‘신성의 복제’로 이어졌다. 일례로 현장은 호탄의 비마성에서 우전왕상이라고 전해지는 전단상을 보았다. 이 상은 인도의 우전왕상을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지 사람들은 상이 코삼비국에서 스스로 날아온 것이라 여겼으며, 병을 치유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등 영험을 보인다 하여 극진히 모셨다.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우전왕상이 자주 회자되었지만, 실제로 상의 유입이나 제작이 확인되는 것은 6세기의 일이다. ‘양서’에서는 남조의 양무제가 천감18년(519)에 부남국을 통하여 “천축전단서상”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속고승전’에서는 이 상이 “신이하고 상서롭기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고 전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이를 기점으로 하여 우전왕상이 사찰과 왕실을 중심으로 상당히 유행하였다. 이 상들은 반복적인 모사를 통하여 확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신이한 상으로 여겨졌으며, 심지어 그 조각의

“솜씨가 졸렬하고, 형상이 크게 달라도” 여전히 영험을 보인다고 알려졌다.

중국 역대 황실의 우전왕상에 대한 관심은 각별하였다. 왕이 직접 제작하여 세존에게 인가를 받은 상이라는 내력은 통치자에게 권위의 상징으로서 강력한 흡입력을 갖는다. 송대에 들어서면 이것이 상의 정통성에 대한 관심으로 표출되며, 상의 유래와 관련한 특별한 계보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마치 선종의 가사전승설을 연상케하는 우전왕상의 전승설은 대개 양무제의 ‘천축전단서상’이나 혹은 구마라집이 유입했다고 전해지는 우전왕상을 뿌리 삼아 상의 전승과정을 구체화하였다. 원대의 ‘책건전단서상전기’를 보면, 급기야 (모사상이 아닌) 우전왕이 제작한 본래의 상이 코삼비국에서 쿠차를 거쳐 중국에 유입되고 역대 황실로 전승되는 내력을 시기별로 상세화한 연대기가 완성된다. 이른바 ‘제왕의 불상’으로서 우전왕상이 황실로부터 극진히 모셔지는 전통은 청대에까지 이어지다가 1900년 흥인사의 화재로 소실되면서 그 맥을 끊게 된다.

물론 우전왕상이 제왕의 불상으로서만 유행한 것은 아니다. 현장이 귀국한(645) 직후, 낙양의 용문석굴과 인근의 공현석굴에서는 30여년의 기간 동안 70여구의 우전왕상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후 더 이상 조각되지 않았다. 상에 남겨진 명문을 살펴보면, 이들 우전왕상은 대부분 중하급 관리와 승려를 포함한 평민 계층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다. 이들의 조상(造像)활동은 왜 어느 순간 일제히 중단되었을까? 이 문제는 이 상들의 형식과 연원에 관한 문제와 더불어 여전히 학계의 뜨거운 논쟁거리이지만, 우전왕상 이야기가 전하는 본질적 의미와 관련지어 다음과 같은 질문과 연결할 수 있겠다.

‘불설관불삼매해경’에서 세존은 불상에게 “그대는 미래에 불사를 크게 일으킬 것이니, 내가 멸도한 후의 불제자들을 그대에게 부촉한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세존이 지칭한 “그대”는 우전왕상인가, 아니면 우전왕상을 포함한 제반 불상인가? 어쩌면 그들이 조상활동을 중단한 이유는, 반복적인 모사를 통해 누적된 상들을 보면서 우전왕상의 신성은 최초의 불상도, 제왕의 불상도, 석가모니의 진용도 아닌 우전왕의 여래를 향한 사무치는 억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간파하였고, 그 결과 우전왕상이 갖는 특수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사실 ‘불설관불삼매해경’에서 세존과 상이 서로 합장을 할 때, 무릎을 꿇고 극진한 예를 표한 이는 상이 아닌 세존이다.

오중철 중국 사천대학 박사과정 ory88@qq.com
 

[1377호 / 2017년 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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