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 최초의 똑똑한 질문

나란 무엇인지 묻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첫 질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질문은 ‘나란 무엇인가’이다. ‘나란 누구인가’가 아니다. ‘나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가’이다. ‘나란 누구인가’는 존재론적 질문이지만, ‘나는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가’는 구조론적이고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질문이다. 그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나란 없다’이다. 소위 무아론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식으로의 나는 없다. 나는 시공의 연기물일 뿐이다. 오온의 화합물일 뿐이다. 현대과학적으로는 커넥톰(connectome, 뇌신경망)이다. 놀라운 답이다.

현대과학적으로도 놀라운 문답
‘나란 무아·오온 화합물’ 역설
뇌과학도 ‘외경은 마음이 구성’

대중 중에서 수보리가 작정을 하고 묻는다. 보살이 최고의 깨달음인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으려면, 마음을 어디에 두고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중생이란 의식을 지닌 존재이다. 의식을 없애면 찬 재와 같은 무정물이 된다. 의식은 쉼 없이 활동한다. 그런데 의식은 지향성(志向性)이라 어딘가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어디에 두어야 할까?

물오른 여인을 보면 몸이 동한다. 병 없는 아침이면 조양이 일어난다. 다 살아있는 자의 특징이다. 경허 스님도 그랬고 달라이라마도 그렇다. 내 기억이 옳다면 그렇게 읽었다.(아함경에서 마라는, 부처가 정각을 이루던 날, 아름다운 세 딸을 보내 부처를 유혹한다. 이는 부처도 성욕이 일어난 순간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신성모독이라 할지 모르지만 필시 이게 사실일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기독교 구약 창세기의 정언명령이다. 성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성욕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번뇌가 문제이다. 수많은 지옥중생과 축생들과 천인들에게 생체수행도장을 제공하려면,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다. 신약의 수수께끼 같은 구절인 ‘네 눈이 건강하면 네 온몸이 빛으로 가득하리라’나 ‘몸이 성전’이란 말은 바로 이런 맥락의 말이다. 단경에서 육조스님이 인용한 ‘직심시도량’이라는 말은, 여래 십대명호 중 하나인 ‘조어장부’와 같은 맥락의, 주체적인 수행자의 내적 모습을 말한다.

현대 뇌과학에 의하면 외경은 우리가 보고 듣는 대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외경은 우리 마음에서 구성된다. 모양도 색채도 소리도 맛도 촉감도 다 그렇다. 예를 들어, 멀리 있다고 크기가 작아지는 게 아니지만 눈에는 작게 보인다. 기다란 기둥은 가운데가 홀쭉해 보인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과 불국사 회랑의 기둥을, 이집트 신전과 그리스 신전의 돌기둥을 배흘림으로 만드는 이유다. 같은 길이도 수직선이 수평선보다 짧아 보인다. 이처럼 눈은 믿을 게 못 된다.

몸을 벗은 사람 영혼이 ‘갑자기’ 냄새를 개같이 맡지 못한다면(필시 그럴 것이다. 그런 보고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은 분명 생시의 능력대로 냄새를 맡는 것이다. 개는 적색 색맹이지만 냄새는 잘 맡는다. 그러므로 개 영혼은 냄새는 잘 맡지만 적색은 보지 못할 것이다. 이는 냄새와 색깔이라는 것이 우리 뇌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경계와 뇌의 구조가 우리와 다른 개가 우리와 같은 지각을 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먼 훗날,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 다음 실험이 가능할 것이다. 사고로 시신경과 뇌시각중추가 망가진 사람에게 개의 시신경과 시각중추를 이식하면, 과연 그 사람은 노란색 물감을 전과 똑같은 노란색으로 볼까? (돼지의 심장을 원숭이에게 이식하는 이종이식(異種移植)이 이미 성공했으므로, 이게 불가능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돼지의 신경과 원숭이 신경을 이었기 때문이다. 원숭이는 2년간 생존했다.) 아무튼 우리 뇌 속에는 색깔이 없다. 생체전기 흐름만 있다. 물체에서 나온 특정 파장을 지닌 광자가 망막을 때리면 그곳의 시신경세포에 전기가 발생해 신경을 타고 뇌시각중추로 전달된다. 그러므로 뇌 속에는 전기흐름만 있지 색깔은 없다. 그러므로 색깔은 뇌의 창조물이다. 냄새도 마찬가지이다.

형태도 그렇다. 원기둥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인다. 원으로도 보이고 사각형으로 보이고 혼합형으로도 보인다. 무수한 다른 모양이 있다. 어느 게 진정한 모양일까? 모두 진정한 모양이라 해도 문제이다. 눈에 비친 특정한 모습은 특정한 각도의 모습인데 그 모습은 눈의 원근법에 의해 구성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철도의 두 레일은 평행하지만 앞에서 보면, 멀리 있는 부분일수록 가까워지다 결국은, 소실점에서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눈에) 평행선은 평행선으로 보이지 않고, 평행선으로 보이는 것은 평행선이 아니다. 평행선이 아닌 두 직선도 특정 각도에서 보면 좌우 사이 거리가 동일하게 보인다. 기이한 일이다. 오목렌즈나 볼록렌즈로는 평면렌즈와 다른 모양의 상이 만들어진다. 어느 쪽 모양이 진정한 모양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79호 / 2017년 2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