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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람이 많아야 지혜가 는다

승단은 집단의식·집단지능이 활동하는 장

가난한 사회에 왕성한 성욕은 번뇌다. 낳는 대로 다 먹여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뾰쪽한 피임수단이 없는 옛날에 성욕이 죄악시된 이유이다. 기근과 싸워야 하는 선인들의 고민이 맬서스의 인구론에 나타난다. 종교는 인구증가를 억누르려고 성욕을 탄압하는 악역을 맡았다. 하지만 사회가 풍요로울수록 성에 관대해진다. 그리스·로마가 그랬고 통일신라가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 사바세계 삶에 규제만 늘면 괴로움이 더해진다. 새 시대에는 새 사상이 필요하다. 그래서인가. 지금 한국과 같은 풍요로운 선진국들은 인구감소를 걱정한다.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수많은 ‘영계 이민’을 받아야 한다. 만약 윤회가 있다면 이게 올바른 자세이다. 윤회는, 다른 곳으로 이민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이 이민 올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

들음·사유·수행이 곧 영적 힘
모두 깨달음의 힘으로 통일돼
일체가 무아·연기이기에 가능

마음을 찬 재와 같이 만들면 안 된다. 살아있어 성성해야 한다. 활발발해야 한다. 이것이 파자소암(婆子燒庵) 공안의 주제이다. 한 노파가 젊은 수행자에게 수행처를 제공하고 극진히 모셨다. 어느덧 해와 달이 무르익자, 자기 손녀딸을 암자로 보내 시험한다. 처녀가 참선 중인 수좌의 무릎 위에 앉아 수좌를 껴안으며 묻는다. ‘지금 심정이 어떠하신지요?’ ‘고목이 삼동에 찬 바위에 기대니 따뜻한 기운이 없노라(枯木倚寒岩 三冬無暖氣)’. 수좌의 대답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노파가 분노하며 암자에 불을 질러 수좌를 내쫓았다. 수행자는 마음이 찬 재와 같아야 한다지만, 최고의 경지는 아니다.

그럼 수행자는, 보살은, 어디에 자기 맘을 두어야 할까? 여인에게 두어도 안 되고 두지 않아도 안 된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금강경’은 좀스럽지 않다. 크다. 대범하다. 조국의 독립과 같은 거대한 목표를 둔 독립군처럼 소소한 일은 처음부터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겠다. 내 몸의 100조 개 세포 중생들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세포들을 열반으로 이끌겠다.’ 이 정도는 되어야 보살이다. 저 높은 고개를 어찌 넘어갈까 지레 숨을 헐떡거릴 때, 부처님은 나중에 딴말을 못하게 미리 못을 박는다. ‘하지만 보살은 한 사람도 열반으로 인도한 바가 없다.’ 아예 마음에 일어날 자만심을 뿌리 뽑는다. 보살은 일체의 상이 없기 때문이다. 밖으로도 없고 안으로도 없다. 그게 무아다.

앞서가신 이는 뒤따라오는 이들을 보살펴주고 격려한다. ‘이리하면 이런 장애가 생기고, 저리하면 저런 장애가 생긴다. 이런 인연을 만들면 이런 인연이 생기고 저런 인연을 만들면 저런 인연이 생기고, 이러저러한 인연이 떼로 모이면 그리고 새끼인연을 치면, 칡뿌리같이 얽히고 난마처럼 설킨다. 그러므로 계율 안에 삶으로써, 마음을 번잡하게 만들지 마라. 마음을 조촐히 하고 마음을 지혜로 관조하면, 반드시 번뇌를 여의게 된다고 약속하며 격려하신다. 그런 날이 반드시 온다고 장담하신다.’ ‘그래서 스스로 진리의 등불이 되어, 내가 떠난 후에도, 진리의 등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라.’ 그게 선호념이고 선부촉이다.

그런데 사실은 수보리의 질문이 과녁을 빗나갔다. 부처님의 현존이 바로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수보리는 질문을 했고 부처는 답을 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남들의 문답을 통해서도 배운다. 그날 동산에서 대중은 스스로 묻지 않았지만, 수보리를 통해서 묻지 않은 질문을 물었고 답하지 않은 답을 얻었다. 승단이란 이런 집단의식 집단지능이 활동하는 장(field)이다. 그리고 듣고 사유하고 수행함은, 즉 계·정·혜는 이 장(field)에 작용하는 영적 힘이다. 이 세 가지 힘은, 겉보기에는 다르지만, 모두 깨달음의 힘으로 통일되므로 대통일장이론이 성립한다. 원효의 용어로는 통섭(通攝)이다.

통섭이란 서로를 향해 열려있음으로써 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일체가 무아(無我)이고 연기(緣起)이기 때문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80호 / 2017년 2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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