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4. 내가 불교 덕을 보는가-상

“불교가 내 덕을 보도록 하겠다는 것이 목표입니다”

▲ 불광산 불자들이 재해 난민들을 경내에 수용해 보호하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빈승은 ‘불교가 나를 의지하도록 하겠다(불교가 내 덕을 보도록 하겠다)’는 발원을 증진시키고자 했습니다. 불교를 위해서 저에게 지옥에 떨어지라고 하더라도 기꺼이 원해서 하겠다고 발원했습니다. 그리고 단지 인간세상에 즐거움을 주고 세간 대중을 두루 이롭게 할 생각만 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출가인들은 불교가 내 덕을 보게 해야지 내가 불교 덕을 보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빈승은 자주 묻곤 했습니다.

“내가 불교 덕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불교가 내 덕을 보고 있는가?”하고 자주 스스로에게 묻곤 했습니다. 저는 음치라서 독송이나 염송이 남보다 못하고 다른 특별한 기능이나 재주도 없었기에 어쩌면 저는 그저 아주 평범한 범부승으로 오로지 부처님께 빌붙어서 연명하면서 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제가 대만에 건너온 당시 공산당은 이미 신중국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진공(塵空) 스님께서 중국대륙 보타산에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 편지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출가인은 불교가 내 덕을 보게 해야지 내가 불교 덕을 보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제 앞날의 밝은 등불을 밝혀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불교가 제 덕을 보도록 할 것입니다.

빈승이 90년 세월에서 글로 쓴 문장을 제자들이 계산해보니 2000만 글자가 넘는다고 하는데 이 글은 300여종의 책으로 출판되었고 20여종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저서가 키 높이만큼 많다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계산해본다면 출판된 서적이 키 높이를 넘을 것입니다. 저는 원고료와 인세를 받고 있는데 비록 지금 나이가 많지만 작가 인세수입 베스트 순위에 올랐고 싱가포르, 중국대륙, 말레이시아에서도 좋은 서적 10대 순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다시 빈승의 일생을 회고해 본다면 실로 아주 기묘하다고 하겠습니다. 처음 대만에 왔을 때 ‘차 꽃이 다시 필 때’라는 글을 써서 150위안의 상금을 받았는데 저는 이 돈으로 중화서국에서 출판한 ‘사해(辭海 : 대사전. 역자 주)’를 샀던 일이 기억납니다. 이 책의 첫 쪽에 저는 “이 무언(無言)의 선생님은 앞으로 저와 더불어 날고 펼쳐나갈 것입니다. 마치 ‘사해’라는 말처럼 저의 생명은 바다처럼 깊고 바다처럼 넓힐 것입니다”라고 적었습니다. 60여년 전의 이 작은 원력들이 오늘날 하나하나 모두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불광산은 빈승이 창건한 도량이지만 저는 불광산에서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버스를 타고 기름을 넣더라도 모두 스스로 돈을 냈지 사중의 돈을 일원도 쓰지 않았습니다. 저의 모든 수입은 일절 공적으로 처리되어 불광산 사중에 기부됩니다. 심지어 예전에는 삼귀의 수계법회에서 신도가 공양한 홍바오(붉은 봉투) 조차도 모두 불광산 건설에 쓰도록 내놓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빈승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또한 역시 빈승의 성격이었던 같습니다.

불광산의 제자들도 외부로부터 홍바오를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은 우리의 인원이 많아서 신도들이 그 많은 사람들에게 모두 공양 올리기에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단지 주지 스님 한 사람만 받도록 하고 일정 부분을 대중과 같이 나눠주어 격려금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광산의 모든 빈승들과 저는 외부적으로 홍바오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새해 설날에는 신도들이 홍바오를 여러 개 준비해서 사람들에게 주기도 하는데 모두들 사중에 내놓아 함께 모았다가 대중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있으니 불광산 재무제도는 ‘이화동균’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이러한 돈을 남겨두었다가 모두의 옷가지와 견학, 의료 등등의 비용으로 쓰기도 하면서 사중의 부담이 늘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근래 몇 년 사이 저는 ‘일필자’를 붓글씨로 쓰면서 불광산에 많은 정재를 늘려주게 되었습니다. 소임을 맡고 있는 제자의 말에 의하면 중국본토에서 저의 글씨가 한 개인에게 소장되는 것이 아니고 산동 빈저우, 지난과 베이징, 하이난 등 여러 도시의 여러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글씨 전부를 어느 한 곳에서 전부 도맡아 버린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이런 사람들이 다시금 일필자 서예전시관이나 일필자 예술관을 지어 전시하여 민중들이 무료로 참관하도록 신심을 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많은 수입을 중국본토에서 문화교육공익기금회를 만드는데 전부 내어 놓았습니다. 이전에 저는 대만에서도 공익신탁교육기금을 세웠습니다.

그때는 2008년으로, 빈승이 20세부터 중생을 위해 봉사를 시작하여 효율적으로 일하고자 노력하면서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도 없고 연가도 없이 스스로 하루에 다섯 사람이 하는 일을 하였으니 ‘인생 삼백 살’이란 이념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 당시 80살이었으니 60년을 줄곧 그렇게 일해 왔고 하루를 닷새로 계산하면 5를 곱해야 하니 60세는 300세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인생에서 매우 만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나이가 80이 되다보니 ‘생로병사’의 많은 문제에 부딪치게 될 것이고 제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성운이라는 스님이 모아놓은 돈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네 하고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물으니 빈승에게 2000~3000만 위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이렇게 많이 있을까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회계사를 하고 있는 각배 스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이 돈을 대만은행에 넣고 사회에 교육과 문화를 장려하는 용도의 공익신탁기금으로 전부 기부하도록 하였습니다. 현재는 제자 각원 스님이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고 입실 재가제자인 오숙화가 부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사회를 위해 조금의 기여를 하고자 함께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필자는 저의 글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저의 마음을 봅니다. 빈승은 글씨 쓰는 연습을 한 적이 없어서 글씨도 잘 쓰지 못합니다. ‘일필자’를 말하자면, 40여년간 앓은 당뇨병으로 인해서 10여년 전부터 눈이 점점 잘 안보이고 손도 떨리게 되었습니다. 늙고 병든 몸으로 책도 볼 수 없고 신문도 볼 수 없고 TV조차도 볼 수 없으니 무엇을 하면 좋을까 하다가 갑자기 제가 붓글씨는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볼 수 없기 때문에 붓에 먹물을 묻히면 한 번에 다 이어서 써야만 했습니다. 만약 한 번에 다 쓰지 못하면 두 번째 글씨를 어떻게 이어서 써야 할지 몰랐기에 ‘일필자(一筆字)’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삐뚤빼뚤하게 썼었는데 글씨연습을 하지 못했던 저도 부처님의 가피와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글씨를 점차 쓰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다들 글씨가 늘었다고 말해주니 저도 글씨를 쓰는 일에 신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나이가 70~80세인데 초등학생처럼 이렇게 글씨연습을 한다면서 스스로 웃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주 사람들에게 글씨를 보지 말고 저의 마음을 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주 글씨를 쓰다 보니 생각지도 않은 성적이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제가 쓴 일필자 글씨를 전부 공익기금위원회에 주어 관리하게 하고 공익기금을 지지하는 사람에게 한 장씩 주어서 감사의 뜻을 전달하도록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면, 저는 저 자신을 마치 암탉에 비유하였는데 암탉은 자신이 낳은 달걀을 사람이 가져가면 ‘꼬꼬댁 꼬꼬댁…’하고 웁니다. 그것은 ‘내 달걀은? 내 달걀은?’이라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일필자의 수입이 수억 위안이 넘는다고 하는데 지금껏 저는 이 돈이 어디에 있는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래부터 빈승은 그것이 내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저는 단지 인간 세상에 기쁨을 주고 세간 대중들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한 방울의 먹물도 금전이고 생명입니다. 현재 각계의 호응을 받으면서 글씨도 점차 더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국내와 국외 여러 곳에서 빈승에게 일필자 전시회를 열어달라는 부탁이 끊이지 않습니다. 호의를 가진 수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자 어떤 날은 하루에 100~200장을 쓰기도 하였는데 수량이 많고 나이도 있어서 심지어 제자들은 쓰지 말라고 하기도 합니다. 저는 괜찮다고 쓰지 않으면 무료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봄누에는 생명이 다하도록 실을 뱉어 낼 것이고 촛불은 타서 재가 되어야 촛농이 마른다(春蠶到死絲方盡 蠟炬成灰淚始乾)”고 하듯이 생명이란 이렇듯 역량을 발휘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글씨를 쓸 때면 저는 쏟아놓은 먹물을 다 쓰도록 해서 낭비하지 말라고 먹물을 묻혀 주는 제자에게 이르곤 합니다. 한 방울의 먹물도 금전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이 기금으로 수많은 사회공익활동을 거행하면서 문화와 교육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천하원견(天下遠見 : 대만의 유명한 출판 및 잡지 사업체. 역자 주)’ 사업팀 창설자인 고희균 교수가 담당하고 있는 ‘진선미 전파 공헌장’은 이미 6회가 넘었는데 매년 20~30억원의 상금을 쓰고 있습니다. 중앙대학교 문학대학 학장 이서등(李瑞騰) 교수는 ‘전 세계 중국어 문학상’을 맡고 있으며 불광대학교 양조상 총장이 맡은 ‘삼호학원장(三好學園獎)’에는 대략 일 년에 들어가는 상금 역시 수십억원이 됩니다. 현재는 ‘삼호운동(三好運動 : 좋은 말하기, 좋은 일하기, 좋은 마음 갖기를 펼치는 운동. 역자 주)’이 신속하게 펼쳐질 수 있도록 일간지 인간복보 사장 김촉경(金蜀卿) 여사가 맡아 여러 학교와 협조하여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신문이 학교 교정에서 읽히도록 하고 있습니다. 6~7년 이래로 타이베이 공무원 인력개발센터에서 거행되고 있는 이 시상식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는데 설사 자신이 수상하지 못했더라도 수상자를 축하해주면서 모두가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사회가 안정되고 즐거워지는 보기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외에도 장학금과 문화교육 찬조금 등등으로 한 해에 10억원 정도가 들어가는데 이 또한 누구한테 청구서를 내밀 것이며 누구한테 생색을 내겠습니까?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81호 / 2017년 3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