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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50년 불교 50년 (39)-신도운동사 ②

기자명 이학종
  • 동정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중앙종무원, 재가단체-불교혁신 수위 놓고 갈등

재가 '교도제' 도입으로…승단내 대처승 배제 촉구
'49년 이교도 '학송사' 탈취 사건 교계 단체 연대 대응도


1946년은 해방의 흥분이 많이 가라앉은 해였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휩쓸리는 일 보다는 불교계 내부의 정리에 승속이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교계 각 단체들은 저마다 불교혁신을 내세우며 창립의 기치를 내세웠다.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으로 야기된 불교계의 식민지적 관행을 극복하기 위한 백가쟁명식의 목소리가 단체의 명령이나 창립취지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분출됐다.

이 해 4월 중순경 백석기, 김해진, 유성갑, 이부열 등이 주동이 돼 `중앙불교청년당'(이 조직은 불교청년당의 서울중앙조직으로 추정되며, 교단내의 혁신에많은 의견을 개진했던 것으로 보인다)을 결성하고 불교유신안을 제시했다. 이들은 교도제 실시 등을 주장했는데 이후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같은 달인 4월 25일에는 교단개혁, 조국광복, 사회혁명을 강령으로 내세운 `혁명불교동맹'이 서울 남산정 동본원사에서 창립됐다. 혁명불교동맹은 △승니와 교도의 구별 △사원의 일반 개방 △사찰토지 국가사업체 제공 △불건전한 교당 숙청 △승려는 생업에 근로할 것 △석가불을 본존불로 할 것 △종내의 의식을 폐하고 간소엄숙한 새 의식을 실시할 것 등을 당면 주장으로 내세웠다. 5월 28일에는동국대생을 중심으로 한 불교청년단체인 조선불교학생동맹이 동국대 전문부 강당에서 결성대회를 갖고 출범했다. 이 단체의 성격은 다음의 창립의 변에서 읽어볼수 있다. "조국은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잔재가 남아 민주독립이 되지 못하고 있다. 종교계에도 마찬가지로 목불인견의 양상이 극에 달했다. 이에 우리 젊은 청년학생은 일어서고야 말았다. " 조선불교학생동맹은 이처럼 진보적 색채를 가진혁신단체였다. 조선불교학생동맹의 위원장은 이외윤(李外潤), 부위원장은 김지복(金知福), 총무부장은 김상연(金相演)이 맡았다. 이 단체는 청년학생단체답게 동휴 즉 겨울방학을 맞아 전국에 강대(講隊)를 파견, 불교를 포교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1946년 또 불교포교사의 한 획을 그을 만한 `라디오 불교방송'이 실시된 해이기도 하다. 1월경 실시된 라디오 불교방송은 매주 수요일에 실시되었는데 그 목적은 "해방후 갈팡질팡하는 대중의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해는또 조선불교 중앙총무국에서 교계의 연락과 정보전달을 신속히 하기 위하여 기관지 성격의 `교계통신'을 발행한 해이기도 하다.

이후 1947년에는 조선불교거사림회(7월 13일)가 정우홍, 김봉민, 김한철, 김관호, 황봉 등을 중심으로 결성됐고, 국제문화 친선도모를 목적으로 한 불교예술동맹(7월 30일)이 출범됐다. 이 해 말인 12월 26일에는 젊은 비구승들인 청담, 자운, 성철, 월산, 혜암, 성수, 법전 스님 등이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답게살자'며 결사를 하기도 했다. 이 결사는 교단 집행부나 대외를 향해 이렇다 할표면적인 요구를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그 배경에는 왜색불교의 일소 및 한국정통불교의 회복이라는 정신이 깔려 있었다.

1948년에는 `불교학도의 참된 불타정신을 체득하여 혁명계승의 중책을 다하여민족문화 향상에 진력하여 세계문화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원대한 취지를 가진`조선불교학생회'(위원장 김명수, 부위원장 변갑수)가 창립됐다.

해방을 기점으로 생긴 단체들은 이밖에도 불교여성총연(동)맹 등이 있었다. 불교여성총연(동)맹은 활동상에 대해 전하는 자료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이해 말에 결성된 불교혁신총연맹에 가입한 것을 볼 때 혁신적 단체로 볼 수 있다. 김광식의 논문 `8·15해방과 불교계의 동향'은 불교여성동맹에 대해 `정당사회단체등록철'(1950. 서울시민위원회 발행)을 인용해 선언, 강령, 규약의 일부를 다음과같이 밝히고 있다.

"중생제도의 책임을 가진 우리 교단은 이조박해와 왜정의 유린으로 여지없이쇠잔되었으며 여기에 일대 혁신의 필요를 통감할 뿐 아니라 시대의 요청이 또한 우리 여성으로 하여금 규중염불(閨中念佛)만 허락치 않는도다. 이에 우리는 영산회상의 유촉을 다시 상기하고 숙세선근의 본서원을 더욱 분발하여 불교여성총연(동)맹을 결성하노라."-선언문 중에서-

불교여성총동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불타의 홍원에 의하야 대중불교를 건설함.
△우리는 불타의 자비에 의하야 사회사업을 진흥함.
△우리는 불타의 화합주의에 의하야 민족단결을 촉진함.
△우리는 불타의 평등주의에 의하야 남녀동권을 확립함.

당시 교단을 운영하던 새 집행부는 불교계 내외의 여러 여론을 수렴하면서 교단을 운영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교단과 불교단체, 특히 혁신적 성격을 가진 재가단체간에는 불교계의 혁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갈등이 야기되고 있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교단의점진적 개선과 불교혁신단체의 본질적·급진적 혁신의 대립에서 오는 불가피한마찰이었다(이상 김광식의 최근 논문 `8·15해방과 불교계의 동향' 참조)

교단과 불교혁신의 노선을 놓고 교단과 갈등관계에 있던 재가신행혁신단체들은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선학원의 전신), 재남이북승려회(1946년 10월경발족하여1947년 12월 서북불교협회로 명칭 변경, 주요인물은 회장 김청암 부회장 박하담서무 조동호 교무 장원규 재무 안홍덕 사업 김용해 선전 김영서 등) 등 일부 혁신적 승려단체들과 함께 11월 30일 마침내 `불교혁신총동(연)맹'을 결성하고 교단에 대해 불교혁신의 고삐를 죄는 공동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때 참여한재가단체는 불교청년당, 혁신불교(도)동맹, 불교여성총연(동)맹, 불교혁신회, 선우부인회(선학원 산하단체로 1931년 3월 출범) 등 5개 단체였다. 당시 12월 6일자 조선일보는 "12월 2일(창립일에서3일의 오차가 남) 남녀 7개 불교단체는 △대중불교 실현 △민족통일 완수 △균등사회건설 등의 강령 아래 불교혁신총연맹을건설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혁신단체와 교단 집행부의 갈등은 일본불교 잔재를 씻어내는 불교혁신의 추진강도의 차이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혁신단체들은 해방과 함께 종무를 인수했던 교단 집행부 조차 일제하 일제불교에 기생했던 부류로 이해하고 있었던것이다.

특히 혁신단체들이 일관되게 공통적으로 내세웠던 `교도제(敎徒制)'의 실시주장은 혁신대안 중에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독신승려와 대처승려를 구분해 대처승려를 교단에서 개별화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출가 수행하는승니는 교적에 편입시킴과 동시에 특별수행도량에 상주 수행케 하여 일반교도의궤범사(軌範師)로 추앙하고, 일반 재가교도(대처)는 대중교도에 편입시켜 각각직장을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자는 게 교도제의 뼈대였다. 이는 대처승려들이 사찰을 배경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근본적으로 배제하겠다는 결과를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불교계로서는 혁명적인 내용이었다. 대처승려들도 함께 참여했던 당시교단 집행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없는 입장이었고, 이 문제는 재가 혁신단체와 중앙총무원과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했다. 이 문제는 결국 50년대 정화운동의 시발이 되는 불씨로 볼 수 있으며, 나아가 비구승쪽의 지원을 목적으로 조직을 시작한 조계종 전국신도회를 태동시키는 직접적인 연원점이 되는 것이다.

1949년은 불교운동사나 포교사, 신도사에서 매우 눈여겨 보아야 하는 의미 있는 불사가 많이 이뤄진 한해였다.

1949년의 교계현황은 전국불교도총연맹, 불교청년당, 불교여성총동(연)맹, 중앙선리참구원, 불교연구회, 전법회, 혁명불교도동맹, 호국역경원, 조선불교학생회, 불교예술총연맹, 화광교원(和光敎園) 등이 교단의 백년대계를 우려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이들 단체들은 이해 6월 18일 일어났던 이교도의 시내 학송사(鶴松寺·불교여성총동맹의 회관이 소재해 있던 사찰) 탈취행위에분개해 공동대응에 나섰다. 이것은 이교도의 훼불에 대해교계단체들이 연대해 대응을 시작한 최초의 일이다.

1949년에는 교육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교육사업으로 불타의 근본 가르침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 해의 교육사업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교구-광동(光東)중학교, 영화(永華)학원, 국화(國華)유치원△충북교구-
속리(俗離)공민학교
△충남교구-보문(普門)중학교, 공주 능인(能仁)학원, 강경(江景)중앙유치원
△경남교구-해동(海東)중학교, 금정(金井)중학교, 보광(普光)중학교, 명성(明
星)중등공민학교, 신산(新山)공민학교, 동화가정여학원(東華家庭女學院),대실(大
悉)유치원, 동국(東國)유치원, 화광(和光)유치원, 마산(馬山)유치원, 진주(‥州)
유치원, 성광(性光)유치원, 동래(東覲)유치원
△경북교구-능인(能仁)중학교, 대원(大園)고등공민학교, 동국(東國)공민학교,
의성(義城)유치원, 달성(達成)유치원△강원교구-행장(行莊)학원
△전북교구-금산(金山)중학교, 금산(金山)공민학교, 대원(大願)공민학교, 금산
(錦山)공민학교
△전남교구-정광(淨光)중학교, 정혜원(淨慧院)

불교언론 기관들도 이 해에 들어 매우 활기를 띤 것으로 보인다. 당시 언론은이른바 `5백여만 신도와 7천여 승려의 입이 되고 귀가 되어 전법도생의 이검(利劍)이 된다'는 기치 아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않은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인 언론지는 경기교구가 발행한 <불교신보사(佛敎新報社)〉 와 경남교구가 발행한 <동방불교(東方佛敎)〉, 조선불교학생회의 기관지 <녹원(鹿苑)〉, 중앙총무원의 기관지 <불교공보(佛敎公報)〉등이었다. 이 중 경기교구의불교신보는교도와 일반사회의 기대 아래 일간신문으로서의 발족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불교종단의 최초 기관지는 현 불교신문의 전신인<대한불교〉가 아닌<불교공보〉였음을 알 수 있다.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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