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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내가 불교 덕을 보는가-하

“빈승의 평생은 ‘불교를 위해서’였고 다른 건 없었습니다”

▲ 불광산 성운대사와 불자들이 “불교가 나의 덕을 보게 하자”는 발원을 하며 행진하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태어날 때 갖고 온 것이 없고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죽어서 갖고 가지도 못합니다. 제 자신이 무엇을 했다고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며 오직 불교신앙을 위해 걸림없이 살아왔고 금생의 세월을 살고자 발원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다보니 실로 부끄러운 마음 가득합니다."

대만에 있는 공익신탁교육기금회의 기금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고 거기에 더해 수십명의 신도가 빈승의 뜻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탁발 행각을 실천하여 모은 공익기금을 더해 이미 500억원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기금은 저 개인이 사용할 수 없으며 필히 공익적인 용도로만 써야 하는데 위원회의 결의를 거친 뒤 은행과 직접 연결해 당사자에게 성금을 보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인데 도대체 누가 저의 사장이고 누가 저의 상사가 되는 것일까요? 공익신탁기금 구좌로 돈을 송금하는 신도들에게 은행에서 영수증을 직접 보내주고 있으니 돈이 저를 통해서 갈 까닭이 없으며 내역 또한 전혀 알지 못하니 제가 누구에게 참견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또 누구에게 그러한 내역을 조목조목 따질 수 있겠습니까?

빈승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편리함을 주기 위해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종교재산에 관한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도대체 누가 군자이고 누가 소인배입니까? 누가 부처님 마음이고 누가 마귀일까요? 당신도 모르고 저들도 모르고 심지어 정부에서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께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불보살님이 알고 계시고 인과가 일체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전생에 뿌린 씨앗을 알고 싶다면 금생의 결실로 알 수 있고 미래의 결과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짓는 것을 보아라(欲知前世因 今生受者是 欲知未來果 今生作者是)”라는 가르침처럼, 옛 성현들께서는 이미 진리를 일러주셨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각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문화와 교육 뿐만 아니라 양로와 보육 등도 빈승을 의지하고 있으니 빈승은 더욱 발심하여야 합니다. 빈승은 사찰을 지어 승가를 안돈시키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하고 불교를 널리 펼쳐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빈승은 불광산의 모든 불광인들이 “사람들에게 신심을 나누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준다(給人信心 給人歡喜 給人希望 給人方便)”라는 업무지침을 정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나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에게 대신하게 하고 기댈 수 있겠습니까?

불타기념관에는 ‘1000개의 사찰과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공덕 명단’이 비바람을 막아주는 회랑의 벽에 새겨져 있고 불광대학교에는 ‘100만명 학교설립위원 기념벽’이 수 킬로가 넘으며 일간지 ‘인간복보’에는 매월 신문 한 면에 동참 공덕자 명단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이 많은 공덕주들에게 저 자신이 보답하지 않으면 어느 누가 보답하기를 바라야 합니까? 수십 년 동안 우리 불광산은 공덕주들의 발심에 항상 감사해 왔으며 공덕주들은 불광산의 이에 대한 감사 표시를 보았으나 혹여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것을 보셨는지요? 우리는 좋은 뜻을 가진 분들의 공덕을 세상에 남기고 우리들 스스로의 마음자리에도 새겼습니다. 빈승은 바로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송매체에 종사하는 남성, 여성들께서는 혹시 보지 못했더라도 듣기라도 했을 것 아닐까요?

빈승에게는 이러한 성격이 있습니다. 일체의 불교 사업을 펼치면서 대학교도 그렇고, 중고등학교도 그렇고, 이동도서관도 그렇고, 의료자선활동도 그렇고, 신문방송잡지도 그렇고, 사찰불사로 승가를 안돈시키는 것도 그렇고 그 어느 하나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신도에게 화주를 당부한 적이 없습니다. 빈승의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부어 본보기를 보였습니다. “불교가 나를 의지하도록 하겠다”는 일념으로 끊임없이 실천하고 정진하였기에 제가 발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남에게 발심하라고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많은 대학교를 설립하면서 재단이사에 조녕(趙寧) 박사, 조려운(趙麗雲), 홍동계(洪冬桂), 정석암(鄭石岩), 진순장(陳順章) 거사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빈승은 모든 이사들에게 대학 설립을 위해 한 푼도 내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주주를 찾는 것도 아니고 투자를 결집하는 것도 아니기에 마치 사업으로 이익을 바라는 것과 같이 이사를 맡았는데 돈까지 그 사람들에게 내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개인의 모든 것을 다 쏟아서 대학교를 세웠고 불광산에게도 가능한 저금하지 말고 사회공익 사업에 돈을 내놓으라고 해 불광산의 살림을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부족해야만 수행을 열심히 한다는 평범한 가르침을 알게 하고 그럼으로써 항상 노력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며 분발하여 발전하려고 합니다. 물론 불광산 역시 가진 것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사회를 향해 한 사람이 매월 대만 돈 100원을 삼년간 내는 ‘100만명 동참 대학짓기운동’을 펼쳤습니다. 저는 이 많은 동참자들에게 그들의 인생이 결코 만만하지 않지만 대학교 설립에 그들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 역시 교육사업에 대한 사회의 인식변화를 바라는 빈승의 원력이었습니다. 현재 이들 100만명 동참 인사의 수많은 이름 하나하나를 불광대학 교정에 있는 벽에 새겨 모두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불광산 개산 50년 이래로 저는 정부에 전등 한개 요구하거나 화장실 한 칸 지어달라거나 돈 한푼 보태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1994년 며칠간의 폭우로 대만에 ‘812수재’가 나고 남부 가오슝은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등휘 총통이 남쪽지방을 순찰하러 내려와서는 불광산과 자제공덕회를 찾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정부 지도자조차 이렇게 불광산을 중시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저희들도 자부심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나’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일부 신도들이 따르고 발심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불교가 나를 의지하도록 하겠다”는 신념으로 대학교도 세웠고 중고등학교도 세웠고 초등학교도 세웠으며 심지어는 TV, 신문사도 세웠습니다.

빈승은 세계 곳곳에 있는 사찰의 경우에도 사찰 건립을 위해 먼저 자금을 모아 토지를 구매하였고 토지를 구매한 이후에서야 신도들에게 불사에 동참하는 발심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저 자신이 먼저 본보기를 보이지 않고 “불교가 나를 의지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남들이 어떻게 불광산의 수많은 사업에 함께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빈승의 평생은 ‘불교를 위해서’였고 그 외에 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 갖고 온 것이 없고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죽어서 갖고 가지도 못합니다. 또 제 자신이 무엇을 했다고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며 오직 불교신앙을 위해 걸림없이 살아왔고 금생의 세월을 살고자 발원합니다. 지금 마치 고백하는 것처럼 솔직하게 말하다보니 실로 부끄러운 마음만 가득합니다. 단지 인간불교의 발전과정을 정확히 구술하여 글로 남겨 훗날 있는 그대로 참고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앞으로의 세월은 빈승도 인연의 변화를 따를 뿐입니다.

다행히도 당초 빈승의 “불교가 나를 의지하도록 하겠다”라는 신념은 현재 세계 여러 곳의 젊은 스님들과 불광청년들이 함께 이어받아 널리 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샤알람스타디움에서 거행한 전법대회에 참석한 8만명을 향해 2000명의 청년들이 “불교가 나를 의지하도록 하겠다”는 노래를 소리 높여 불렀는데 맑고 우렁찬 노랫소리에 사람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청년들에게 ‘보살의 마음과 청년의 힘’이 있으니 빈승이 달리 탄식할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물론 빈승도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 사천의 한 지역 모임에 승속 이부대중이 강연을 듣고자 모였습니다. 사천 대지진의 인연으로 저는 대중들에게 우리는 ‘불교를 위해서’ ‘불교가 내 덕을 보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재가불자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부 출가인들이 망연하다는 듯이 ‘왜 불교를 위해야 하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이미 출가를 하였으면서도 불교를 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빈승이 어찌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광산에도 뜻을 잃은 제자가 일부 있습니다. 그들은 “불교를 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자신 스스로도 복덕 인연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설사 천상의 천인이라고 하더라도 의상이 더러워지고 머리에 꽂힌 꽃이 시들고 몸에서 냄새가 나고 겨드랑이에서는 땀이 나면서 그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다섯 가지 쇠락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지금의 스님과 젊은 승가들에게 불교의 미래와 희망을 어떻게 보여줄 것입니까? 도대체 불교가 내 덕을 보게 할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불교 덕을 볼 겁니까?

불교를 위해 우리는 적극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불교를 위해서는 몸과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빈승에게는 “불교를 위해 지옥에 떨어지라고 하더라도 저는 기꺼이 원해서 하겠습니다”라는 원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불교를 신앙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앞으로의 불교는 우리 승속 이부대중의 덕을 볼 수 있게 되도록 함께 발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불교를 위해서라면 어려움과 괴로움은 무시하고 개인 이익은 안중에 두지 말고 개인의 편안함은 상관하지 않아야 하며 불교의 앞날을 쟁취하고 불교의 영예를 쟁취해야 합니다. “불교가 ‘나’를 의지하도록 하지 않았어”라는 가르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82호 / 2017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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