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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부정이 긍정으로 전환되는 숲

기자명 김용규

칡은 왜 그렇게 누군가를 괴롭히며 살아갈까

숲과 관련한 말 중에 ‘폭목(暴木, wolf tree)’과 ‘불량목(不良木, weed tree)’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모두 산림경영 분야에서 쓰는 전문용어입니다. 쉽게 말해 ‘폭목’은 폭력배 같은 나무라는 것이고, ‘불량목’은 지질맞은 나무라는 것입니다. ‘숲 가꾸기’를 할 때 모두 숲에서 제거하거나 정리해야 할 나무들로 분류하기 위한 용어인 것이지요. 

다른 생명에 대한 폭력 행사
상생의 숲 원리와 크게 상반
긴 숲 역사에서 칡은 일시적
광포함 이긴 생명들 새 터전

생명적 가치와 인문적 시선으로 숲을 바라보는 나는 이런 용어가 마뜩치 않습니다. 생명 중에 제거되어야 할 생명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칡덩굴’에 대해서만은 나 역시 이런 생각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칡은 왜 저렇게 무참한 모습으로 살까?’

알다시피 ‘칡’은 꼬투리 열매를 만드는 콩과식물입니다. 딸기가 줄기를 뻗어 닿은 새로운 땅에 새 뿌리를 만들어 동일체를 복제하는 방식과 똑같이 ‘칡’도 기는 줄기를 활용, 빠르게 번식할 줄 압니다.

‘칡’은 질긴 덩굴성 줄기와 커다란 잎으로 빛이 드는 공간을 빠르게 점령하는 생장의 기술이 있습니다. 그렇게 확보한 광합성의 산물로 녹말이 풍부한 커다란 덩이뿌리를 만들어냅니다. 그러기 위해 사방을 횡으로 뻗어나가며 지표면을 빠른 시간에 점령하는가 하면, 영토를 확장해 가다가 만나는 풀이나 나무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뒤덮고 휘감으며 그 대상을 점령합니다. ‘칡’이 휘감고 오른 나무나 풀들은 ‘칡’의 넓은 잎에 가려 차츰 광합성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고 질긴 덩굴 줄기에 휘감겨 마치 목이 졸리듯 압박을 받다가 끝내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칡에 관한 나의 의문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칡은 왜 누군가를 괴롭히며 살아갈까? 경쟁하고 또한 협력하며 상생의 생태계를 유지해 가는 원리가 지배하는 숲 생태계의 질서 속에 다른 생명에 대한 직접적 폭력에 가까운 생태를 가진 저런 생명이 배치되어 있는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론 ‘새삼덩굴’이나 ‘야고’같은 기생식물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착취하고 수탈해 살아가는 생명 말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 지면에서 다뤘듯 그런 기생식물은 숲에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합니다. 끝내 자기의 기반마저 잃어 결국 제대로 번성하지 못하는 결과로 귀결되지요. 하지만 ‘칡’은 다릅니다. 상층부가 열린 공간에서 칡은 무서운 속도로 제 영역을 넓혀나갑니다. 그 확장의 영역에 놓여있는 나무들은 순식간에 칡덩굴에 휘감겨 끝내 느닷없이 삶을 마감하고 맙니다. 오랫동안 나는 이런 칡의 생태를 부정의 생태계 현상으로 보아 왔습니다.

‘타자를 직접 억압하며 자신을 이루어내는 저 특이한 부정적 현상이 왜 숲의 생태계 내에 버젓이 오랫동안 존재하고 지속해 오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것은 그저 ‘칡’이라는 한 식물을 향한 의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사람의 세계를 향한 의문이기도 했습니다. 알다시피 인류의 역사는 오랫동안 그런 모습을 반복해 왔습니다. 한 줌도 안 되는 힘이 천부로부터 자유한 다수의 누군가를 강제로 억압하고 수탈함으로써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추구하고 구축해 온 길고 절망스러운 인간의 역사 말입니다. 귀족이 노예를, 영주가 농노를, 제국이 식민을, 자본이 노동을…. 나는 청춘의 시간 내내 도무지 이 무도한 부정을 긍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래 걸렸지만 저 ‘칡’의 무도함을 붙들고 사유하다가 마침내 (칡의) 부정성을 긍정하게 되었습니다. 이해의 전제는 그러려면 숲을 긴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숲의 긴 역사에서 ‘칡’은 일시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선 ‘칡’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칡은 어떤 이유로 숲에 틈새가 생기면 그 빛 좋은 자리를 파고들도록 생겨먹은 생명에 불과합니다. 다만 광범하게 뻗어나가고 기어오르는 덩굴성 줄기를 주특기로 삼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절개지나 버려진 숲 근처의 밭 같은 곳을 무서운 속도로 장악해 한동안 그 자리를 차지하지만 칡은 차지했던 자리를 결국 다른 생명들에게 내주고 마는 생명이 됩니다. 오히려 ‘칡’의 광포함을 겪은 공간은 그 광포함의 틈새를 이기고 살아남는 다음 식물들에게 더없이 훌륭한 기반이 됩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82호 / 2017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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