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계종 고시위원장 지안 스님

“나와 이웃이 둘이 아님을 알면 행복해질 수 있어요”

▲ 지안 스님은 “불교의 본래 정신은 구세에 있다”며 “도덕과 정의가 상실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불교가 사회의식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은 바라밀선원이 이전해 새롭게 개원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절을 세우는 이유는 홍법도생(弘法度生)하기 위함입니다. 홍법도생이란 부처님 법을 널리 펼쳐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전법도생이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결국 법당을 여는 것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중생고통 덜어주는 것

탐진치 극복하면 열반
본래마음 찾는게 수행

한국불교도 변화 필요
과거 의존서 벗어나야

옛날에 절은 그 지역의 비보(裨補)로 불렀다고 합니다. 고려 때 태조 왕건이 스승처럼 모셨던 도선국사는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절을 짓도록 했답니다. 당신이 직접 창건한 절도 여러 곳이 있었는데 그 사찰을 비보사찰이라고 합니다. 이는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깊은데,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좋은 터를 찾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몸에 혈맥이 있는 것처럼 땅에도 지맥이 있는데 지맥이 잘 통하는 곳은 명당이고, 그렇지 않은 곳은 터가 좋지 않다고 했답니다. 이렇게 지맥이 좋지 않은 곳에 절을 지으면 그 인근 지역의 기운이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었답니다. 스님들이 절에서 매일 기도하고 중생들을 위해 축원을 올리니 그 지역의 기운이 좋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요. 오늘 바라밀선원 신축개원 법회를 봉행하는 인연으로 이 지역이 나날이 발전하고 불자님들의 마음이 늘 편안하고 상서로운 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중생제도입니다. 제도한다는 것은 중생이 괴로운 생활을 멈추고, 편안하고 즐거운 삶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의미입니다. 병든 환자를 치유해 낫게 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는 것처럼 중생들이 모든 번뇌를 극복해서 세상의 근본과 이치를 깨치도록 돕는 것이 불교의 목적인 것입니다.

불교는 중생의 마음을 빛으로 설명합니다. 본래 우리 마음의 빛은 태양보다 더 밝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가 구름에 가리면 어두워지는 것처럼 중생들의 마음도 번뇌망상에 가려 본래의 밝은 빛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을 ‘무명중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밝음과 어둠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탐진치 삼독에 빠지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에 끌려 다니면 마음이 어두워지게 되고, 그것을 극복하면 밝아지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어떤 사람이 “당신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진리가 무엇이냐는 뜻이지요. 그러자 부처님은 “열반에 들어가는 게 불교의 목적”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럼 열반은 무엇이냐”고 재차 물으니 부처님은  “탐진치 삼독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일상을 살아가면서 욕심과 성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마음을 닦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럼 우리가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할 때 그 마음은 또 무엇일까요?

불교에서 마음은 지(知)·정(情)·의(意)로 구분합니다. ‘지’는 안다는 것인데, 우리가 눈으로 사물을 구별해서 ‘무엇이다’라고 압니다. 그 때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무엇일까요? 눈이 아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눈이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냄새 맡고, 맛보고, 들어서 아는 것도 다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는 마음이 바로 ‘지’인 것입니다.

'정'은 감정입니다. ‘즐겁다’ ‘슬프다’하고 느낀 그 감정도 바로 마음이 느끼는 것입니다. '의'는 의지로 그것도 역시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렇게 지·정·의를 알고 마음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바로 마음 닦음인 것입니다.

불교 교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지를 닦는 것은 혜학(慧學)이고, 정은 정학(定學), 의는 계학(戒學)이라고 합니다.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가장 구체적인 수행방법입니다. 마음의 밝은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감정을 순화하고, 악업을 짓지 않고 선행을 쌓게 된다면 비로소 삶의 참 가치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닦으면 마음은 밝은 상태가 되고, 그러면 지혜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믿으면 우리의 삶은 윤리 도덕적인 의식이 자연스럽게 높아지게 됩니다. 또 마음이 항상 안정되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라밀선원이 신축되고 법당이 넓어지고 문화공간도 많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불자들이 할 일은 이곳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 수행을 하는 것은 모두 마음을 순수하고 청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를 할 때도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나로 인해 남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할 수 있기를 함께 발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대승불교의 기본 정신입니다.

오래 전에 열반하신 성철 스님께서는 종정으로 계실 때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라는 포스터를 만들어 전국 사찰에 배포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뿐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는 결코 혼자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로 연관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이치를 안다면 결코 나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나만의 기쁨만을 좇을 수 없습니다. 나와 이웃이 둘이 아니라는 그 마음으로 모두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그런 원력을 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살행인 것입니다. 보살의 마음을 갖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모두가 함께 노력해 나간다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세상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향도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종교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합니다. 한국불교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미래지향적으로 의식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과거에만 의존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골동품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현 시대에 있어서는 실용적인 물건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지나치게 과거 의존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통종교’라는 골동품의 가치만 내세울 뿐 현실을 보는 안목이 매우 좁습니다.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정확히 볼 줄 알아야 치료를 할 수 있듯,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이 열려야 교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불교의 가치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지식의 수준은 하루하루 다르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지혜는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사회정의가 크게 퇴보하고 있습니다. 비상식적인 일들이 비일비재하고, 자신의 욕심만 내세우고 있습니다. 마음의 지혜를 닦지 않고 세속적 가치만을 추구해온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불교는 이런 시대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면 더 이상 불교의 미래는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사회구성원 모두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불교는 탐진치 삼독을 버리고 계정혜 삼학을 닦음으로서 궁극적인 행복을 찾는 종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은 어떤 학문을 익히는 것보다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계정혜를 익히면 마음이 항상 평화로워지고, 남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불교는 향후 사회변화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특히 불교의 윤리와 평화의 가치가 널리 퍼진다면 우리 사회는 크게 진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 인도는 카스트제도라는 엄격한 신분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런 계급제도를 부정하고 모든 중생의 평등함을 강조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대대적인 의식개혁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비합리적인 사상과 제도의 틀을 과감히 깨고 중생들에게 새로운 의식을 불어넣은 것입니다.

불교의 본래 정신은 구세(救世)이고, 항상 정의로움을 추구합니다. 오늘날까지 불교가 이어져 올 수 있는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불교의 사상은 사회의식을 개혁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나와 남을 정의로운 마음으로 결속시키고, 그래서 지역사회와 나라의 안녕을 이끌고 구성원 모두의 도덕성과 정의의식을 고취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 불교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불자들부터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부터 불교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교 신앙은 귀의와 찬탄, 참회, 발원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늘 부처님 가르침을 찬탄하면서, 매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잘못을 참회해야 합니다. 또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발원해 나간다면 삶은 언제나 행복해 질 것입니다. 그런 행복은 이웃에게도 미쳐 나와 이웃, 지역, 나라가 모두 평안하고 웃음이 넘쳐 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늘 염원하는 불국정토 건설도 머지않아 이뤄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내용은 지난 2월25일 경남 김해 바라밀선원에서 열린 ‘신축 이전개원법회’에서 조계종 고시위원장 지안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383호 / 2017년 3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