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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은혜와 원한, 정과 미움-상

“무릇 비구란 밤을 넘기는 원한을 갖지 않습니다”

▲ 불광산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과 같이 수많은 인연공덕을 준 재가불자들이 많다. 성운대사의 인간불교를 평생 후원해 준 조중식(曹仲植) 선생의 98세 생신을 맞아 불광산 불자들이 생신 축하잔치를 벌이고 있다.대만 불광산 제공

“사람들의 사고방식 중 아주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원한은 기억을 해도 은혜는 기억하려 하지 않고 나쁜 것은 기억해도 좋은 것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남이 진 빚은 기억하면서 자신이 빌린 것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빈승은 세월이 지나면서 맺은 수많은 원증회고(怨憎會苦 :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괴로움)를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유언비어로 분란을 만들어 내거나 비방하고 헐뜯어 당신의 마음속 분이 풀릴 수 있다면 이 또한 그들에 대한 빈승의 조그만 기여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빈승이 할 말이 있습니다”란 글을 쓰면서 ‘저의 은혜와 원한, 정과 미움’이라는 제목의 글은 저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은혜와 원한은 있겠지만 정에 얽힌 미움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려서부터 불가에서 자란 저는 사람들이 제게 준 은혜를 알고 있기에 이에 보답하고자 하였지만 조금의 원한조차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 대해서는 저도 불만이 있었습니다.

정에 얽힌 일을 말하자면 청년시기에 일부 노부인들이 저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이 모친도 버려두었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아들이 되고자 하겠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저를 환속시켜 자신의 사위로 삼고자 하였지만 저 자신에게 달리 장점이나 학식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고 또한 어려서부터 불교에 의해 양육되었기에 저는 잘못된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세상의 감정에는 노년의 감정과 중년의 감정, 청년기의 감정이 있는데 흔히 말하는 인간적 감정이나 보살유정(菩薩有情)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빈승 77년의 출가생활에서 대중을 벗어나 홀로 지낸 적이 없고 항상 단체생활을 해왔고 개인적인 문제는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대부분 대중 속에서 공공의 규율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도 성자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인간세상의 범부로서 인간의 모든 욕망과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불법에서는 이에 대처하는 많은 지혜를 우리들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불법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도록 해주셨기에 잘못된 길을 걷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에게 큰 원한이 없고 남에게 복수하려는 생각도 갖고 있지 않은데 이는 아마도 어려서부터 따지고 들지 않는 저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전에 “비구는 밤을 넘기는 원한을 갖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고 있기에 남들이 저를 적으로 보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남들을 적으로 본적이 전혀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서 은혜와 원망에 대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빈승은 근래에 들어 청년들과 대화를 함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를 아주 중요시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라”이고 다른 하나는 “남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로서, 자신 스스로 자신의 귀인(貴人)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사고방식 중 아주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원한은 기억을 해도 은혜는 기억하려 하지 않고 나쁜 것은 기억해도 좋은 것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남이 진 빚은 기억하면서 자신이 빌린 것은 기억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은 기억하면서 남의 이익에 관련된 것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많은 중생들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남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은혜에 보답하는 부유한 인생입니다. “남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직업을 찾기가 쉽지 않은 청년들은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남이 나를 중용하지 않는 현상만을 고민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남들이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자신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을까요? 남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당신에게는 예의가 있어야만 하고 당신은 말투와 태도에 신경을 써야 하고 책임질 줄 알아야 하며 부지런해야 하고 충성심과 법규를 준수해야 합니다. 유교의 충효인의(忠孝仁義)와 불교의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조금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남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습니까? 빈승은 은혜에 보답하는 인생을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부유한 것이고 남들이 주는 것을 바라는 마음은 빈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께서 보시를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들한테 우리가 보시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 사람들이 우리한테 보시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항상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위로는 부모님의 은혜, 중생의 은혜, 나라의 은혜, 삼보의 은혜 등 “네 가지 소중한 은혜(四重恩)에 보답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부모님의 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물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제자인 의엄(依嚴) 스님은 연로하신 양어머니를 보살피면서 마음을 다해 효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생모가 살고 있었기에 생모도 찾아가보라고 하는 저에게 “저는 길러주신 어머니에게는 은혜에 감사하는 정이 있지만 저를 낳아서 남에게 주어버린 생모에게는 정이 없다보니 보살펴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낳아주신 어머니나 길러주신 어머니 모두에게 은혜가 있지만 사람 감정에는 크기의 다름이 있습니다.

빈승의 가장 큰 은인은 바로 외할머니라고 느낍니다. 외할머니께는 아들과 친손자가 많이 있었기에 외손자 한 명에게 유달리 관심을 주실 필요가 없었지만 저의 어린 시절은 외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였습니다. 외할머니는 자주 저를 데리고 외출하셨고 법당 모임에도 함께 다니셨습니다. 이른 아침 외할머니는 밭에서 기른 채소와 무를 뽑아서 시장에 내다 팔았고 집으로 돌아오실 때는 따끈한 아침 빵을 사 오셔서 저를 깨워 아침밥으로 먹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어린 시절은 친가 부모님, 형제자매와 함께 지낸 적이 별로 없었고 저는 외할머니와 서로 의지하며 지낸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습니다.

출가 이후 한 밤중 꿈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은 외할머니였습니다. 외할머니는 유왕씨(劉王氏 : 남편의 유씨 성을 앞에 붙였음, 역자 주)로, 이름조차 없었고 글을 몰랐지만 ‘아미타경’과 ‘금강경’을 외워서 독송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채식을 하였던 외할머니는 18세에 저의 외할아버지인 ‘유문조(劉文藻)’에게 시집을 와 남편을 돕고 자식을 가르쳤고 근검절약하며 가정을 돌보아 반듯한 기와집을 지었고 약간의 논과 밭을 사기도 했습니다. 성격이 부드럽고 자비한 외할머니가 솔선수범으로 저에게 주신 영향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만에서 수십 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중국대륙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머니와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연세가 많은 외할머니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더욱 걱정스러웠습니다. 저는 1989년 고향을 방문해 가족들을 만나고 나서 외할머니가 이미 여러 해 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크나큰 은혜에 보답할 방법이 없었기에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미화 2000달러를 마련하여 작은 묘탑을 지어 외할머니를 기리고자 동생인 셋째 ‘국민(國民)’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두 번째 고향 방문에서 저는 동생이 제가 부탁한대로 외할머니를 기리는 탑을 지은 것이 아니라 기념당을 지어 가운데에 자기 아내의 위패를 모셔놓고 한쪽 옆에 외할머니의 작은 위패를 세워놓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저는 당시 화를 참을 수 없어서 바로 되돌아 나왔습니다. 아직도 동생인 셋째의 이런 행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고 항상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또한 빈승의 은혜와 원망의 구분이 분명한 성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빈승이 공부하던 모교인 서하율학원에 대해 말하자면 중국 대륙과 대만 양안 개방 이후 저는 서하산을 위해 열한채의 건물과 월아지(月牙池)와 명경호(明鏡湖)와 산문까지 짓도록 기증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저의 강사 스님이셨던 설번(雪煩) 화상과 원담(圓湛) 스님의 손을 통했는데 저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이 많은 것들을 그분들께서 보답해 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빈승은 출신도량을 다시 일으켜 스승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사 스님이신 지개(志開)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저는 대륙 의흥(宜興)으로 돌아가 종찰 대각사를 다시 일으키고자 국내외 신도들의 많은 공양금을 모았는데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200억원 정도는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금전과 물질로서 다른 사람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금전으로도 다른 사람의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고도 큰 은혜에 모두 보답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느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불교에서는 ‘연기법’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먹는 밥은 농부의 농사가 있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입는 옷은 노동자의 작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쓰는 일용품은 상인들의 공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존할 수 있으려면 모든 것이 다 여러 영역의 대중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인 것으로, 이러한 것이 없다면 우리 개인이 어찌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1989년 고향방문에서 40~50년 전 저를 때리고 욕하던 불학원 강사 스님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미 70~80세의 고령이 되어 계셨습니다. 설번 원장을 비롯한 원담, 합진(合塵), 혜장(惠庄), 개여(介如), 본창(本滄) 등 강사 스님들과 동기였던 지용(智勇), 현화(現華), 출진(出塵) 등의 선생님들이 해외여행을 할 수 있도록 초대하였습니다. 홍콩을 둘러보거나 멀리 미국으로, 심지어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세상이 넓다는 것을 둘러보도록 하였고 그 옛날 가르침의 큰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물론 저에게 은혜가 있는 분들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묘과(妙果) 노스님, 지도(智道)스님과 대만의 수많은 불자들이 저의 법신혜명을 길러주어서 저로 하여금 세상에 불법을 널리 펼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인연이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중국대륙과 대만 심지어 세계 각처의 모든 인연 있는 분들의 많은 은정(恩情)에 대해서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모르겠기에 저는 전 세계의 모든 제자들이 자신들이 주관하고 있는 각 도량에 ‘적수방(滴水坊)’을 설립하여 한 끼로 할 수 있는 식사와 국수를 제공하였는데 빈승으로 하여금 “한 방울의 은혜를 샘솟는 물처럼 보답한다”라는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를 바랐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85호 / 2017년 3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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