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 혜능과 니간타

중생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마음의 상 때문

유아와 무아, 고행과 중도, 이게 두 종교를 극과 극으로 갈랐다. 중국 선불교의 심여명경대 시시근불식 막사야진애(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惹塵埃)'가 자이나교와 유사한 관점이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유사한 종교
초월적·정신적 행복 얻었다지만
상주불변의 상은 끝내 못 버려
내가 없기에 제도한 바도 없어

‘거울(마음)에 때가 내려앉으면 먼지떨이개로 털어 달라붙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다. 혜능의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는 일체의 실체론적인 주장을 부정하는 통쾌한 시각이다. 일체는 현상이다. 아도 현상이고, 중생도 현상이고, 열반도 현상이고, 부처도 현상이다. 이걸 보지 못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은 전도(顚倒)된 환망공상이다.

돈황본은, 위의 덕이본과 달리, 본래무일물 대신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이라 하지만 이리되면 실체론이 된다. 돈황본이 덕이본보다 더 오래되었지만, 더 오래되었다고 더 진리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게 진리인 경우가 몹시 흔하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가장 유사한 종교이다. 예를 들어 창시자 니간타 나타풋타의 이명인 마하비라(Mahavira)와 자이나(Jina)는, 각각, 큰 영웅과 정복자란 뜻이다. 세속적 물질적 욕망을 이기고 초월적 정신적 행복을 얻은 영웅이다.

우리나라 절의 대웅전도 ‘큰 영웅(부처님)을 모신 집’이라는 뜻이다. 부처는 ‘법구경’에서 ‘전쟁터에서 천 명의 적을 정복한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한 사람이 더 위대하다’고 말했다. 사자와 호랑이는 뭇 짐승을 굴복시키는 금수의 왕이지만 자신을 정복하는 법이 없다. 아직 의식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부처님 당시에 인간은, 35억 년의 노력 끝에, 이미 자기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의식을 갖추었으나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부처님은, 밖으로만 치닫는 우리 의식을 안으로 돌려, 우리 마음의 실상을 보고 어리석은 마음의 지배를 벗어나자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외면의 정복자인 전륜성왕을 포기하고 내면의 정복자인 법륜성왕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마하비라와 부처님은, 적의 정체에 대한 생각과 적을 정복하는 법이 서로 달랐다. 전자는 수자(壽者, 상주불변, 불생불멸, 청정무구, 아트만)에 대한 무지이고, 후자는 무아연기에 대한 무명이다. 전자는 고행이고, 후자는 (번뇌의 생멸에 대한) 지혜이다.

뭔가 새로 알았을 때 남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그리고 뿌듯함을 느낀다. 남들 위에 군림하고 더 윗사람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부려먹고 싶어진다. 두꺼운 포단 위에 앉아 삼배를 받고, 소리가 닿을 거리이면 짧은 반말로 지시를 내린다. 소리 밖이지만 눈길이 닿을 거리이면 고갯짓으로 지시를 내린다.

부처님은 평생 자신의 두 발로 걸어 다니셨고 자신의 발우에 직접 밥을 빌어드셨다. 비와 빛을 피해 우산과 양산을 쓰는 법도 없으셨다. 바투 깎은 머리 위에서 여름날 내리쬐는 햇볕이 뜨겁게 부서졌고 쏟아지는 비는 산산이 흩어졌다.

종단의 우두머리를 자처하지도 않으셨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스스로 ‘내가 누구를 제도했다’는 생각을 하시겠는가? 줄탁동시(?啄同時)로다. 연기(緣起)로다. 제자가 안으로 무르익었을 때,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침묵의 소리를 들은 스승이 제자의 얇아진 자아의 껍질을 쪼면 또 하나의 자아가 사라진다! 침묵 속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깊이는 한없지만 그 안에 아무도 없다. 살랑대는 빛다발은 수정체를 흔들어도, 아롱지는 그림자는 망막에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한 명도 제도한 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누구를 제도했다는 바로 그 생각이 아상이기 때문이다. 아(我)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행동과 말과 생각이 아(我)이다. 사상(四相)이다. 사상(四相)을 가지면, 이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크게 자랄 수 있다. 그러면 무여열반은 수평선 위의 돛단배처럼 멀어져간다.

최고의 보시는 무여열반이다. 그런데 시여자(施與者)에게 사상(四相)이 있으면 그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상(四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화폭에 색깔이 있으면 모든 색을 받아들일 수 없듯이, 항아리가 차 있으면 물건을 넣을 수 없듯이, 마음에 상이 있으면 모든 중생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결과 모든 중생을 무여열반으로 인도하는 게 불가능하다. 마음은, 일체를 차별 없이 받아들이는, 허공처럼 비어있어야 한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85호 / 2017년 3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