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동아시아불교의 역사적 성격-하
7. 동아시아불교의 역사적 성격-하
  • 최병헌 교수
  • 승인 2017.04.0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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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위에 있던 인도불교 중국 전래 이후 철저히 왕권 예속

▲ 남북조 시대의 북위(386~536) 때부터 시작해 당(618~907)대까지 공사가 계속됐던 중국의 용문석굴. 사진은 용문 석굴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봉선사 석불. 10m 크기의 본존불 양편으로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이 조각돼 있다.

동아시아 불교권의 특징으로서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현실중시의 경향과 국가불교로서의 색채가 농후한 점이다. 원래 인도불교에서는 현실세계(世間)와 이상세계(出世間)를 구분하는 이원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어서 현실은 고통의 세계로서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상세계보다는 현실세계를 중시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내세(來世)의 문제까지도 현실세계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불교에 대한 기대도 이상보다는 현실에서의 역할을 중시하여 개인적으로는 양재초복(禳災招福)이나 무병장수(無病長壽), 국가적으로는 왕권강화나 국가발전 등을 기원하는 역할이 요구되었다.

북조서 불교는 완전 예속됐지만
남조서는 상당부분 독립성 유지

남북조 통일 수나라 들어서면서
양쪽 불교 통일해 치국책 활용

당 왕조 시작되면서 예속 심화
유교와 함께 종교의 하나 전락

교리발달과 종파불교 성장으로
당시대에 ‘중국불교 완성’평가

한국·일본서도 왕권과 유착
왕권 방해될 땐 가혹한 탄압


그 결과 중국의 불교는 기복적인 신앙과 국가종교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불교의 이러한 현실중시 입장과 국가종교적 성격의 이면에는 현실 가운데 진리가 존재한다는 ‘즉사이진(卽事而眞)’에 기초한 제법실상론(諸法實相論)이나 사사무애법계설(事事無?法界說) 같은 천태종과 화엄종의 사상적 토대가 뒷받침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인도에서는 세간과 출세간을 관철하는 정법(正法,dharma)이라는 관념이 있었는데, 그 정법은 인간생활의 기준을 이루는 것이어서 크게는 국가의 정치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것을 떠날 수 없다고 인식되었다. 따라서 국가와 불교의 관계는 불교교단이 정법의 호지전승자(護持傳承者)인 데 비해 국가는 정법을 활용하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양자는 정법을 통하여 연결되었다. 그러므로 불법은 왕법과 공존하면서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으면서도 결코 왕법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초기부터 왕법과 불법 사이에 갈등을 빚게 되었고, 오랜 기간 양자 사이의 대립 항쟁을 거쳐 마침내 불법이 왕법 아래에 굴복하여 예속되었다. 인도와 중국 두 지역에서의 왕법과 불법의 관계를 한마디로 비교한다면 인도에서는 교주왕종(敎主王從), 중국에서는 왕주교종(王主敎從)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불교전래는 한무제에 의해 실크로드가 개척됨으로써 서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사신과 상인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교가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최고 권력층인 제왕의 권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 결과 왕권과 불교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불교의 역사는 왕조의 성쇠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전개되었다. 인도 문화를 바탕으로 한 불교는 노장사상이나 신선신앙과 결합되면서 중국인의 필요성에 부응할 수 있게끔 변질을 겪게 되는데, 남북조시대에 들어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북조(北朝)와 남조(南朝) 사이에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불교가 국가의 정치권력과 연결되어 국가 종교적 색채를 농후하게 띠게 되는 방향으로 변질되는 과정에서 호족(胡族) 치하의 북조에서는 불법과 왕법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채로 그대로 유착되는 관계를 이루었다. 불교도는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상호 이용하는 관계를 형성했고, 사찰건축과 불상조성 등의 불사가 곧 황제와 국가의 융성과 안태(安泰)에 직결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4세기 중국불교 성립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되는 도안(道安)은 “제왕에 의지하지 않고 불사를 일으키기 어렵다(不依國主 佛事難立)”고 하여 불교의 발전에 국가권력, 특히 제왕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북조의 제왕 가운데 4세기말경의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는 불교를 국가 공인의 종교로 유포토록 하고 장려한 불교사찰들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법과(法果)를 맞아들여 도인통(道人統, 沙門統)에 임명하여 교단을 통솔하게 하였는데, 법과는 태조를 “당금(當今)의 여래(如來)”라고 하면서 승도들로 하여금 부처와 똑같이 황제를 예경토록 하였다. 또한 5세기 중반경 고종(高宗) 문성제(文成帝)는 오급대사(五級大寺)에 태조 이하 다섯 황제를 공양하여 5구의 석불상을 조성케 하였다. 그런데 황제 자신들의 모습을 석가불의 상으로 조성케 함으로써 자신이 곧 살아있는 석가불로서 군림하고 있음을 자임하여 백성들에게 믿게 하려는 의도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사문통 담요(曇曜)로 하여금 대규모의 운강석굴(雲岡石窟)을 조성케 하면서 제16동부터 제20동까지 안치한 석가불 5구를 태조부터 당시 황제였던 문성제(文成帝)까지의 5대 황제의 모습을 조각케 하였는데, 이것도 바로 황제가 곧 여래라는 북조불교의 왕즉불사상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또한 석가불과 함께 미륵불이 집중적으로 조성되고 있었는데, 불교의 이상적 제왕으로서의 전륜성왕의 관념이 당시 황제를 비롯한 지배세력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한족의 국가인 남조에서는 북조에서와 달리 왕법에 대하여 불법의 독립성을 어느 정도 주장할 수 있었다. 동진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은 제왕에 대한 예경을 거부하고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술하여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차이를 밝혀서 사문은 왕자에게 예를 다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방외의 일민(逸民)으로 자임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 뒤 양의 무제(武帝)는 불교에 귀의하여 대규모의 불교행사를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소 사신공양까지 행하여 사원의 노예로서 봉사하고 재물을 보시하였다. 그는 ‘보살천자(菩薩天子)’, 또는 ‘보살황제(菩薩皇帝)’로 일컬어졌는데, 중국 고유한 천자 관념이 인도의 전륜성왕 이념과 융합되어 이루어진 새로운 제왕상이었다.

여기에서 북조 호족의 전제황제 치하의 불교와 남조의 귀족사회에서의 한족 황제 치하의 불교의 성격 차이를 그대로 들어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국가와 불교의 관계에서 북조에서는 철저하게 국가 중심적이어서 국가가 불교에 은혜를 베풀어줌으로써 그 대가로 국가에 봉사시켜 제왕들의 권위를 상승시키려 했음에 비하여 남조에서는 불교의 비호 아래 국세를 유지하려는 정도에 그친 것이었다.

남북조를 통일하여 300여년의 오랜 분열기를 종식시킨 수나라 때는 북조 계통의 실천불교인 선·정토·계율 등의 전통과 남조 계통의 학문적이며 사변적인 불교를 종합 통일함으로써 그 통합불교를 가지고 통일국가의 정신적 지주로 삼으려고 하였다. 수를 건국한 문제(文帝)는 황제보살로 자처했던 양무제와 유사하게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라고 자처할 정도로 불교를 신봉하여 불교치국책을 추진함으로써 국가불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수의 불교를 계승한 당에 이르러서는 불교의 정치적인 역할이 크게 축소되면서 왕법 아래에 불법이 종속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확정되었다. 당 초기부터 ‘사문불경왕자론’에서의 주장과 같은 것은 중국역사상 영구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중기에는 황제에 대한 승려의 자기 칭호도 ‘빈도모(貧道某)’, ‘사문모(沙門某)’ 등에서 ‘신(臣)’으로 그 표기가 바뀌었다. 이것이 일반의 관례가 되어 송대에는 승려의 상표문에 “신이 머리를 조아립니다(臣頓首)”고 표현할 정도로 완전히 국가체제 속에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당의 황실은 노자의 성이 같다는 점에서 도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또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게 되면서 불교의 종교로서의 지위와 정치적인 영향력은 이전시대에 비하여 크게 약화되었다. 위진 남북조의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불교·유교·도교의 삼교 정립이 통치에 필요하다는 인식의 결과, 남북조 이래의 중국사상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불교는 유·불·도 삼교의 하나로서 위치 지어졌다. 그러나 불교 자체의 교리적인 발달과 교단의 종파적인 발전은 획기적으로 이루어져 중국불교사상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교학불교로서 화엄종, 실천불교로서 선종이 성립됨으로써 중국불교의 완성을 이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나라 불교의 정치적인 영향이라는 면에서 예외적인 시기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집권하였던 때(684~705)였다. 그녀는 정치적 승려인 회의(懷義)의 건의를 받아들여 위경(僞經)인 ‘대운경(大雲經, 大方等無想經)’에 의거하여 “부처가 입멸한 이후 700년이 지나서 신앙심 깊은 여자가 천하의 통치자로 나타나 모든 나라를 복종시킨다”는 예언을 내세워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하였으며, 693년에는 세계제왕이라는 의미의 금륜성신황제(金輪聖神皇帝)를 자칭하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 발해의 문왕(737~793)도 자신의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고 하여 전륜성왕으로 자처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중국을 통하여 불교를 받아들인 한국, 일본, 베트남 등의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처음부터 국가불교가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전개되었으며, 국도를 중심으로 교단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왕권과 불교의 지나친 유착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때로는 국가발전과 불교융성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으나, 왕권의 강화나 국가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정치권력에 의한 가혹한 폐불(廢佛)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왕권이나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지원은 본질적으로 불교 자체의 발전보다는 정치권력을 강화하려는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측면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불교사에서의 삼무일종(三武一宗)의 4차 폐불사건, 조선왕조 초기의 억불시책, 일본 메이지유신 초기의 폐불훼석 등의 조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왕권과 불교, 정치권력과 불교교단의 관계는 이른바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의 중도(中道)를 유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각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상호 견제하는 긴장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양자의 관계가 지나치게 유착하면 정치의 문란과 교단의 부패, 대립 갈등하면 사회혼란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국가불교적 성격은 오랜 역사적 산물로서 불교의 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국가의 발전과 문화의 융성에 크게 기여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대불교화 과정에서는 청산되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근대불교화 과정에서 일제의 식민지불교정책으로 인해 어용성이 체질화된 한국불교계에서 강조되고 있는 ‘호국불교’로 미화되는 성격론은 하루빨리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386호 / 2017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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