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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된다’와 ‘안된다’-상

“‘좋다’며 긍정하는 사람에겐 반드시 인복이 따릅니다”

▲ 성운대사가 불광산 총림학원에서 학인들에게 수행자의 삶과 위의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대만 불광산 제공

"‘안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수 없습니다. 남을 돕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거나 남들과 인연 맺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저는 그들을 대체로 자연적인 인연에 맡겨 둡니다. 매사에 ‘안 된다’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필시 무능하여 좋은 일을 망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앞날은 각자의 성격과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된다’와 ‘안 된다’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약 “좋아! 그래”하고 자주 말한다면 앞날은 점차 발전하게 될 것이고 곳곳에서 “안 돼”라고 말한다면 점차 인복이 없어지고 힘들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인물인 ‘증국번(曾國藩)’ 선생의 가장 큰 장점으로 ‘사람을 잘 알고 적절하게 쓴다’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사람을 알고 쓰는지에 대해서는 ‘증국번전집(曾國藩全集)’을 읽어보면 마음으로 저절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단번에 그 장점을 배울 수 있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증국번’ 선생이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여 청조의 붕괴를 막는 데 공헌할 수 있었던 것도 ‘증국번’ 선생이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족(滿族)의 청나라가 한족(漢族)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청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던 ‘증국번’의 ‘사람을 보는 눈(識人)’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을 잘 보고 그 사람에 맞게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알아보고 그에 맞게 쓰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지도자로서 정치계나 기업이나 교육계를 막론하고 부하들을 선택해서 쓰는데 있어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아마도 매우 중요한 능력이 될 것입니다. 본래 어려운 사업을 하더라도 누군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기에 천하의 인재를 얻고 그 사람을 잘 써서 위기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본래는 기세 좋게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사람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사업을 망치기도 합니다. 이로써 ‘사람을 보는 눈’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그 무엇을 갖추었기에 쓸 수 있는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그 무엇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쓸 수 없는 사람일까요? 일체의 좋은 일에서 언제나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쓸 수 있는 사람이고 관료로서 “안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좋은 일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빈승은 생각합니다. 

빈승이 ‘사람을 볼 줄 아는 문제’에 대해서 과거의 많은 역사적 인물들과 서로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은 빈승에게는 재력이 없고 넓은 인맥도 없기에 천하의 인재를 골라서 쓸 수 있는 능력 또한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단지 절 집안의 ‘발심’하고 ‘같은 신념을 가진’ 듬직하고 진중한 발심자들이 함께 하고 어려움을 기꺼이 함께 극복하고자 하는 이들이 우리들에게 가장 힘이 되어주는 인재입니다.

인재인지 인재가 아닌지 선택하는 데에는 혜안이 있어야 합니다. 인재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 대체로 저는 그 사람 됨됨이가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가를 봅니다.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그 사람이 알고 있는지, 그 사람의 성격이 선한지 악한지가 근본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이 사람이 일에 대해서 “된다”라는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안 된다”라고 말을 하는지를 따지고 있습니다.

매사 “된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사람을 좋게 대하는 사람이고 좋은 관계를 맺으니 필히 인복이 있어서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안 된다”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사람을 밀어내는 사람은 필시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흔히 말하길 ‘관료적’이고 ‘사무적인 어투’의 사람으로 봉사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저 역시 잘 쓰지 않습니다.

불가에는 소위 말하는 ‘종문사상(宗門思想)’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당신이 독실한지 독실하지 않은지, 업무윤리에 대해서 당신이 분수를 알고 있는지, 맡은 일에 대해서나 맡지 않은 일에 대해서 당신이 모두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 주동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지, 혹은 당신에게 도덕적 용기가 있는지, 인정과 사리와 법규에 대해서 주도면밀하게 배려할 수 있는지 등을 봅니다.

여러해 전으로 기억하는데 한 제자가 미국 여행을 다녀와서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한 마디 말로 미국에서 어려움이 없었어요.”

이 말에 누군가 그 한 마디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안 된다, 모른다, 모르겠다, 못한다는 뜻으로 “노(No)”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 “미국에서 다니는데 어떻게 ‘노’라는 말 한마디로서 어려움이 없었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입국심사를 받으면서 입국상황에 관해서 물었을 때 내가 ‘노’라고 대답하면 귀찮은 것이 싫은 그 사람들이 입국도장을 찍어줘서 입국했고요, 혹은 미국에서 운전하다가 위반을 해서 경찰이 단속을 받을 때 나한데 뭐라고 하던 “너희가 하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는 뜻으로 그냥 ‘노’ ‘노’라고 하면 귀찮아서라도 나를 놓아 주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은 다시 미국으로 여행을 갔는데 이번에는 미국 경찰당국에 체포되었다는 소리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노’라는 말로서는 세상을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안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수 없습니다. 수십 년 이래로 지근에서 접촉했던 일부 사람들 가운데 남을 돕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거나 남들과 인연 맺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저는 그들을 대체로 자연적인 인연에 맡겨 둡니다. 매사에 “안 된다”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시 무능하여 좋은 일을 망치게 되고 남들과 협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라고 하거나 ‘안 된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저는 대부분 중요하게 쓰지 않습니다. 이와 반대로 소위 말하는 “남을 돕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서” 언제나 “제가 도와드릴까요?” “제가 해드릴 일이 있을까요?” “제가 대신 해 드릴게요”라고 말하면서 주도적으로 기꺼이 나서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저는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예를 들어 지객의 소임은 찾아온 손님을 안내해 주어야 하고 음식과 찻물을 보살펴줄 필요가 있으며 어떤 연락을 해야 하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일부 지객들은 “식사는 했나요?”라고 묻고서는 상대가 “아니요”라고 대답하면 “그럼 빨리 가서 식사하세요.”라며 일을 전가시켜 버립니다. 혹은 찾아온 손님에게 어떤 지객은 “대웅전에 가서 참배하셨나요?”라고 다짜고짜 물은 뒤 손님이 “아직 못했어요.”라고 말하면 바로 “그럼 얼른 저쪽으로 가서 참배하세요.”라고 손님을 쫓아버리고 홀가분해 합니다. 이러한 지객이 비록 무슨 극악무도한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사람들이 마음으로 다가오려 하겠습니까? 지객이 되고자 한다면 찾아오는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지객(知客)’이라면 ‘객’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식사를 필요로 하는지, 숙박을 필요로 하는지, 누구를 찾는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는지, 연락해줘야 하는 일이 있는지 등을 알아야 하고 모른다면 세세히 파악해 하나하나 자신이 맡아서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핑계거리를 찾아 이러한 문제를 회피하면 안 됩니다.

예전에 저희가 사찰을 짓고자 건축신청을 하려고 지역정부를 찾아갔는데 “민정국으로 가라”고 하기에 민정국으로 갔더니 민정국에서는 다시 “건설국으로 가라”고 해서 건설국에 갔더니 “당신들 사안은 종교부문이니 다시 민정국으로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관할이 아니라며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서로 밀어대니 저희는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예전에 홍콩에서 저에게 보내온 불상을 찾으러 지룽세관에 가서 통관수속을 하고자 건물의 위아래로 수없이 오르내렸지만 수속방법을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누군가 “이렇게 복잡한 것을 하려고 하지 마세요. 통관 대리업자에게 맡기면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마음 속으로 자신을 나무랐습니다. 경비를 아끼려고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고자 했는데 확실히 어떤 경우는 시간을 쓰더라도 목적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번은 해외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가장 좋은 호텔에서 접대를 받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방문 바깥에는 항상 한 사람이 서 있었기에 우리를 감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인지 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방에 있을 때 누군가 저를 찾아온 것을 듣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매번 큰소리로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오신 겁니까?”
“성운대사를 만나러 왔는데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찾아온 사람은 이 물음에 어찌 대답할지를 몰라 했습니다. 또는 찾아온 사람이 “저는 성운대사의 친척이에요”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또 “오늘은 안 됩니다”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왜 “오늘은 안 된다”고 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찾아온 사람은 이 소리에 할 수 없이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제가 머물던 이곳에서도 그랬고 다른 곳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봉사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이미 길러진 이러한 국민성은 매사에 항상 거절해 버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였고 “안 돼”와 “노”라는 한마디로서 무슨 일이든지 끝내버렸습니다.

나중에 저는 다시 다른 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 나라의 호텔 봉사자들은 저를 보자 몸을 일으켜서는 “제가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제가 무엇을 해드릴까요?”라고 물으면서 제가 필요로 하는 일을 떠맡아서 하고자 하였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제가 그곳으로 모셔다 드릴게요”라고 말하였는데 그 사람은 저를 도와 저의 목적지를 찾아주었을 뿐 아니라 제가 찾고자 하는 사람까지 찾아주었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87 / 2017년 4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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