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홀히 해선 안될 약왕보살 역할

기자명 이병두

 
영국 출신의 두 자매인 엘리자베스 키스와 엘스펫 K. 로버트슨 스콧이 1920~1940년대에 한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화가인 언니는 그림을 그리고 동생은 글을 써서 1946년 ‘Old Korea(올드 코리아)’를 출간했다(국내에서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로 번역·출간). 이 책에는 당시 우리나라 상황을 돌아볼 수 있는 귀한 그림 자료와 설명이 담겨 있다.

자매는 당시 한국의 사정을 매우 정확히 알고 있었고, ‘3·1운동’에 대해서도 “놀라운 발상이었고 영웅적인 거사였다. 빈손으로 독립을 촉구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돌아올 보복이 얼마나 심할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울에서만 20여만명이 길거리를 메웠고, 그와 동시에 한반도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서도 똑같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애국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며 감탄한다.

그런데 이 자매의 책에서 동씨(董氏)라고 하는 여인 이야기를 접하면서 불교인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자매가 체류하고 있던 선교관에 머물던 그는 작은 암자를 책임지고 있던 비구니스님이었는데, 절에서 제사 준비를 하다가 실수로 크게 화상을 입은 뒤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외국인 병원에 입원해서 완치되었다고 한다.

“동씨는 병상에 누워 지내는 동안 기독교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을 매일 들었다. 하지만 스님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에게 기독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씨를 좋아했다. 그녀는 퇴원하면서 의사와 병원 사람들에게 여러 번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한 달 쯤 후에 동씨가 병원으로 다시 와서 이렇게 말했다. ‘승복을 벗고 암자 일을 그만두었으며 모든 살림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병원에 와서 기독교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병원장이 ‘유숙(留宿)을 허락할 수 없다’며 극구 말렸지만 동씨를 좋아하는 간호사들이 간곡하게 청해서 결국 병원에서 머물도록 허락했고 복도에 병풍을 치고 잠자리를 만들어 머물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불교를 믿는 자기 친구들에게 행복한 기독교인의 생활을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주름살 많은 동씨의 얼굴에 어린 행복한 표정은 어느 설교보다도 더 설득력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동씨의 얼굴을 보면, 그는 한국의 평범한 나이든 여인과 다르지 않다. 그가 선교 병원에서 지낼 때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했다고 하니, 화상을 입는 불운이 아니었으면 암자를 지키면서 이웃의 주민들을 위해 위로하고 기도하며 비구니로 편안한 일생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그런 인자한 모습에 끌려 부처님 품을 찾아오는 주민들도 많이 늘어났을 것이다. 아니 설사 화상을 입었을지라도,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100여년 전의 이야기를 꺼내서, 새삼 우리의 아픈 과거를 건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과거 불교 지도자들은 주지 싸움, 비구·대처 싸움, 종권 다툼 등으로 세월을 보내느라 재가불자들은 커녕 비구·비구니스님들이 늙고 병 들었을 때에 보살필 수 있는 길을 찾을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무책임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구니스님들이 일반 병원의 부인과 진료를 받으며 겪는 불편을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

조계종립 동국대에 의대와 병원이 생기고 최근 조계종단에서 ‘승려노후복지’ 제도를 도입하여 실행하면서 스님들의 불편을 조금은 덜게 되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기독교계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역사가 100년에 불과한 원불교에 비해서도 의료복지 분야에서 수십 년 이상 늦었다는 점을 거듭 곱씹어봐야 한다. 약왕보살(藥王菩薩)의 역할까지 이웃종교에 넘겨줄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388호 / 2017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