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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이덕규의 ‘밥그릇 경전’

기자명 김형중

개 밥그릇에서 본 발우공양 교훈
조주 공안 인용해 깨달음 주는 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정신
꼼꼼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시의 제목이 ‘밥그릇 경전’이다. 가을날 눈부시게 노란 은행 단풍이 한 순간 늦가을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장호의 ‘은행경’, 한 장의 연탄처럼 자신은 타서 재가 되지만 이웃의 고통을 보듬어 주고 따듯하게 해주는 연탄을 보고 인간도 연탄에게서 대승보살의 자비심을 깨우치고 배우라는 안도현의 ‘연탄경’과 하찮은 미물 해충인 모기에서 삶의 깨우침을 배우라는 황지우의 ‘모기경’ 등이 있지만 ‘밥그릇 경전’은 제목부터가 흥미롭다.

개가 밥그릇 핥아 깨끗이 하듯
사람도 마음 잡념 없애야 행복
몸·마음 깨끗이 하라는 가르침
시인의 불교 사상 깊이 나타나

이덕규(1961~현재) 시인이 밥그릇을 경전에 비유하여 읊은 이 시는 재미있을 뿐만아니라 불교의 발우공양에 대한 교훈과 ‘조주어록’에 나오는 조주선사의 ‘밥을 먹었으면 발우나 씻어라(세발)’의 화두공안을 인용하여 큰 깨달음을 주는 시이다. 이 시를 찬찬히 읽으면 시인의 불교사상과 선어록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나타난다.

이 시는 절간에서 기르는 개가 자기가 먹은 밥그릇을 깨끗이 혓바닥으로 씻어낸 모습을 관찰하고 인간이 개에게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여 쓴 것이다. 불교경전의 가르침이 잡념과 집착을 없애면 고통이 사라져서 행복하게 사는 이치를 밝힌 것이다.

개가 자신의 밥그릇을 일념으로 핥아서 깨끗하게 하듯이 인간도 마음의 잡념을 그렇게 없애면 된다. 개도 처음에는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밥그릇을 가지고 온갖 어려운 수행과 인욕을 닦는다. 그리고 마침내 ‘육조법보단경’에서 혜능선사가 법달 비구에게 “‘법화경’에 얽매이지 말고, ‘법화경’을 굴리며 살라”고 가르치듯이 개가 밥그릇을 가지고 자유롭게 논다.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마지막 4연에서 조주선사의 “밥을 다 먹었으면 밥그릇(발우)을 씻어라(洗鉢)”고 하는 공안을 용사(用事)하여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하고 결구를 한 것은 이 시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시격을 높이는 절창이다.

옛말에 “먹는 모습에서 복이 온다”는 말이 있다. 식탐이 많으면 많이 먹고 음식을 남긴다. 개도 자신이 먹고 난 밥그릇을 깨끗이 치우는데 인간들은 식사 후 밥그릇이 지저분하고 뒷처리가 안 된 경우가 있다. 세상의 일도 그렇다. 조주선사의 ‘세발(洗鉢)’공안이나 ‘청다(淸茶)’공안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으라는 가르침이다. 마음은 욕심을 버리면 청정해지고 몸은 목욕을 하면 깨끗해진다. 불도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이고 일상사(日常事)가 법이다. 5월9일이 대통령 선거일이다.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후보들 자신의 입부터 깨끗이 씻을 일이다.

이덕규는 강화에서 농사를 지으며 도를 닦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시를 일념으로 쓰는 내공이 탄탄한 불교시가의 잠룡시인이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388호 / 2017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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