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49재 치르면서도
불교에 문외한이었던 시절
불교대학 인연에 기도정진
매일 1000독씩 광명진언
대광명사에는 대광명불교대학이 있었다. 이곳에 등록해 교리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백중기도를 시작한다는 안내문을 보게 되었다. 당시 백중기도의 방법은 ‘광명진언’ 수행이라는 표시에 눈길이 갔다. 매일 오후 2시 그리고 오후 8시마다 대광명사에서 광명진언 독송이 이어졌다. 나는 가능하면 오후 2시 기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 시간 기도에 빠지게 될 상황에는 오후 기도에 동참해서라도 일과로 수행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후 기도는 오전 예불에 동참한 뒤 점심공양을 하고 조금 휴식을 취하고 난 뒤 시작이 됐다. 그런데 공양 후 나른할 시간대이다 보니 잠이 쏟아져서 기도를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 겨우 졸음을 쫓아냈다 싶다가도 이번에는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들쑤셔 놓곤 했다. 그런 난관을 몇 번 겪은 뒤 어느 정도 기도가 적응되면서 ‘기도가 즐겁고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름 신나게 백중기도를 마쳤던 것 같다. 생전 처음 해보는 기도라 회향은 정말 뿌듯했다.
이후 가능하면 사찰에서 진행하는 집중기도에는 빠지지 않으려 했다. 마침 아이의 입시도 겹쳐서 지난해에는 백중기도, 수능기도에 동참하며 자비도량참법 참회정진, 츰부다라니 주력수행을 했고 지난 동지기도 때에는 다시 광명진언 수행을 만났다. 첫 수행으로 광명진언을 접한 뒤 몇 년 만에 다시 해보는 ‘광명진언’ 기도였다.
동지기도는 3일 동안 사시예불 전 매일 1000독씩 광명진언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됐다. 수행을 이끄시는 스님과 주력하는 불자들이 보통 1시간30분에 1000독을 채우곤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광명진언을 읊조리려니 입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정작 입이 설어 진언이 겉돌았고, 발음과 함께 집중력도 새어 나갔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적잖이 난감해 했다. 둘째 날부터는 달랐다. 처음부터 광명진언에 몰입했다. 돌아가지 않던 입에서 술술 진언이 나왔다. 도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풍경이 정말 보기 좋았다. 더구나 나 자신이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도 했다. 나 역시 쉬지 않고 잡념 없이 잘 마무리했다. 지나치게 좋은 것도 장애인 것 같다. 셋째 날은 다시 딴 생각이 자꾸 일어나 ‘괴롭다’는 탄식을 반복하며 수행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괴롭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번뇌가 되니 고민까지 생겼다. 이렇게 해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괜찮은 건가.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책방으로 향했다. 불교서적이 놓여있는 곳에 가서 이 책 저 책 읽다가 어느 책의 한 부분과 마주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 이 아홉 구절로 이루어진 광명진언을 하루에 108번 매일 1년 꾸준히 독송한다면 그 공덕이 결코 작지 않다.”
어째서 그 글귀가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광명진언 주력수행에 매진하고 싶다는 원력이 내 시선을 그 쪽으로 이끌었으리라 믿는다. 그러고 보니 길이가 긴 경전과는 달리 광명진언은 비교적 짧은 길이였다. 평소 언제 어디에서나 짬을 내어 꾸준히 염송할 수 있는 일상 속에서 실천 가능한 수행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수행 방법이라는 사실에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수행이 아니라 가능하면 틈나는 대로 광명진언을 주력하겠다는 발원이 생겼다.
책에는 또 한 가지 내게 큰 귀감이 되는 글이 있었다. 기도는 마치 거문고 줄을 조율하듯이 해야 한다는 표현이었다.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거나 지나치게 느슨하게 되면 좋은 소리가 나지 않듯이 기도도 너무 애쓰면 집착하는 것이 되고 게으르면 잊어버리기 쉽다는 지적이었다. 거듭 공감하며 기도에 대한 집착 보다는 일상에서 꾸준히 실천하자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1389호 / 2017년 4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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