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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두고 분노 가득한 환자 마음 녹인 불교호스피스 봉사

기자명 법보신문

법보신문 사장상-박영미

▲ 그림=허재경

부처님이시여! 늘 부족하기만 한 제 곁에 함께 하여 주소서.

갑작스레 맞은 위암 말기 판정에
말 잃고 무표정 일관한 ‘김 순경’

어릴적 술 먹으면 아이들 깨우고
어머니에 폭력 쓴 아버지의 행동
참고 참은게 병 원인이라며 원망

부처님께 원력·지혜 달라 기도 후
작은 봉사가 그에게 힘 되길 발원

부처님 열반상 건네며 대화 시도
말문 열어 내면의 상처 드러내고
부친이 용서를 구하자 받아들여

사찰서 지내며 마음 안정 찾고는
가족에 마음 열고 평안히 잠들어

삶 그리고 죽음.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에 웃고, 울부짖고 온몸으로 죽음을 거부하며 몸부림치는 그들의 틈 속에 오늘도 하나가 되어 있는 50대의 호스피스 간호사다. 호스피스는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의학적인 판정을 내린 경우 평안한 임종을 할 수 있도록 다학제간 호스피스팀들이(봉사자, 종교자, 사회복지사, 의사, 간호사 등등) 접근을 통하여 환자와 가족이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영적인 돌봄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행하는 총체적인 돌봄이다.

어느 날 K종합병원 간호부로부터 환자가 무서워 의료인을 포함한 가족들도 접근이 안 되어 호스피스를 요청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평상시 전화문의와는 사뭇 달랐다. 32세의 ‘김 순경’은 위암말기였고, 무교이고, 그 병원의 간호사였던 누나가 24시간 365일 돌봄을 하고 있었다. 한 집안의 가장인 김 순경과 장녀인 누나 사이를 그 누구도 파고들래야 들 수가 없었고, 누나 가정과 시댁, 김 순경의 아내와 처가, 김 순경 본가와 두 아들. 모두가 환우와 가족 간에 다가가지 못하고, 어두운 그림자만 숨 가쁘게 다가오고 있었다.

매번 새로운 환우를 만나러 갈 때 마다 나는 “자애로우신 부처님! 저의 작은 움직임이 그 분들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저를 끝까지 지켜보아 달라”고 기도드리고, 때로는 새벽예불에 급박하게 다가오는 환우의 검은 그림자에 나의 마음을 잘 다스리고 환우와 가족을 다 수용하도록 부처님께 큰 원력과 지혜를 달라고 마구 매달리기도 한다.

방문 유무를 확인하고 호스피스 팀을 구성하고 파악하기 위하여 누나인 간호사와 우선 상담과 전문적인 돌봄을 같이 해서 처음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갈수록 더 큰 사랑의 힘이 발휘될 수 있는 호스피스에 대해 설명하면서 누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도와주고, 함께 같이 하자고 제안 했다. 처음에는 급성기 병원의 간호사인 누나는 호스피스에서의 통증과 증상을 완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간호사인 누나에게 환우를 소개해 달라고 제안했다.

며칠을 기다린 결과 누나가 우리를 받아들이고, 환우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환우의 친구인 호스피스 봉사자를 소개하기 위해 동행했다. 첫 인상은 분노에 가득 찬 무표정, 말을 잃어버렸고 무서운 인상이었다. 무엇이 김 순경을 저렇게 성나고 화가 나서 인상으로 무섭게 만들었을까? 김 순경의 절망과 분노의 높이, 넓이, 깊이를 자로 재고 싶었다.

의료적인 과거력을 들어보니, 불과 3~4개월 전에 위내시경과 검진결과 아주 건강한 젊은 순경이었으나 몸무게가 줄고 몸이 이상해서 병원 가니 위암 말기라는 날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급격한 진행과 무섭고 견디기 힘든 신체적인 증상인 속 매스꺼움과 지속적인 구토와 위에서 샘물 솟듯 뽕뽕 나오는 출혈이 고이면 피를 토하고 혈변을 보곤 했다. 그야말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그 증상 치료를 위해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접목해 시도하고 쑥뜸과 장침을 놓기도 했다. 병원 내부에서는 이 냄새로 인하여 민원이 발생되고 그 냄새는 오래도록 머물고 있었다.

환우는 친구인 호스피스들이 밤 10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 오기를 원했다. 밤이 너무 무섭고 두렵고 전기 불을 늘 켜 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차적으로 환우와 가족 상담을 통하여 우리는 그렇게 해서 밤에 4명이 가도록 환우에게 허락을 받아 교대로 병실에 들어가면서 환우를 1주일에 두 번 방문했다.

하나의 돌봄이 시작되기 전에 꼭 환자에게 물어보고 환자가 원하는 대로만 했다. 1주일 행사와 2주간의 행사, 월중행사를 계획하고 가족과 의논하고 같이 의견 물어보고 공유했다. 급하고, 중한 것, 급하고 약간 중한 것, 급하지 않으면서 중한 것, 급하지 않으면서 중하지 않은 것 등등…. 코끼리 다리같이 부어 그 다리를 조심스럽게 조금씩 조금씩 사랑을 가득 담아 마사지를 해 주었다.

사실 밤에 환우에게 가는 것은 자원봉사자들도 많은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 아들 같은 김 순경,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폐는 끼치지 않아야 할 텐데. 분노에 가득 찬 무표정하고 말을 잃어버린 무서운 저 인상은 어떻게 감당할까?

아이고 부처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다 같이 각자 기도하면서 봉사하러 오기로 했다. “부처님! 김 순경의 고통과 슬픔, 절망과 두려움, 분노 속에서 방황하는 그 마음속에 당신의 자비가 깃들게 하시고 고통 중에서 사랑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처님 상황이 억시 급하오니 빨리 빨리요 아셨죠? 부처님!”

의식이 있고 임종이 다가올 때, 우리는 다 같이 용서 구하고 용서하기를, 퀴즈 문제를 시작했다. “인사는 누가 먼저 할까요? 용서는 누가 먼저 구할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오고 간 사이 우리는 내가 먼저 하기로 하였다. 내가 먼저 김 순경에게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못나고 부족한 친구들을 초대해 주고, 부족한 돌봄이 마음에 안 들텐데 너그럽게 용서해 주셔 김 순경, 용서해 준다면 나는 김 순경 당신을 끝까지 옆에서 지키고 정기적인 방문과 김 순경이 부를 때는 지체 없이 달려올게요!” 그냥 아무런 말없이 지나가고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언제 오시느냐고 물었다. 천금과 같은 입으로 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말문을 열면 김 순경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 주면 좋을지 유언, 유서, 장례방식, 남기고 싶은 말 등이 있는지 의식이 명료할 때….

나는 그날 저녁 아잔타 석굴에 있는 부처님의 열반모습 액자를 포장하여 가지고 갔다. 인사도 하기 전에 김 순경이 손으로 가리켰다. 뭐냐는 것이었다. 정말 보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김 순경이 누워서 잘 보이는 정면에 놓아두었다. “뭐 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주무시는 모습 입니까” “네, 어때 보여요?” “편안해 보여요” “그럼 앞으로 주무실 때 김 순경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날 그 병실엔 액자 하나가 추가되어 김 순경을 지켜봐 주고 있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불렀다, 아버지와의 관계였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술 한 잔 드시고 집에 와서 자고 있으면 자식들을 다 깨워놓고 훈계하고 잔소리를 계속하여 잠을 재우지 않아 엄마가 말을 하면 때리곤 했고, 이는 곧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이어지곤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야간업무를 하고 자고 있는데 그날도 아버지는 방문을 열고 또 옛날의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또한 출가한 딸과 김 순경의 통장을 아버지가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이런 상황과 관계가 있을 수도 없고 용서 할 수가 없고 받아 들일수가 없어 그로 인해 분노가 쌓여 이 병이 온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의 모친은 말을 하다가 틱 장애 같은 것이 있었는데 바로 아버지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은 아내가 원하는 대로 처리 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꽤 길게 일목요연하게 나에게 이야기 해 주었고 자기는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부처님 열반상을 가리키면서 김 순경도 부처님의 모습처럼….

김 순경의 말문과 마음이 조금 열리고 나는 병실에 들어오는 이에게 말은 하지 않더라도 손을 내밀 수 있겠는지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렵게 아버지께서 김 순경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도록 제안했다. 아버지는 매일 3~4시간 약초 물을 달여 김 순경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그날도 약초 물을 끓여 왔다. 김 순경에게 용서를 빌었다. 김 순경은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굵은 눈물을 흘렸다.

5월5일 어린이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 순경에게는 두 돌 안 된 아들과 5세의 아들이 있었다. 아빠를 잘 따르고, 잘 놀아주곤 했는데 아빠는 아프고 무서운 사람이 되면서 아이들이 피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일지도 몰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가지고 아빠에게로 초대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김 순경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머뭇거리더니 아빠에게 달려가서 안기곤 선물을 받았다. 옆에 식구들에게도 손을 내밀어 손을 잡아주고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김 순경이 병원을 떠나고 싶어 했다. 집에는 가고 싶지 않고 병원 가까이 있을 곳을 수소문 했다. 잘 구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내가 다니던 사찰에 빈 방이 있는데, 환우가 원하는 방을 선택해서 기거해도 좋다고 주지스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너무나 고마웠다. 발걸음 무겁게 옆에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스님께서는 눈 여겨 보고 계셨던 것 같았다.

그곳에 아내와 함께 기거했는데 환우는 새벽 목탁소리에 2층인 법당에 올라가고 싶어 휠체어 타고, 코끼리 다리를 질질 끌면서 1층 나무 계단 앞에 걸터앉아 예불소리를 듣곤 했다. 스님께서는 몸바꿈을 설명해 주시고 따뜻하고 정성스럽고 소리 나지 않게 배려해 주셨다. 그 절에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고귀한 침묵(묵언)
말은 번뇌를 일으켜
많은 업을 짓게 되니
스스로 조심하여
말을 삼가는 묵언을….
묵언은 늘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합니다.

마음의 평화가 도래할 즈음 다시 출혈이 시작됐다. 지혈과 수혈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부처님의 열반 사진도 함께 입실이 되었다. 호스피스들과 김 순경은 약속을 했다. 우리는 김 순경의 이름이 대희(大喜)라서 크게 기쁘게 해 줄 것이라 믿었고, 이름대로 하실 거라고 말하곤 했다. 출혈은 멈추질 않았고 우리는 침묵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 순경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이제는 안아 주었다. 뺨을 비비고 얼굴은 조금 더 평화스러워 보였다. 밤 9시경, 김 순경은 평안히 깊이 잠들었다. 땅바닥 치며 대성통곡 할 것 같은 그의 가족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김 순경의 어머니는 “우리 대희가 너무나 평안히 자고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김 순경 고마워요 당신의 이름은 ‘대희’, 우리를 크게 기쁘게 하고 간 사람이라 기억해요 고마워요 대희 씨, ‘김 순경’”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당신은 부처님 따라….


[1390호 / 2017년 5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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