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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유혜정 작가

기자명 임연숙

회화는 시각을 위한 시

▲ ‘삼류 영화처럼’, 캔버스에 아크릴릭, 50×60cm, 2011년.

부처님오신날이 있는 오월, 일상에서 겪는 작은 미움과 짜증, 불평과 불만을 깨끗이 씻어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내 짧은 상식에 의하면 이런 것들이 결국 고통의 원인이며,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게 아닐까.

민속적 분위기 원시적 색채
상상 표현하고 욕망 드러내
이지적인 화풍에 대한 반란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인연(因緣)들이 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이 작은 일들이 쌓이면 어떤 큰 인연이 될 것만 같아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한다. 아침마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는 너무 얄미운 한 젊은 남자가 있다. 버스 앞문이 열릴 자리에 기가 막히게 서있다, 문이 열리자마자 올라타 귀신같이 빈자리를 찾아 앉는다. 이상한 점은 매일 아침 8시를 기준으로 조금 늦거나 빠르거나 해도 반드시 만난다는 것이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다가도 혹시 이래저래 아는 사람일까 봐 마음을 추스른다. 어떤 사람은 매일 출근길에 같이 타서 저녁 퇴근길에 같은 정류장에 내리는 경우도 있다. 정해진 퇴근 시간이 아닌 좀 늦은 시간 퇴근인데, 어떻게 그렇게 만나는지 신기하다.

회사에서도 저 사람과는 같이 일하기 싫다고 생각하면 꼭 한 팀이 된다. 생활 속 너무나 사소한 인연일까? 왜 좋은 인연은 잘 안 느껴지고 싫은 감정들만 느낌이 남을까? 마음수행이 덜 돼서 이겠지. 이런 낱장 같은 날들이 모여 내 인생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게 사소한 일이 아니다. 매일 매일이 소중하고,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이 너무나 중요하다. 왜 이렇게 보기 싫고 미운지 싶다가도 인연의 큰 뜻을 생각하면 다시 마음을 추스를 수밖에 없다.

유혜정 작가는 스쳐지나가는 사소한 감정과 매일의 일상을 포착해 솔직하고도 자유롭게 표현한다. 때로는 그날의 신문이나 잡지, 여행지에서 얻은 지도, 물건을 산 영수증 등을 배경에 붙이고, 자신의 일상 모습일 것 같은 장면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날의 느낌과 감성을 어떤 거리낌도 없이 화법이나 기법이나 뭐 그런 것들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해 낸다. 거기에는 욕망과 사랑도 있고, 나른함과 일상의 지루함이 있으며, 희망이나 바람, 기대도 있다. 누가 봐도 그런 감성에 공감을 느낄 것이다.

한 장의 영화포스터를 패러디 한 듯한 느낌의 그림에는 ‘삼류영화처럼’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여성과 남성은 신화적 분위기를 풍기며 지긋이 서로를 바라본다. 상징적 동물들과 민속적인 분위기의 원시적 색채감에서 감정표현의 솔직함이 느껴진다. 아침저녁 만나는 일상의 인연도 ‘이게 뭘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랑하는 남녀의 만남, 부부의 인연, 부모 자식의 인연은 얼마나 큰 것인지 생각해본다. 태극의 음과 양처럼 남자의 가슴에는 공작새의 형상이 여자의 머리에는 물고기의 형상이 꽉 차있다. 화려한 목단꽃은 이들을 감싸 안고 있다. 삼류영화라는 단어가 주는 유치하고, 정제되지 않은 느낌과 눈빛을 교환하는 남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데서 작가가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

개념미술이나 전통회화에서 감정을 숨기고, 이지적인 화풍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반란’이랄까. 때로는 유치할 수 있는 일상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미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여백을 없애고 모든 면을 문양으로 채워 넣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공간에 어떤 무늬와 문양이 존재하고 그런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 화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재미있는 상상과 현상을 표현하고 욕망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은 내면 치유의 과정과도 같다. 예술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능이랄까. 예술을 기능으로 본다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치유일 것이다. 자신을 치유하고 또 그런 비슷한 느낌과 일상을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치유를 주는 것이다. 어떤 인연으로 우리는 이 그림을 만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두 남녀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장면을 보면서 행복을 기원하는 치유를 경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임연숙 세종문화회관 전시팀장 curator@sejongpac.or.kr
 

[1391호 / 2017년 5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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