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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곤란을 해결하는 방법 ①

“이치와 법에 맞게 장애를 해결하면 탈이 없습니다”

▲ 성운대사는 자녀를 불광산에 보내 불교를 위해 기여하도록 한 제자들의 부모에 감사하면서 부모들로 하여금 자녀들의 공부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1993년부터 2년에 한 번씩 ‘불광가족회’를 개최하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만약 이치로서 해결할 수 없다면 시간을 들여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관료이고 저는 ‘출가인’이라서 평생토록 스님일 것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보면 제가 유리합니다. 그래서 천천히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생각했습니다.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용감함’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인과를 중시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인연과보는 우리를 공평하게 대합니다.”

세계 여러나라를 다니면서 강연 설법하는 것 외에 교육과 문화, 자선 등 불교 사업을 하다 보니 빈승은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친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을 여러 사람들에게 자주 받았습니다.

20세에 불교 강원을 졸업해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회를 위해 봉사를 해온 빈승에게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할 정도까지의 심각한 고난은 없었지만 어려운 적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수시로 장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운 장애든 간에 모두 인간관계를 통해 해결했습니다.

그 어떠한 곤경에 빠졌다 하더라도 ‘좋은 인연’의 도움을 받곤 했습니다. 사회에서는 곤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돈 봉투로 어려움을 모면하기도 하고 식사 대접으로 곤란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도 있으며 인간관계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법률에 의지하기도 하고 의리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빈승의 경우 평생 공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봉투를 준 적이 없고 식사대접을 한 적도 없으며 인맥의 도움을 받은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저는 먼저 이치에 근거해 장애를 없애고자 하였기에 정부와 사회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치로서 해결할 수 없다면 저는 시간을 들여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관료이고 저는 ‘출가인’이라서 평생토록 스님일 것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보면 제가 유리하니 천천히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용감함’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먼저 비교적 중대한 상황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저의 친한 도반인 지용 스님은 승려구호대를 만들겠다고 마음을 내었지만 대만에 가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나서 바로 손을 떼고 “구호대를 조직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200명의 도반들이 동참하였는데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의분을 느끼고 “당신이 대만까지 인솔하지 않겠다면 내가 하겠소!”라고 말했습니다.

빈승은 그 당시 나 자신에게 무슨 재주나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신의가 있어야 하는데 쉽사리 중도에 없었던 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당시로 시간을 돌려보면 승려구호대의 인연은 비록 성취되지 않았지만 의리와 용기라는 한 생각이 저를 대만으로 오게 만들었으며 저에게 불교 인연에 의해 좋은 인연을 두루 맺을 기회가 생겼고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저는 세계 여러 곳에서 불법을 펼치고 모든 중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만으로 건너 온 이후 생존의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대만입국 허가증이 없었기에 대만에서 체류할 수 없었는데 신분등록을 하러 가던 길에 ‘오백웅(吳伯雄 : 대만의 정치인)’의 부친인 ‘오홍린’ 선생을 길에서 만나는 좋은 인연이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그분은 경민협회(警民協會) 회장이자 대만성 참의원의 신분으로 저의 신원보증을 해주어 주민등록을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저의 대만 체류에 관한 어려움이 해결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움이 해결된 것은 실로 저 자신이 좋은 인연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당시 국민당 정부는 불교도들이 대륙 공산당을 위해서 활동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출가자 100여명을 체포하여 가두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들은 친척도 연고도 없었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20여일의 감옥살이를 하였지만 수많은 정의감을 가진 인사들이 나서서 발품을 팔고 우리들을 구조하기 위해 애써 주었습니다. 좋은 인연으로 결국에는 억울함을 풀고 불교도의 명예를 회복하면서 100여명 우리 승려들은 자유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인사들 가운데에는 ‘오국정(吳國禎)’의 부친인 ‘오경명(吳經明)’ 선생과 입법위원 ‘동정지(董正之)’, 감찰위원 ‘정준생(丁俊生)’, 육군총사령관 ‘손입인’ 장군의 부인 ‘손장청양’ 여사 등이 있습니다. 당시의 법난에서 만약 이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뒷일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정말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빈승은 불안한 시대 상황 속에서 일주일에 한번, 혹은 길어도 2주에 한 번, 혹은 두 번을 한밤중에 경찰에 의해 잠자리에서 불려 나와 신원확인을 받아야 했는데 사실은 저의 행동거지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51년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신죽 청초호 영은사’에서 머물던 그 시절, 시내에서 법회 강연을 하려면 매번 필히 파출소에 가서 외출을 허가 받아야만 갈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당시는 정부에서 사람들에게 북경의 표준어를 배우라고 계몽하던 시기였는데 학습 통지서를 보내도 사람들은 참석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경찰은 상부에 보고할 거리가 없자 할 수 없이 저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대만불교강습회’ 강사였던 저에게 북경표준어 강의를 부탁하였습니다.

제가 한 달 만에 원래 몇 명 되지 않았던 학생 숫자를 200명이 넘도록 늘어나게 하자 그들은 저의 도움으로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지 않도록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며 매우 감동하고 제가 시내에 가서 전법활동을 하는데 파출소에 가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규정을 없애 주었습니다.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이렇듯 우리들의 능력과 우리들의 발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월은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흘러갔고 대만에서의 홍법활동이 10여년이 지나도록 저는 대만 남부 가오슝에서 북동부 ‘이란’으로 두 곳을 왕래했지만 일정한 거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가오슝에 ‘가오슝 불교당’을 짓게 되었지만 단지 신도들이 짓는 것을 도왔을 뿐이고 내 것으로 지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란’에 있는 작은 절 뢰음사(雷音寺)에서 20여년을 머물렀지만 제가 주지가 되겠다고 말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명의를 갖지 않았어도 저는 의무적으로 잡지를 편집하고 글을 쓰면서 남북으로 다니며 운수행각을 하였습니다.

10여년 동안 인연을 맺다보니 불사를 하자는 신도들이 있게 되었고 가오슝 수산공원 입구에 100평 넓이의 5층 건물로 ‘수산사(壽山寺)’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앞으로는 거리낌 없이 안주하며 수행하는 공간이 있게 되었다고 느끼게 되었는데 산 위에 있는 가오슝 요새 사령부에서 갑자기 공문이 날아왔습니다. 수산사의 높이가 너무 높아서 자신들이 해상에 있는 적의 군함을 목표로 삼아 공격하는데 방해가 되니 4층과 5층을 필히 철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도들은 이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시청의 도움을 받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대만은 현재 군사제일의 시기여서 민간이나 정부는 군대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복덕인연이 부족한 자신을 한탄하였습니다. 홍법포교에 매진한 지 10년 만에 어렵사리 작은 수산사가 존재하게 되었는데 곧 철거를 당할 운명이니 불교계에 알려진다면 ‘성운’이라는 자는 복도 없다고 빈승을 비웃을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저 자신의 용기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어서 신도들에게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해결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신분증을 들고 산 위에 있는 요새 사령부를 찾아가 공무로 찾아왔다며 면담을 신청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령부에 도착한 저는 입구에서 “수산사를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리신 분이 어느 지휘관이십니까? 저는 수산사의 주지로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한 대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가 담당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이 대령의 성명을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저는 그 사람에게 “당신이 수산사의 4층과 5층을 철거하라”고 지시한 것에 대해 저 개인적으로는 의견이 없습니다. 당신도 보시다시피 저는 ‘출가인’으로, 어디를 가도 다 집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고 당신이 이 절을 철거하면 저야 이곳을 떠나 다른 절에 가서 살면 됩니다. 그러나 만약 신문기자가 함께 와서 사진을 찍고 대만은 종교를 탄압한다고 쓰게 되거나, 가오슝 시민들이 지은 수산사를 철거하는 것은 당신이 그들의 절을 부수는 것으로 그들의 가정을 부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니 만약 그 사람들이 항의를 하게 되면 이는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것만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어서 “당신도 알 것입니다. 며칠 전에 월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이 불교를 핍박하고 불교기를 불태우면서 민중이 항의 시위하고 결국에는 정권이 뒤집히고 대통령이 피살되었습니다. 수산사의 4층과 5층을 철거하면 그 결과에 대해서 당신은 잘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그 사람은 매우 긴장하여 아주 겸손하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며 물었습니다. “저에게 물으시니 알려드리지요. 철거하지 말라고 다시 지시를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해주자 그 사람은 바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 약속을 들은 저는 마음 놓고 수산사로 돌아왔습니다. 하늘을 뒤덮은 것과 같았던 검은 구름이 이 몇 마디 말에 모두 걷혔습니다. 저는 지혜와 용기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91호 / 2017년 5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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