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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원효의 뼈로 만든 진영상

기자명 주수완

그 모습 그대로 중생 곁 머물러 달라는 간절한 바람

▲ 일본 쿄토 고산사 소장의 원효 진영. 아마도 설총이 만들었던 원효 스님 진영상이 참고가 되었기 때문인지 다른 고승진영보다 개성이 뚜렷하다.

얼마전 모 학회가 ‘원효의 사상이 한국 문화에 미친 영향’이란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왠지 원효와 문화, 혹은 원효와 예술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반면에 ‘의상 스님과 예술’ 혹은 ‘자장율사와 예술’ 같은 개념은 다소 생소하게 들린다. 아마도 그것은 원효 스님의 삶이 다소 자유분방하고 기인의 행동을 보였다는 점 때문에, 그리고 그의 삶 자체가 파격이었다는 점에서 예술이 지향하는 바와 어떤 유사한 점이 있지 않을까 기대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의상, 자장 두 분 역시 불교미술사적으로는 중대한 영향을 남긴 분들이고 이에 대해서도 다루겠지만 대중적으로는 원효 스님이 보다 예술적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의 파계는 파격 그 자체
포교 위한 방편 등 해석 분분

아들 설총은 스님이 입적하자
뼛가루에 흙 섞어 소상 조성

중국에는 비슷한 전통 있지만
우리나라는 원효 스님이 유일

표주박에 ‘무애’ 이름 붙이고
무애 춤추며 걸림 없이 살아

언어 뛰어넘어 소통하는 힘
예술 통해 화쟁 의미 보여줘

원효는 정말로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했을까? 마치 플라톤이 예술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예술학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시학’을 쓴 것을 의상이나 자장에 대비하여 원효의 어떤 특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원효 스님 사후의 사건도 파격 그 자체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원효는 요석공주와 동침하여 아들인 설총(薛聰, 655~?)을 낳았는데 ‘삼국유사’는 이에 대해 원효와 같은 훌륭한 유전자를 지닌 존재가 대를 잇지 않고 끝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는 태종무열왕의 배려로 결국 요석공주와 혼인하여 후사를 보게 되었다고 하고, 혹은 원효가 일부러 더 속세 안으로 들어와 세속을 끌어안고 포교하기 위해 취한 방편이었다고도 해석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원효의 민중불교적 성향이 너무 혁신적이어서 국가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점잖게 원효를 파계시켜 그의 세를 조금이나마 주춤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해석도 있다.

무엇이 진실이었든, 여하간 원효의 파계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그의 행보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낳은 설총과 어떤 부자지간의 정을 유지했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설총은 원효가 입적하자 화장하고 난 그의 뼛가루를 부숴 가루를 만들어 이를 점토와 섞어 아버지 원효의 조각상을 만들었다. 어찌 보면 상당히 끔찍한 일처럼 들리기도 한다. 화장하고 난 분골이야 지금처럼 분골함에 넣어 매장하면 될 일인데 그것을 섞어서 상을 만들다니! 왠지 편히 쉬어야할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낳아놓고 무책임하게 팽개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소극적 복수는 아니었다. 아마 실제로 고승의 유골을 그렇게 섞어서 상을 만드는 전통이 있었던 모양이다.

▲ 설총이 쓸었을 분황사의 마당. 가을이면 어김없이 그때의 낙엽이 떨어진다.

중국 서안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어 만든 봉헌판 중에는 ‘선업니(善業泥)’라는 명문이 적힌 작품들이 꽤 다수 전하고 있는데, 이들은 비록 고승의 생전 모습으로 빚어 만든 것은 아니고 그냥 부처님을 새긴 판이지만, 여하간 그 안에 승려의 뼛가루를 넣어 만든 것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돌아가신 분이 부처의 몸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제자들이나 신도들의 바람이 담긴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원효를 부처의 몸이 아닌 원효 자신의 모습에 다시금 자신의 분골을 넣어 만든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원효 그 자체로서 완벽한 인물이기 때문에 원효 그 모습 그대로 중생들 곁에 머물러 달라는 더 큰 바람이 담겼을 것이다. 말하자면 고승의 몸 그대로 미이라가 된 다음 금을 입혀 만든다는 등신불의 또 다른 갈래 쯤 될 것 같다.

이렇게 좋은 뜻이긴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설총의 아이디어였는지, 아니면 원효 자신의 유지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이런 전통이 있었다면 다른 스님들 중에도 이렇게 한 분이 계실 것 같은데, 알기로는 오직 원효 스님뿐이다. 그러나 평소 원효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이는 원효가 전혀 원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란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원효는 평소 어려운 불교 교리도 쉽게 풀이하여 중생들에게 전했고, 또 ‘무애무’라는 춤도 만들어 직접 시연했다고 하니, 만약 중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의 뼛가루 쯤 내놓지 못할 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효가 사라졌음에도 그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는 것은 비단 설총뿐 아니라 신라의 중생들에게 그만큼 그의 부재가 크게 다가왔다는 반증이 아닐까?

▲ 중국 서안박물원 소장의 선업니 명문이 있는 소조봉헌판. 실제로 고승의 유골을 넣어 상을 만드는 전통이 중국에도 있었다.

그가 만든 ‘무애무’는 평범한 표주박 하나에 이름을 ‘무애(無碍)’로 붙여놓고 이를 가지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고 한다. ‘무애’, 즉 걸림이 없다는 뜻인데, 특히 화엄에서 중시하는 이 무애의 개념을 이와는 전혀 무관한 박에다 연결시켜 놓았으니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에이, 원효 스님, 이게 무슨 무애입니까, 박이지”라고 아마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원효는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애인 게야, 모든 것은 그저 이름 붙이기 나름인 게지, 너라는 몸뚱아리에 영수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이게 영수다 이게 영수다 하는 것이나, 이 박에다 무애라고 이름 붙여놓고 이게 무애다, 이게 무애다 하는 것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만약 너의 몸뚱아리가 영수인 게 의미가 있다면 박이 무애인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요, 만약 박이 무애인 것이 의미가 없다면 그대 몸뚱이가 영수인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이지. 그게 바로 무애란 것이다”라고 말이다.

어쩌면 원효는 이름짓기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결국 언어적 사고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일게다. 이러한 원효의 생각은 그가 저술한 ‘열반종요’의 한 문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심(一心)의 성품은 오직 부처만이 그것을 본체로 삼을 수 있으므로 이 마음을 불성이라 한다. 다만 이 한 성품을 나타냄에 있어서는 여러 측면에서 그것을 설명하였다.” 즉, 진실은 하나(일심)인데 이를 여러 가지 말로 나타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박에다 무애라 이름 붙여 놓고 이에 구애받지 말라(즉, 무애) 하였으니 이 얼마나 정곡을 찌른 말인가? 이렇게도 부를 수 있고, 저렇게도 부를 수 있으나 나는 그저 무애로 부를 뿐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런데 이 ‘열반종요’의 지적은 인도의 오랜 사상집인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에 다름 아니다. “Ekam sat vipra bahuda vadanti”. 이는 풀이하자면 “진리는 하나이지만, 현자들은 이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말한다”의 뜻이라고 한다. 원효가 인도의 이 오랜 격언을 인용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화쟁’의 대가였던 원효는 여러 종파와 해석이 사실은 하나의 진실을 말하고 있으나 다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던 것이다. 따라서 화쟁 즉, 서로 소통하려면 언어적 한계, 그 설명의 한계를 벗어나 본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 해인사 소장 희랑대사상. 고려시대 제작된 이 상은 고승의 모습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원효 스님 진영도 아마 이런 사실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예술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부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을 표현하는 것이다. 공자도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예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禮)는 사람들의 거리를 멀게 하고, 악(樂)은 사람들의 거리를 가깝게 한다”. 즉 예는 사람들 간에 질서를 두고, 격식을 갖추게 하는 것이고, 악, 즉 예술(음악)은 사람들을 허물없게 하는 것이어서 이 둘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공자는 결코 예만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예’는 언어로 이루어진 이성의 세계, ‘악’은 언어 바깥의 감성의 세계를 말한 것이리라. 원효가 예술을 중시했다면 바로 이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게 만드는 힘에서 화쟁의 단초를 찾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원효는 예술의 힘, 즉 언어를 뛰어넘게 만드는 힘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무애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진영상을 놓고서도 재미있는 수수께끼를 중생들이 풀기를 바랐을 것 같다. “이 안에 내가 들어있는데, 그럼 이건 원효인가 아닌가?”

생전에 그가 분황사에 머물 때, 설총이 종종 그를 찾아갔다고 한다. 어느 가을, 온 김에 시킬 일이 없으신지 아버지께 여쭙자 원효는 절 마당 낙엽이나 쓸어놓고 가라고 했다. 그러자 설총은 말끔히 낙엽을 쓸어놓았는데, 이를 본 원효가 쓸려간 낙엽들을 한 움큼 주워 다시 마당에 뿌려놓고는 “가을은 원래 이런 것이다”고 했다는 설화는 잘 알려져 있다. 낙엽을 쓸기는 쓸되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원효의 마음은 그대로 쓴 것과 쓸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침을 일러준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설총이 만든 원효의 소상은 설총이 예배를 드리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는데, 이런 일화를 봐도 원효 스님은 마음으로부터 설총을 살뜰히 챙기셨나보다. 

얼마 전 대선이 있었다. 아무쪼록 이제는 언어적 갈등에서 벗어나 화쟁으로 소통하는 사회를 이끌어갈 원효 같은 리더십이 우리나라를 이끌어가길 손꼽아 기대해본다. 찬하여 말한다.

‘박을 무애라 한다면 나도 원효요.
무애가 아니라면 나도 원효 아니네.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몸일 뿐인데,
흙이 내 모습이라고 어찌 안 들어가리!’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92호 / 2017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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