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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잃어버린 불교 성지가 남긴 것-우전국

기자명 오중철

우두산 신앙은 불교중심지라는 자신감 표출

▲ 막고굴 9굴 통도 천장부(부분). 9세기 말. 중심축을 따라 아래부터 우두산, 우두산 석가여래상, 양주서상이 배치되어 있다.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말 사이에 건설된 돈황석굴 중에는 주실로 통하는 통도 천장부를 각종 불교감통설화의 벽화로 장식한 경우가 많다. 이들 석굴에 그려진 불상과 신이한 사건들의 장면들을 검토해보면, 비록 세부적인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소재들의 구성에 있어 비교적 정형화된 패턴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본 연재에서 다룬 바 있던 내용들 중 코삼비국의 우전(優塡)왕상, 아육왕 탑상, 양주서상 등의 소재들이 석굴의 감통설화 벽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서역남로 대승불교국가 ‘우전’
돈황 불교감통설화 중 다수는
우전국서 유행한 서상을 소재
자국 정세 안정의 바람 담겨

그중 화면의 중심축을 따라 배치된 소재들 역시 정형화되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더욱이 그 위치의 특성으로 인해 예배자의 주목을 끈다. 막고굴 9굴의 통도 천정부를 보자. 화면의 중심축을 따라 중앙에는 산줄기를 배경으로 양주서상이 입불상의 형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하단에는 또 다른 불상이 정좌하고 있고, 그 밑으로는 험준한 산악이 이어진 가운데에 우락부락한 형상을 한 괴수 머리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도상의 구성은 통도 천정부에 그려진 감통설화벽화에서 일관되게 형성돼 있다. 이 도상이 무엇을 의미하며, 왜 각 석굴의 감통설화 벽화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각 장면을 설명하는 방제가 대부분 마모된 상태이지만, 454굴에 잔존하는 방제의 내용과, 스타인본 및 펠리오본의 돈황문서 내용의 분석을 통하여, 이 괴수의 형상이 우전국(于闐國)의 우두산(牛頭山)을 표현한 것임이 확인된다.

우전국(于闐, Khotan)은 서역남로 상에 자리했던 고대국가(현 중국의 和田 일대)로 일찍부터 대승불교가 성행하였다. 당대에 편찬된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서는 “우전국에 비사문천왕을 모신 사찰이 있는데, 7층의 나무누각으로 지어졌다. 그 안에 비사문천이 모셔져 있으며 많은 영험을 보인다. 또한 이 나라에는 우두산이 있는데 천신이 와서 머물곤 한다”고 소개하였다.

비사문천왕은 우전국의 건국신화에도 관계가 있는 대표적인 우전국의 수호신이다.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우전국의 최초의 왕은 비사문천왕에게 기도를 하여 아들을 얻고, 그 아들에게 지신(地神)이 제공한 젖을 먹여 키웠다고 한다. ‘서장기(西藏記)’에서는 비사문천왕과 관련한 또 다른 건국신화를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 지역이 아직 바다였을 때, 비사문천왕과 사리불은 세존의 수기를 받고 지팡이를 이용해 바닷물을 땅 밑으로 모두 흘려보내어 육지로 만들어 사람이 살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비사문천왕과 사리불이 바다를 육지로 만드는 장면 역시 돈황석굴의 감통설화벽화에서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이다.

▲ 막고굴 454굴 통도 천정부(부분). 10세기 말. 비교적 후대에 그려진 이 벽화에서는 우두산에 자리한 가람이 보다 웅장하게 묘사되었다.

우두산은 ‘화엄경’에서도 이미 보살의 상주처로서 등장하고 있으며, 티베트장경에 수록된 ‘우전교법사’에서는 우두산이 석가모니의 화현처이자 문수보살의 도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돈황석굴의 감통설화벽화에는 우두산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관련된 돈황문서의 내용들과 454굴 벽화에 남아있는 방제의 내용을 조합해 보면 우두산은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으로부터 이동하여 설법을 한” 곳으로 소개되고 있다. ‘대당서역기’에서는 우두산을 우각산(牛角山)이라 소개한다. 두 개의 우뚝 솟은 산봉우리 사이로 가람이 있고, 그 안에 모셔진 불상이 자주 빛을 발하는 영험을 보이는데, 이곳에서 과거 여래가 설법을 하고 수기를 하였다고 전한다. 돈황석굴 감통설화장면 중 소의 머리 형상으로 묘사된 우두산의 바로 위에 자리한 좌불은 우두산의 가람에 모셔진 서상을 묘사한 것이며, 이 서상은 영축산의 석가모니 설법상을 모본으로 한 불상으로 추정된다.

돈황석굴의 불교감통설화의 장면 중 상당수가 사실상 우전국에서 유행한 서상을 소재로 하고 있어 심지어 중국 본토의 서상보다도 그 수가 더 많을 정도다. 특이한 것은 우전국 서상 중 대부분이 “코삼비국에서 전단상이 날아” 왔다거나, “석가모니 진용상이 왕사성에서 날아” 왔다거나, “석가모니불이 사위국에서 날아온” 서상이라는 등 인도에서 불상이 우전국으로 왔다고 전하는 것이다. 돈황의 불교감통설화 장면 중 우두산의 상단에 등장하는 좌불이 바로 “영취산에서 우두산 정상으로 날아온” 석가모니 불상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면 돈황의 불교감통설화 벽화에서는 왜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의 성지나 서상보다 우전국의 성지와 서상을 더 비중 있게 배치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주변 정세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당이 몰락하고 오대(五代)라는 분열의 시기를 맞이하여 돈황은 상대적으로 중원으로부터 분리된 지방정권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미 토번에게 70여년을 지배당했던 지방정권으로서는 외적을 견제할 긴밀한 동맹상대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이러한 사정은 역시 토번에게 점령당했었던 우전국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내외적으로 불안한 정국을 타파하기 위해 양 지역의 통치집단 간에 혼인관계를 성립하는 등 어느 때보다도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를 통하여 호법적 성격이 강한 우전국의 불교문화가 대량으로 돈황에 유입되었다. 토번과 인접한 돈황, 중원, 사천 등지에서 비사문천왕 신앙이 특히 유행을 한 것이나, 돈황에서 우전국의 불보살상 이외의 각종 수호신의 도상이 다량 유입된 것에는 우전국의 각종 서상들과 신이한 사적들의 소개를 통하여 당시의 불안한 정세를 안정시키려는 종교적 바람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 최고의 대승불교 중심지였던 우전국은 안타깝게도 11세기 초 이슬람국가에 점령당한 후 패망의 길에 접어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돈황에 다량으로 유입된 도상들은 다른 의미에서 중국불교에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인도에서 스스로 날아왔다는 각종 서상들과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날아와 설법하였다는 우두산 신앙은 단순히 전설에 가탁하고자 하는 얕은 속셈의 발로가 아니다. 반야에서, 화엄, 밀교에 이르는 대승불교의 발전과정의 중심에 있었던 국가로서 불교 중심지의 이동을 강력히 설파하려는 종교적 자신감이 내포된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은 이미 사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한 단계에 접어든 중국불교를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 시기 중국에서 오대산 문수보살 신앙이 성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중철 중국 사천대학 박사과정 ory88@qq.com
 

[1392호 / 2017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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