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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깨어진 석굴암의 천정돌

기자명 주수완

균열마저 아름다운 신화로 만들어 낸 신라인들의 뛰어난 문화역량

▲ 석굴암 후실 천정 전경. 가운데 둥근 덮개돌을 중심으로 주변으로 방사상으로 펼쳐진 둥근 돌들이 소위 ‘돌못’이라고 하는 부재들이다. 덮개돌은 새 조각으로 갈라진 것이 보인다.

‘삼국유사’ 권5 ‘효선’의 “대성효이세부모”, 즉 “김대성이 전생과 현생의 두 부모에게 효도하다”라는 이야기 속에서 석굴암 공사의 마지막 단계는 이렇게 기술되고 있다.

“갈라진 원형의 감실 뚜껑
천신 완성”삼국유사 기록

아치 위 얹기 전 깨졌다면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것

멀쩡한 상태 올려 졌지만
세월 흐른 후 균열 가능성

‘돌못’이라는 독특한 부재
덮개 균열에도 돔 지탱해

석굴암 균열에 대한 아쉬움
설화로 재해석 놀라운 지혜

“장차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실의 뚜껑(龕盖)을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쪽으로 갈라졌다. 화를 내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강림하여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대성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내달려가 향나무 불을 피워 천신을 공양하였다.”

원문에도 이 부분은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로 되어 있지만 아마도 “석굴을 만들고자 하여”의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문제가 된 돌은 석불상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석굴 자체를 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돌이기 때문이다. 감실의 뚜껑, 즉 원문에 “감개”라고 한 것은 아치나 돔과 같은 건축구조물의 맨 꼭대기에 들어가는 돌로서 이를 키스톤(Keystone)이라고 하는데, 이 돌이 가장 중심에서 무게를 받아 아치나 돔을 서 있게 만들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일제강점기 석굴암의 일부 무너진 천정 위쪽으로 돌못 부재가 어떻게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이 돌은 돔의 모든 부분이 다 쌓아진 다음 마지막에 중앙에 집어넣는 것이기 때문에 이 단계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석굴암 공사가 막바지 단계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돌이 깨졌다는 것은 석굴의 전체 조성에 있어 어떤 심각한 문제가 생겼음을 암시한다. 이 돌을 완성하여 얹음으로써 돔의 무게를 받기 전까지는 돔은 스스로 세워져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공사의 완결에 차질이 생겼던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돌을 천신이 나타나 완성시켜놓고 돌아갔다고 했다. ‘필조(畢造)’, 즉 ‘조각을 마치다’라고 표현했는데, 단순히 이 돌은 구조적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마치 연꽃과 연밥을 위에서 바라본 모습을 하고 있어서 정교한 조각에 가까우므로 조각을 완성했다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돌이 세 개로 갈라졌던 사실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조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결국 천신은 우선 이 세 개로 갈라진 덮개돌을 붙여놓는 작업을 한 뒤에야 연꽃 모양의 조각을 완성했을 것이다. 밤중에 자고 일어나 보니 전날 세 개로 쪼개진 덮개돌이 서로 붙어있었고, 조각까지 완성된 단계로 석굴암 건립에 참여한 장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인 셈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실제 석굴암의 이 덮개돌에 세 개로 갈라진 흔적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설화를 그대로 믿는다면 이 갈라진 돌이야말로 천신이 붙여서 조각을 완성한 바로 그 덮개돌이란 얘기다. 물론 이 설화를 그대로 믿는 독자는 별로 없을 것으로 안다. 그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 석조 축대에 사용된 돌못의 예. 경주 월정교지. 석굴암은 이 돌못을 천정에 응용한 독창적 사례이다.

우선 먼저 고민해볼 부분은 만약 ‘삼국유사’에서 기록되고 있는 것처럼 실제 이 돌이 돔의 중앙에 얹기 전에 갈라진 것이었다면 그야말로 천신이 천상의 순간접착제로 단단하게 붙여놓지 않은 이상 이를 그대로 덮개돌로 올려 사용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기술로는 갈라진 돌들을 동시에 돔의 중앙부에 끼워 넣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그렇다고 따로따로 돔의 중앙부에 끼워 넣는 작업도 사실상 구조적으로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작 공정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실제의 덮개돌은 깨어진 것을 붙여서 올린 것이 아니라 아마도 멀쩡한 상태로 돔 중앙에 끼워 넣었지만 돔을 구성하는 석재의 엄청난 무게 때문에 사방에서 강한 압력을 받아 천정에 고정된 상태에서 균열이 갔던 것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다.

실제 석굴암의 돔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돔이란 아치 구조를 회전시켜 둥그렇게 만든 천정을 뜻하는 것인데, 석굴암은 여기에 다시 독특한 돌 부재를 끼워 넣었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둥글둥글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이는 기다란 돌 부재를 마치 못을 박은 것처럼 돔 안으로 끼워 넣었을 때 못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부재를 ‘돌못’이라고도 부른다. 이 부재는 돔 밖으로 길게 튀어나오면서 일종의 지렛대 역할을 하며 돔을 보다 안정적으로 떠받쳐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렇게 돔에 첨가된 보강재가 어쩌면 석굴암 불상들을 이처럼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도록 보호해준 석굴을 지탱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석굴암 돔과 돌못의 원리를 알기 쉽게 도해한 도면. 약간 들쳐올려진 돌못이 일종의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다.

매우 특이한 이런 구조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돌못의 사용은 감은사지나 월정교지의 석조 축대에서도 일부 보이는 바가 있지만 언뜻 비슷하면서도 이를 천정에 적극 사용한 것은 석굴암에서 전무후무하게 사용된 사례이다. 때문에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즉, 석굴암은 당시의 기술로 지을 수 있어서 지은 건축이 아니라 반드시 지어야만 했기에 가용한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여 만든 첨단 공법의 집합체라는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석굴암의 돔은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즉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공사를 이루어낸 역작이라 하겠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마스터플랜은 원래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설계도상에 등장한 거대한 돔을 세울 만한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설계 자체에 매료된 피렌체 시는 성당의 본체 건물을 짓는데 만 100여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그 동안 돔을 세울 기술이 개발될 것이라 낙관하고 설계도에 따라 공사를 시작했다. 결국 돔을 제외한 성당의 본체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사망한 후 지오토 등에 의해 계승되어 우여곡절 끝에 1418년 완성되었는데, 그 당시까지도 돔을 세울 수 있는 기술은 개발되지 않았다. 때문에 돔 건설을 위한 공모가 열렸고 이때 길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가 경합하여 여기서 당선된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새로운 공법으로 결국 돔이 완성된 것이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 피렌체의 거대한 돔을 세울 수 있어서 세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세울 수 있는 기술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세워야만 했기 때문에 신공법을 개발하면서까지 완성시켰던 것이다. 석굴암 역시 그러했으리라. 석굴암이 아니면 이러한 공법을 달리 써먹을 곳도 없었을 듯하다.

역사적 시각으로 유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막상 그것이 만들어졌던 당시로 돌아가 보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해결해야할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석굴암의 덮개돌에 균열이 발생했던 것은 공사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공사가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의 사건이 아니었을까. 너무나 새로운 공법이었기에 이 덮개돌이 받는 하중이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일지 당시 건축가들은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돌못이 구조적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그 돌 자체가 누르는 하중, 그리고 석굴암 전체를 덮었던 돌무지가 누르는 하중 등을 정확히 산출하기는 어려웠기에 결국 덮개돌은 천정에 올라간 상태에서 균열이 생겼던 것 같다. 하지만 워낙에 단단한 돔이 받치고 있었기에 그러한 균열에도 불구하고 붕괴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최소 700년의 세월을 버텨온 셈이다.(그야말로 ‘삼국유사’가 쓰여진 시점으로부터 계산했을 때 700여년이니, 아마 실제로는 훨씬 긴 세월이었으리라)

▲ 피렌체의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돔(쿠폴라). 역사적인 시각으로 보면 걸작들은 만들어질 수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야 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이렇게 균열이 간 덮개돌조차 신라인일지 혹은 고려인일지 모를 당시 사람들은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들은 이 균열마저도 신화로 만들었다. ‘삼국유사’에 등장한 천신이 덮개돌을 붙여놓고 완성한 신화는 어쩌면 이 균열을 보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설화일지 모른다. 즉, 덮개돌 균열의 설화는 이 균열의 원인이었던 것이 아니라, 균열마저 아름다운 사건으로 만들고 싶었던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의 산물이었으니, 이야말로 고대 문화컨텐츠 산업의 모범인 셈이다. 특히 일연 스님이 이를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고려 이전 통일신라 어느 시기에 균열이 이미 발생했었던 것이라 막연히 짐작해본다.

지금의 관광객들이 석굴암을 찾는 것처럼, 과거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석굴암을 방문했을 때 누군가는 이 갈라진 덮개돌을 설계상의 착오, 부실공사 등으로 보고 싶었겠지만, 석굴암의 스님들은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삼국유사’의 설화를 들려주며 실은 석굴암이 부처님의 가호 아래 세워진 증거라고 일깨워주지 않았을까? 그렇다.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피렌체 두오모의 돔은 설계 당시의 이야기며, 특히나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영화의 무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컨텐츠를 지니고 있기에 더더욱 유명해졌다. 우리의 석굴암 역시 그에 버금가는 컨텐츠를 ‘삼국유사’를 통해 가지고 있다. 다만 이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높은 것 같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결국 ‘삼국유사’의 천신 설화는 그저 정말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찬하여 답한다.

명장의 공력에 천신의 마무리
누가 이를 일러 허구라 하는가
갈라진 채 버텨온 수백년 세월이
이미 고스란히 신공(神工)인 것을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94호 / 2017년 6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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