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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어미 여우 빅슨과 윤회

윤회는 중생 요청에 응답하는 종교 진리 체계

▲ 그림=근호

다음은 어네스트 시튼의 ‘동물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새끼 구하지 못해 독살한 어미
잔인하지만 부분적 공감가기도
뇌파측정기 범주 넘어선 마음
진리는 믿음을 기반으로 성립

어느 날 시튼은 그의 아저씨로부터 자기 집 양계장에서 매일 암탉이 한 마리씩 없어진다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응락을 한 다음 시튼은 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스카페이스(상처난 얼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여우가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생고생을 한 끝에 시튼은 스카페이스와, 시튼이 빅슨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스카페이스의 암여우가 사는 굴을 발견했다. 시튼은 놈들을 잡기 전에 놈들의 행동 방식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가 관찰하는 동안 암여우 빅슨은 들쥐나 참새 따위를 산 채로 잡아와 새끼 여우들에게 그것들을 잡게 하는 방법으로 훈련을 시켰다.

시튼은 여우의 생태를 지켜보기만 할 뿐 여우를 잡지는 않았다. 그러자 날마다 여우에게 암탉을 잃어버리고 있는 아저씨는 자기 사냥개 레인저와 여러 명의 사냥꾼을 동원하여 여우를 추적한 끝에 스카페이스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런 다음 빅슨을 잡기 위해 독약을 섞은 고기를 여기저기 던져 두었다. 그러나 영리한 빅슨은 그것을 먹지 않았다.

얼마 후, 사냥꾼들은 여우굴과 그 안에 있는 여우 새끼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곡괭이를 휘둘러 여우 새끼 네 마리 중 세 마리를 죽였다. 놀란 시튼은 얼른 달려가 한 마리를 구해냈다. 시튼은 새끼 여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마당의 말뚝에 묶어 두었다. 그는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 여우 빅슨이 어떻게 행동할지가 궁금했다.

밤이 깊어지자 새끼 여우가 캥! 캐앵! 하며 날카롭게 울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에 대답하는 어미 여우 빅슨의 소리가 들렸다. 몸이 묶인 새끼 여우는 안절부절 못하며 날뛰었다. 머지 앉아 어둠 속에서 장작 더미 사이로 빅슨이 나타났다. 시튼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미 여우는 주변을 조심스레 살핀 다음 새끼 여우 곁에 누웠다.

새끼 여우는 어미 여우의 젖을 빨았고, 어미 여우는 새끼 여우의 목을 매고 있는 쇠줄을 물어 뜯기 시작했다. 그러나 쇠줄이 끊어질 리 없었다. 젖을 다 먹인 어미 여우는 애처로운 모습으로 새끼 여우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때 시튼이 나타나자 빅슨은 곧 도망쳤는데, 시튼이 살펴보니 어미 여우가 씹은 쇠줄은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그 날 이후 어미 여우 빅슨은 매일 밤 새끼 여우에게 닭 한 마리를 갖다 주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그 날은 예감이 이상했다. 밤이 깊어졌을 때 어미 여우가 나타났다. 그것을 안 새끼 여우가 낑낑대며 쇠사슬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쳤고, 어미 여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새끼 여우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왔다.

그 날 빅슨의 입에는 매일 물고 오던 닭 대신에 다른 고기 한 덩어리가 물려 있었다. 빅슨은 그것을 새끼 쪽으로 휙 던졌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서서 새끼를 의미심장한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새끼는 곧 어미가 던진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펄쩍! 뛰어오르는 것이었다. 새끼는 숨을 헐떡거리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고, 허겁지겁 발로 땅을 긁기도 했다. 어미 여우 빅슨은 멀찍이서 그런 새끼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랬다. 그 고기에는 독약이 발려져 있었다. 빅슨은 새끼가 숲으로 돌아오지 못할 바에야 차리라 죽여 주는 편이 옳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어미 여우가 어디서 독약을 구했는지, 어떻게 그것을 고기에 발랐는지는 시튼으로써도 알 길이 없었다.

윤회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윤회는 하근기를 위한, 또는 고대 인도 사회라는 특정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방편적으로 설해진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현대 지식인으로서 윤회를 방편설로 치부하기는 쉽고, 진설로 믿기는 어렵다. 과학에 의해 진실과 허위가 판명되는 현 시대의 풍조에 따른다면 윤회가 진설이 되기 위해서는 진화론을 비롯한 생물학적인 검증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진화론과 생물학은 윤회를 증명하는 그 어떤 검증 결과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윤회는 방편설에 불과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문제가 아주 심각해진다. 대부분의 불교 경전이 윤회를 전제로 설해져 있기 때문에 윤회가 방편설이 되면 그 경전들 또한 방편설이 되어버린다. 그래서는 경전에 대한 신심이 성립하기 어렵고, 따라서 불교 또한 근본 바탕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따라서 윤회 문제는 현대의 불교 철학자들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답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 대안으로서 필자는 종교 진리가 ‘인간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에 착안할 것을 제안한다.

종교 진리는 인간의 요청에 응답하는 진리라는 면이 있다. 요청의 진원지는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정의(正義)에 대한 요청, 즉 선에는 선한 과보가, 악에는 악한 과보가 주어지를 바라는 요청이 있다. 또한 인간의 마음에는 백 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을, 고통으로 가득찬 삶을 초월하고자 하는 요청도 있다. 그렇지만 과학은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과학 진리에 배치되는 진리는 설 자리를 찾기 어려운 것이 현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과학은 ‘모든 문제’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과학은 물질과 생명의 ‘어떻게’에 대해서는 답하지만 ‘왜’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는다. 또한 과학은 유구한 시간 속에 하루살이처럼 짧게 살다 가는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답하지 않는다.

하나의 종교로서 불교는 생명의 ‘왜’와 ‘삶의 의미’에 대해 답하기 위해 윤회를 시설(施設)한다. 사람에게는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은 뇌파 측정기로써 측량하는 범주를 넘어선다. 과학적 측량 도구들은 단지 마음이 물질과 관련된 겉만을 측량할 뿐 그 마음의 진정한 내용인 사랑이나 초월을 측량해내지는 못한다.

축생에 불과한 여우 빅슨의 자식 사랑. 그 사랑이 자식을 죽이는 데 이르렀을지라도 우리는 빅슨의 자식 사랑에 상당 부분 공감하며, 그 공감 능력으로써 인간과 축생의 넘나듦이 가능한 윤회를 인정한다. 그럼으로써 선했지만 보상받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이(축생들이) 금생의 안타까움과 애달픔을 내생에서 보상받기를 바란다.

윤회는 그런 바람과 요청에 응답하는 체계로서의 종교 진리이며, 그 진리는 과학적 검증의 세계 밖에서 믿음을 기반으로 올연히 성립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과학과 물질 이상을 지향한다. 그 지향이 실제로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김정빈 소설가·목포과학대 교수 jeongbin22@hanmail.net
 

[1394호 / 2017년 6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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