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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길

기자명 이중남

얼마 전 암벽등반 선수 김자인이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123층을 맨손으로 올랐다. 조그마한 체구로 초고층 건물을 거미처럼 오르는 강인한 모습, 그것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환호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생중계됐다. 이로써 김 선수는 전 세계 여성 가운데 가장 높은 건물(555m)을 맨손으로 등반한 주인공이 되었다고 한다.

완등에 성공한 뒤 김 선수가 한 인터뷰 동영상은 SNS에 널리 공유되며 많은 이들에게서 ‘좋아요’를 받았다.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국민들께, 도전하고 또 성공하는 제 모습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등반에 임했습니다.” 동영상을 살펴보니, 그 높은 건물을 오르는 내내 그의 뒷머리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노란 리본이 커다랗게 매어져 있었다. 울컥했다. 그래, 민주주의다.

‘촛불혁명’은 사전적 의미로는 혁명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혁명은 헌법의 틀을 깨는 정치변동을 일컫는다. 그런데 지난 겨울 내내 광화문을 밝혔던 촛불 시민들은 철저히 헌법의 틀 안에서 제반 법규가 규정하는 절차와 요건을 준수하면서 극적인 정치변동을 일구어 냈다. 민주주의는 그로 인해 위기를 맞기는커녕 가일층 견고해졌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 시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은 새삼 놀랍다. 지난해 10월말부터 범국민행동이 주최한 20차에 걸친 촛불집회는 자발적인 참가 인원이 연 1600만을 넘어 그 규모만으로도 세계에 유례가 없다. 처음에 광장에서 수렴되기 시작한 민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의사당으로, 헌법재판소로, 그리고 마침내 장미 대선에 이르기까지 무려 8개월의 장도 여정을 거치는 동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예혁명을 이룩한 것이었다.

새 정부는 촛불 민심이 요구한 적폐 청산, 일자리 창출과 경제 양극화 해소, 외교안보 현안 해결, 한반도 평화구축 등 중차대한 숙제를 안고 출범했다.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시민사회와의 소통은 향후 주요 정책의제들을 구체화하고 실행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다. 국민을 신민(臣民)으로 취급했던 불통의 세월이 오래였던 만큼, 소통의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크다. 마침 시민사회 진영에서는 새 정부 출범을 전후해 각종 제안과 주장들을 활발하게 쏟아내고 있다. 이 같은 시민사회의 활발한 참여에 대해 일각에서는 ‘민주주의 과잉’을 운운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런데 그 용어는 신생(新生) 민주주의에서 흔히 나타나는 정치적 혼란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 즉 권위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직후, 제도는 아직 미비한데 민중들로부터 과다한 요구가 분출하는 병리적 현상을 뜻한다. 그런 용어를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정치를 논하는 자리에서 들먹이는 것은 미숙한 일이다.

오히려 새 정부는 이전 어느 정부보다도 국정 의제 설정과 집행에 관해 시민들의 의견을 경청할 책무가 크다. 과거에 치러진 모든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들은 선거 전에 충분한 기간을 두고 공약집을 발행해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잘 알린 상태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니 나중에 ‘하자’가 발견된 경우, 충분히 숙고하고도 그것을 선택한 소비자에게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었다. 반면 이번 장미 대선은 워낙 촉박해, 캠프 담당자들조차 자기네 정책이 뭔지 잘 모르는 채로 끝났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신임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촛불 민심의 요구에 부응해 올해의 사자성어로 “나라를 다시 만든다”는 뜻의 재조산하(再造山河)를 제시한 바 있다. 아마도 그 과업은 적폐를 청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혹한에도 불구하고 매주 토요일 밤 광화문을 가득 메웠던 촛불 하나하나가 품었던 분노와 소망, 정책집도 제대로 갖추진 못한 후보를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구호만 믿고 지지해 준 이들의 신뢰를 늘 기억하며, 시민들과의 충분한 의사소통을 통해 함께 살 만한 나라를 만들어 가기를 기원한다.

이중남 마하이주민지원단체협의회 운영위원 dogak@daum.net

[1395호 / 2017년 6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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