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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안중근의 심일경(心一境)

총을 쏜 후 서있는 모습은 마치 신과 같았다

▲ 그림=근호

1909년 10월2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을 떠난 우편 열차는 다음 날 저녁 9시에 하얼빈에 도착했다. 그 열차 안에는 보다 큰 것 앞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의한 세 사나이가 타고 있었다.

무인이자 교양인 안중근 의사
약지 자르고 독립운동 결의
독립 넘어 ‘동양 평화’ 발원
불제자로서 심일경 돌아봐야

이틀 뒤인 10월23일. 또 한 명의 의기남아 조도선을 합류시킨 안중근 일행은 조선 침탈을 주도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가 동청철도 총국의 특별열차 편으로 관성자 역을 출발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토의 하얼빈 방문 목적은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한국, 만주, 몽골 지배에 관한 회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안중근은 무인이었고, 동시에 인간의 마음을 가진 교양인이었다. 이범윤이 이끄는 의병부대의 참모중장으로서 300명의 동지와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 안중근은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다음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해준 일이 있었다. 국제법이 그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병 동지들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동지들이 그 다음 전투에서 이탈했고, 그래서 안중근은 다음 전투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법 실천과 맞바꾼 패전, 더 높은 시야를 가진 사람이 반드시 거치게 마련인 시련이었다.

그러나 그럴 가치가 있다고 안중근은 믿었다. ‘나의 목표는 일본군을 무찌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일본군을 무찔러야 하는 것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이며, 더 나아가서는 동양 평화를 위해서이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얼빈의 경계가 삼엄할 것으로 판단한 안중근과 그의 동지들은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교차점인 채가구에서 거사를 결행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토가 채가구에서 내리지 않는다면? 더군다나 열차가 그곳에 도착하는 시간은 새벽 여섯시 경, 거사를 하기에는 너무 어두운 시각이었다.

다시 의논한 끝에 채가구는 우덕순 등이 맡고, 안중근은 하얼빈을 맡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안중근은 채가구에서 오후 두시 북행 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민족의 원수, 동양 평화의 저해자 이토 히로부미와 마주치게 된다.

그때 안중근이 흥분하고 있었을까. 아니었다. 그는 흔들리는 여린 풀이 아니라 큰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바위였다. 마음은 둘로 나뉠 때 요동치지만 하나일 때는 담담해진다. 가톨릭 신자 토머스이기에 앞서 공자의 제자로서의 선비였던 그의 정신은 하나로 밝게 통일되어 있었다.

“소인은 이로움에 밝고, 군자는 의로움에 밝다”고 ‘논어’는 말한다. 이어서 ‘논어’는 “군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거늘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말한다.

다시 ‘논어’는 말한다.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라야 소나무 · 잣나무가 더디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안중근은 송백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가 유묵(遺墨)으로 남긴 ‘견이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로움을 볼 때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 앞에서는 목숨을 바친다”는 이 구절 또한 ‘논어’에 있는 잠언이다.

아내가 있었다. 열일곱에 만나 13년을 함께 한 아내였다. 자녀가 있었다. 어린 두 살, 네 살짜리 핏덩이들이었다. 그러나 그 이로움과 사사로움은 의로움과 공공의 이익 앞에서는 아주 작은 것이었다.

단지동맹(斷指同盟). 김기룡, 황병길 등 열두 동지가 약지를 자른 후 독립운동을 결의한 것이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그들이 자른 것은 손가락 한 마디가 아니었다. 그때 잘려나간 것은 이로움이었고, 그 잘려진 공간을 채운 것은 의로움이었다.

10월26일. 이미 채가구와 장춘 역에서의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동지의 이토 저격 계획이 미수에 그친 다음이었다. 마지막 기회를 살리느냐 마느냐는 하얼빈의 안중근에게 달려 있었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마친 다음 열차에서 내려 플랫폼 쪽으로 걸어들어왔다. 안중근은 흥분하지 않았다. 이런 때는 분노나 의열조차도 싸늘히 식히는 것이 좋다. 침착한 마음, 의연한 정신, 또렷한 의식. 안중근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뽑아 이토를 겨누었다.

탕! 탕! 탕!

명중이다. 가슴에 두 발, 세 번째 총알은 복부에 박혔다. 허리가 푹 꺾기우면서 이토가 바닥에 쓰러졌다. 안중근은 연이어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까지 명중시켰다. 단 한 발도 빗나가지 않았다.

안중근은 뒤돌아서지 않았다. 발자국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을 활짝 펴고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 코레아 우라!”하고 그는 외쳤다.

뜻밖에도, 그 장면을 기록한 것은 적국의 사람, 안중근으로부터 총을 맞아 부상을 입은 만주철도 이사인 다나카였다. 그는 그가  본 안중근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가 총을 쏘고나서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신(神)과도 같았다. 그것도 음산한 신이 아니라 광명처럼 밝은 신이었다. 그는 참으로 태연하고 늠름하였다. 일찍이 그같이 훌륭한 인물을 본 적이 없다.”

오, 자기가 쏜 총에 맞은 사람의 눈에 신으로 비쳐졌던 사람, 안중근!

대승불교는 일심(一心)을 설한다. 일심은 하나의 마음(한 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큰 마음(한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재 한국 불교에는 큰 마음으로서의 일심에 대한 몇 가지 견해가 난립해 있다. ‘대승불교의 총론서’라 일컬어지는 ‘대승기신론’이 큰 마음으로서의 일심을 중심으로 사상을 전개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일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일된 견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만 ‘한마음’이 아닌 ‘한 마음’으로서의 일심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통일된 하나의 마음을 심일경(心一境)이라 하고, 심일경은 삼매를 낳으며, 삼매를 통해 깨달음이 성취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다르지 않다.

거사의 현장에서 안중근은 심일경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그가 누군가를 저격한 문제는 둘째로 치고, 한 사람의 불제자로서 나는 거사 현장의 그에게서 심일경의 경지가 어떤 모습으로 몸을 통해 발현되는지를 본다. 그의 몸은 적의 눈에도 빛을 뿜는 광명의 신으로 비쳤다. 이는 그의 심일경이 진실로 밝고 맑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안중근에 비할 때 나의 일심은 과연 어떠한가, 라고. 나는 얼마나 사사로움을 떠나 있는가, 라고. 불제자로서의 나의 심일경은 어느 지경에 이르러 있는가, 라고.

김정빈 소설가·목포과학대교수 jeongbin22@hanmail.net
 

[1395호 / 2017년 6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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