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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문명의 역사는 인간 야망의 역사

기자명 김용규

고립과 단절, 연결 중 어느 쪽에 진짜 행복이 있을까?

인간이 자기 아닌 것들로부터 인간 스스로를 고립하고 단절해 온 역사는 문명의 가속화와 정비례합니다. 그 고립과 단절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인류는 최초 사바나 숲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스스로를 그 고향, 숲과 단절하고 고립을 택하는 방향으로 진행해 왔습니다. 인류는 끝내 자신들이 자연과 하나이자 그 일부에 불과하다는 의식을 벗어버렸습니다. 확실한 것에 대한 강박적 추구를 본능처럼 가진 과학이 인류 문명에 기폭으로 작용하면서 인류에게 숲과 자연은 그저 자원의 지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과학기술 숲과 자연 자원으로 취급
안전·편리한 삶 추구는 고립 유발
결국 많은 불안·위험 속에 살게 돼
연결 택하면 삶은 더욱 풍요로워져

문명의 역사는 어쩌면 확실한 것, 보다 편리한 것, 더욱 빠른 것을 추구하는 인간 야망의 역사인지도 모릅니다. 인류의 그런 야망 앞에서 모든 타자는 결과적으로 그저 대상이며 자원에 불과하다는 지위가 주어졌습니다. 자원으로 간주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과 착취는 무참했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에서 사막으로 이미 변했거나 변해가고 있지 않은 곳이 어디 인가요? 숲은 난도질 당해왔고 물은 가로막혀 제 운행의 시간과 길을 따라 흐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해졌습니다.

우리의 문화마저 타자에 대한 연결보다는 단절과 고립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예컨대 안전과 편리를 거주의 가치로 내건 주거 공간은 더더욱 철저한 단절과 더 완벽한 고립의 문화로 상품화 돼 가고 있습니다. 서울의 어느 지인이 사는 최첨단 아파트에 하루 묵을 일이 있을 때 나는 카드 키가 없으면 엘리베이터를 움직일 수도 없게 만들어 놓은 그 보안 시스템에 당황하여 처음에는 놀랐고 나중에는 숨이 막혔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점점 더 그렇게 단절과 고립의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실물계의 단절과 고립이 정신적 소외감과 고독을 불러오기 때문일까요? 내 눈에는 이 시대 사람들이 사이버 세계에 무수히 많은 저마다의 독백을 쏟아내고 그 독백에 또 다른 이들이 각자의 독백을 보태면서 그렇게라도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위안을 찾고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더 안전하고 편리한 것이 좋은 삶이라는 일상의 무의식이 우리에게 고립과 단절의 방향을 부추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오며 좋은 삶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애초 더 많은 것들과 연결되어 있던 것을 끊어냄으로써 얻고자 했던 가치는 편리와 속도, 그리고 안전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립과 단절의 결과로 더 많은 불안, 더 심각한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하는 상태를 초래했습니다. 자물쇠는 더욱 튼튼해져야 하고 무기는 더욱 경쟁적으로 첨단화 돼야 하며 테러에 대한 감시는 그 감도를 끝없이 높여가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작게 시작한 고립과 단절이 더 크고 강력한 고립과 단절을 낳는 악순환이 일상과 세계 질서에 만연한 상황인 것이지요.

최근 ‘좋은 삶은 어디 있는가?’라는 주제로 자주 대중 강연을 하고 있는 나는 그래서 좋은 삶은 고립과 단절보다는 더 많은 것과 나를 연결하고 살 때 찾아든다는 주장을 해왔습니다. 이를테면, ‘비와 단절의 벽을 쌓은 사람들은 쏟아지는 비를 출근이나 퇴근길을 방해하는, 그저 피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삶을 살게 된다. 비에 연결된 사람은 빗소리 들으며 그 사람과 파전에 막걸리 한 잔 나눌 생각을 떠올린다. 시간과 단절된 사람들은 봄꽃을 보고 그저 예쁘다, 한 살 더 먹나보다, 이렇게 여기지만 시간과 삶을 온전히 연결하고 봄을 맞는 사람들은 사방 봄꽃이 피면 저기 꽃 피네, 환장하겠네, 이렇게 시인처럼 봄과 대면한다. 그렇게 고립과 단절의 방향보다 연결의 길을 택하는 삶은 더욱 풍요해진다는 식의 주장’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가 내게 물었습니다. ‘더 많은 것에 나를 연결하고 살면 그런 아름다운 감정 말고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때도 많잖아요? 힘들고 귀찮고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연결되는….’ 나는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은 나쁜 것일까요?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삶이 정말 좋은 삶일까요? 내 슬픔이나 타자의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만 사는 세상, 무엇인가에 분노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만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될까요? 그것이 좋은 삶이고 좋은 세상일까요?’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립과 단절, 혹은 연결 중 어느 쪽에 더 좋은 삶이 있을까요?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95호 / 2017년 6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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