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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은 불교의 무아론”

▲ 불교 무아론을 강의한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가 국회 정각회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불교의 무아·연기론은 진화론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제가 볼 때 불교의 무아론이라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입니다. 언제인가 과학자들을 상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 무엇인지’를 묻는 앙케이트를 한 게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인 것 같습니까? 진화론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진화론은 좀 어설퍼 보이지만 그게 최고의 발견으로 뽑혔습니다. 진화론이라는 것은 결국 몸의 무아론을 증명한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무아론이라는 것은 마음의 무아론입니다. 부처님은 얘기하실 때 몸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를 안 하셨습니다. 마음, 즉 수상행식에 대해서 얘기하셨지 색에 대해서 얘기하신 게 없어요. 마음에 대한 무아를 얘기한 게 불교의 무아론입니다. 당연히 마음에 대한 무아를 얘기한 게 훨씬 더 위대한 일이지요. 부처님의 무아론은 다윈의 진화론에 비해 2300년 앞선 이론입니다. 만약 노벨상을 우리가 만들었다면 노벨상이라기보다는 ‘부처님 무아상’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위대한 발견을 하신 겁니다.

진화론, ‘몸의 무아론’ 증명
불교무아론은 ‘마음의 무아’
2300년 앞선 무아론 더 위대

4만년 전의 크로마뇽인들도
현 인류와 같은 뇌구조 가져
삶 차이는 문화가 갖는 힘

유신론은 개인 구원만 강조
대승불교는 함께 가자는 것
연기·무아론에 관심 가져야

부처님이 얘기하신 무아, 연기 이런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곧 불성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고 할 때 그 불성이 바로 지혜거든요. 이것을 진화론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이나 뇌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4만여년 전인 크로마뇽인 시대의 인간은 현 인류와 거의 같은 수준의 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두개골을 조사해 보거나 두개골 구조로 미루어 뇌의 구조를 짐작해 보면 그런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크로마뇽인의 아이를 현 시대에 데리고 와서 교육시키면 국회의원도 되고 판검사도 되고 교수도 되고 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스마트폰도 못 만들고 냉장고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약도 없이 그렇게 살았을까요? 그것은 문화의 부재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대한민국 어린이 100만명을 엄청나게 큰 무인도에 데려다 놨다고 합시다. 거기에 먹을 것이 있어서 그 아이들이 생존한다고 하면 과연 이런 문화를 다시 이룰 수 있을까요? 아마 못 이룰지도 모릅니다. 문화라는 것은 선대가 축적을 하고 그걸 후대에 물려줌으로써 유지되거든요. 마찬가지로 크로마뇽인에게는 그걸 전해줄 선배가 없었던 거예요. 지금도 석기시대 문명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의 부시맨이나 뉴기니의 원시인들이나 아마존의 야노마미족을 보면 여전히 현 시대의 인류하고는 전혀 다르게 거의 수만년 전 시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냥 석기시대로 삽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그 아이들도 현대 문명에 데려다 놓으면 똑같이 적응을 합니다.

그러면 이게 뭘 얘기하느냐? 이미 4만년 전의 인간에게도 불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즉 무아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거지요. 단지 그들에게 연기법이나 무아를 깨달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몰랐다는 거지요. 그게 바로 제가 새롭게 해석하는 불성의 뜻입니다.

그런데 4만년 이후 부처님이 최초로 나오셔서 우리에게는 연기법을 깨달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자신이 그걸 깨닫고 우리에게 나눠준 거지요. 그래서 승가가 형성이 되고 그 승가를 통해서 깨달음의 전통이 이어지면서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문화의 위대성이 있는 거지요.

불교에서 인간은 오온이라고 그럽니다. 오온의 모임, 오온의 쌓임이라고도 하지요. 무릇 만나면 헤어지고, 모인 것은 흩어집니다. 우리가 죽으면 오온이 흩어지지요. 그런데 살아 있을 때도 오온이 분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아까 얘기를 드렸듯이 수상행식이라고 할 때 수상행식이 분리가 될 수 있습니다. 수와 행이 분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수는 보통 좋다 나쁘다 하는 감정으로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감정과 의지가 분리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내가 누구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면 굉장히 재미있고 좋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혼자 있을 때는 ‘드라이브를 할까’라는 의지가 잘 안 생깁니다. 그런 현상이 생깁니다. 왜 그러냐면 감정과 의지를 담당하는 부위의 연결이 부실하거나 한쪽에 고장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안 생깁니다. 감정이 있는 변연계와 의사결정을 하는 전두엽, 그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회로가 좀 부실해지거나 그중에 하나가 고장이 나면 거짓말처럼 그런 의지가 사라집니다. 사고로 뇌가 상한 사람들의 경우는 감정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소위 감정이 분리가 가능하다는 이런 얘기가 됩니다.

또 하나는 해마의 예를 들 수가 있는데 해마는 기억을 담당합니다. 좌우에 해마가 2개 있거든요.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해마가 고장이 나면 기억이 얼마 못 갑니다. 다음날 그 전날의 것을 기억 못합니다. 영화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1000번째 키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프러포즈를 하면 여자가 좋다고 승낙합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우리 결혼해야지요’라고 하면 ‘댁이 누구시더라?’라고 말합니다. 그게 1000일간 되풀이 되는 거예요. 1000일 동안 사랑에 빠지고 키스를 하고 프러포즈를 하고 그게 1000일이나 되풀이되는 거예요. 해마가 파괴되면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치매가 대표적인 일이지요. 저희 어머님도 치매, 장인어른도 나중에 치매 걸리셨는데 직접 당해 보면 절감을 하지요.

그다음은 언어입니다. 언어에는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이라고 있습니다. 이 두 영역이 고장 나면 말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브로카 영역은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역할을 하고, 베르니케 영역은 말을 알아듣고 글을 읽고 이해하는 역할을 합니다. 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한쪽이 망가지면 그 기능만 딱 사라집니다. 마치 자동차 부품 망가지면 그것만 딱 망가지듯이 그렇습니다. 이런 게 분리가 가능하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그런데 불경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보면 5위75법이라고 일체만물을, 법을 구분한 게 있습니다. 그중에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에서 구신(句身)이라는 게 있습니다. 구신이 바로 말을 하고 쓰고 이해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또 2개가 있는데 명신(名身)과 문신(文身)이 있습니다. 명신은 단어를 쓰는 기능, 문신은 말을 할 때 쓰는 기능입니다. 가령 ‘사과다’라고 하면 ‘사과’ 하는 음소의 기능을 하는 게 문신입니다.

현대 뇌과학에서 정확히 그런 부위가 있다는 걸 밝힌 게 언어중추입니다. 브로카 영역, 베르니케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설일체유부라고 하면 법체항유(法體恒有)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아공법유(我空法有), ‘나는 공하고 무아이지만 법은 존재한다’고 얘기를 해서 설일체유부를 좀 낮추어 보는 경향도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상당히 괜찮은 이론들도 많습니다. 현대 뇌과학에서 얘기하는 것을 미리 내다봤다고 할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불법을 인구측면에서 봐야 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유신론(하나님이나 신을 믿는 종교)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굉장히 개인적인 현상입니다. 이 우주가 다 망해도 자기 혼자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의로운 사람 한 사람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다 소금기둥이 된다든지, 불로 벌을 받는다든지, 이런 얘기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불교에서 구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게 아닙니다. 저는 그게 대승불교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큰 수레’라는 게 같이 가자는 것이거든요. 불경에서 간혹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 얻을 때 모든 중생이 같이 깨달음 얻었다고 합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문관에는 왜 가고, 3000배는 왜 하는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인구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볼 수 있느냐하면, 제가 아까도 얘기를 했지만 무인도에서 살면 절대 현대 문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35억년 전에 맨 처음 지구상에 단세포가 생겼습니다. 그 단세포가 다세포로 변합니다. 그다음에 다세포가 몸을 여러 개 늘리는 분신을 합니다. 바로 새끼를 낳는 거지요. 그다음에 그 개체들이 다 모이면 사회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 사람들이 가진 아이디어가 짝짓기를 합니다. 이건 제 표현이 아닙니다. 매트 리들리라는 유명한 학자가 한 얘기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새로운 생각이 막 나옵니다. 다시 그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여서 또 놀라운 생각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곧 무엇을 얘기하느냐? 인류 전체가 하나의 의식체라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 전체가 하나의 새로운 사상과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인류가 처음 나올 때 그 수준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했다면 깨달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없을 것이고 불교적인 전승이나 여러 불경이나 이런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마 사자, 호랑이, 늑대에게 쫓겨 다니느라고 바쁠 겁니다. 쫓겨 다니기 바쁜데 언제 사유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류는 이런 커다란 집단을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 생각을 공유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놀라운 문화도 이루고 하면서 깨달음도 생긴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봐야 되느냐 하면 승려들이나 스님들의 집단은 소위 어떻게 하면 번뇌를 없애나 하는 것을 전문화하는 겁니다. 그리고 속인들은 뭐를 하는가? 속인들은 승려 집단을 제공하는 거지요. 의식주도 제공하고 결혼해서 승려가 될 사람을 만드는 거지요. 그래서 흔히들 종교에서는 자꾸 사람들의 삶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제가 볼 때는 동등하다는 겁니다. 출가자 집단과 재가자 집단이 분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재가자 집단은 그 분업의 역할을 충실히 해서 애도 낳고 그 애를 훌륭하게 키우고, 그래서 훌륭한 스님도 제공하고 그다음에 농부도 키우고 기술자도 키우고, 그래서 세상을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면 더욱더 훌륭한 승가도 나오고 그러겠지요. 결국은 우리 재가자들이나 혹은 불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연기론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내용은 강병균 교수가 5월17일 국회불자모임인 정각회 초청 강연회에서 ‘무아론’을 주제로 강의한 것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1396호 / 2017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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