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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론 ②

한국불교, 동아시아라는 큰 흐름서 이해하려는 노력 필요

▲ ‘화엄연기회권-원효회’ 부분, 가마쿠라 시대, 교토 고잔지 소장. 원효대사가 여러 스님들을 대상으로 설법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 가운데서 회통불교론에 대한 이해는 여러 불교학파 사이의 사상적 대립과 통합, 교학불교와 실천불교 사이의 갈등과 조화, 같은 실천불교로서 선과 염불의 갈등과 조화 등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원효(元曉)의 불교를 회통불교의 연원으로 인식할 때, 원효불교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효 당시의 불교계 상황과 사상적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또한 다음 시대 원효불교의 계승과정을 추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불교학계는 한국불교사에서 신라의 원효·고려의 의천(義天)과 지눌(知訥)·조선의 휴정(休靜) 등 몇 사람만의 불교를 특히 주목하여 통합불교적인 내용을 지적하고, 그러한 특성이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일관되어온 회통불교 전통으로 이해하여 왔다.

원효 등 몇 사람만 주목해서
한국불교 특징 삼는 건 문제

임제종이 불교 주류 되면서
원효불교 오랫동안 잊혀져

한국불교사와는 대조적으로
중국과 일본에선 크게 주목

통불교, 한국만의 특성 아닌
일본불교에도 나타나는 특징

통불교론 포함 넓게 고찰해야
한국불교 특성 제대로 파악

그러나 각 시대의 불교계 상황과 사상적 과제, 그리고 각 인물의 문제의식과 지향점이 같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안이하게 일관된 전통으로 체계화시키기에는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에 앞서 각 시대별 불교계의 상황과 각 인물별의 사상의 차이점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원효불교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는 한국불교의 전개과정에서 원효가 어떻게 계승되었고, 평가되어 왔는지, 또한 원효불교가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등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원효는 7세기 중반 삼국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여 불교사상의 통합과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원효의 활동은 당시 삼국통일 작업에 전념하던 문무왕에 의해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귀족적인 불교계로부터는 상당한 비판과 배척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교단조직을 통한 불교활동을 거부한 원효의 불교는 사후에 제대로 전승되지 못하였고, 9세기 중반부터는 거의 잊혀갔다. 원효불교는 11세기 후반 의천에 의해 재발견됨으로써 비로소 그의 저술이 수집 간행되었고, 통합불교의 대성자로 새롭게 평가되어 화쟁국사(和諍國師)로 추봉되었다. 아울러 고려중기의 주류적 종파인 화엄종·천태종·법상종 등에 의해서 경쟁적으로 각 종파의 조사(祖師)로 추앙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이후에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이 불교계의 주류로 새롭게 대두하면서 원효불교는 다시 잊히기 시작하여 오랫동안 단절되었다. 원효불교는 20세기 전반에 와서야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아 불교계에 다시 등장하였다. 불교학계에서는 권상로·이능화·정황진(鄭晄震)·김영주(金瑛周)·김경주(金敬注)·허영호(許永鎬), 일반 문화계에서는 장도빈(張道斌)·조소앙(趙素昻) 등 일부 인사들에 의해 원효의 불교가 재평가되어 그의 행적·저술·사상 등이 새로이 조사 연구되었다. 그리고 최남선에 의해 비로소 원효가 통불교의 완성자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나아가 회통성이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을 정의하는 개념으로 확대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불교사에서 원효에 대한 평가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원효불교의 전승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과 달리 중국불교사와 일본불교사에서는 일찍부터 원효가 크게 주목을 받고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중국불교계에서는 일찍부터 원효의 저술이 법장(法藏)·징관(澄觀)·이통현(李通玄) 등에게 읽혀져 중국 화엄학의 성립과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또한 일본 불교계에서는 나라(奈良)시대의 신쇼(審祥)가 원효의 저술들을 열심히 수집하고 있었고, 교기(行基)의 불교 행적에서 원효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인된다. 또한 8세기말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薛仲業)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는 일본의 대표적 문인이었던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에게 크게 환대받고 있었다. 그리고 가마쿠라(鎌倉)시대의 묘에(明惠, 1173~1232)는 원효의 행적을 의상의 것과 함께 두루마리의 그림(‘華嚴宗祖師繪傳’)으로 그리게 하였고, 특히 삼국불교전통사관(三國佛敎傳通史觀)의 제창자인 교넨(凝然, 1240~1321)은 자신의 저술에 상당 부분 원효를 인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아 원효가 일본 불교사에서 지속적으로 대단한 존숭을 받아 왔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래 통불교라는 개념은 한국불교사에서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며, 이미 일본불교계에서 사용되던 것을 빌려온 것이라는 점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흔히 일본불교의 특징은 종파불교로서 한국의 회통불교와 대비시켜 이해되고 있다. ‘전수염불(專修念佛)’ ‘선택(選擇)’ ‘제목(題目)’ ‘지관타좌(只管打坐)’ 등의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각 종파마다 특정의 내용이나 요소만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였지만, 또한 ‘팔종겸학(八宗兼學)’ ‘일체경(一切經)의 열독(閱讀)’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불교교학의 겸학과 총체적 파악을 추구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특히 20세기 초기에는 종파의식을 뛰어넘는 ‘통일불교론(統一佛敎論)’의 제창이 곧 근대불교학의 성립으로 나타났음은 물론이다.

한편 중국불교사의 전개과정은 크게 보아 한국불교사의 그것과 같은 방향으로 이루어졌는데, 교학불교에서 종파불교로, 그리고 다시 종파불교에서 실천불교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불교학파의 통합, 교학과 실천의 조화 등이 추구되어 한국불교에 영향을 주었으며, 때로는 반대로 한국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이로써 통불교론을 한국불교만의 특성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며, 다른 민족과 지역의 불교와 비교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한국불교사상사의 전개과정을 한반도라는 지역을 벗어나 동아시아불교사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 서술하려는 방향으로 우리의 문제의식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이제 한국불교사의 연구에서 한국불교라는 우리 속에 갇혀 통불교론을 한국불교 우수성의 논거로 삼아 왔던 인식을 바꿀 때가 되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불교사의 커다란 맥락 속에서 통불교의 의미를 추구할 때, 유용한 학술개념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회통불교론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면서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담론의 출발점을 마련한 최남선의 ‘통불교론(通佛敎論)’을 다시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최남선의 ‘조선불교(朝鮮佛敎)-그 동방문화사상(東方文化史上)에서의 지위(地位)-’는 1930년 7월21~26일 미국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태평양불교청년회의에서 발표하기 위해 집필된 원고였다. 실제 이 글은 최봉수(崔鳳秀)가 줄여서 영문으로 번역하고, 도진호(都鎭鎬)가 이 회의에 참석하여 팸플릿 형태로 배포하였다.

이 논문은 최남선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작성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는데,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아류 정도로 평가하던 일본의 관학자들을 질타하고 한국불교에 무지한 서양인들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 최남선은 동서교통로 위의 한쪽 종점인 한반도가 모든 문화의 최후 정류지가 되는 문화사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 논문을 시작하였다. 오늘날 최남선의 본래 의도와 시대적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을 정의하는 개념으로서 ‘통불교론’의 타당성 여부만을 문제 삼아 논란을 계속하고 있으나, 이 논문의 의의와 가치는 다른 데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불교사관의 심층적인 뿌리가 된 삼국불교전통사관에 입각한 당시 일본인의 불교사 인식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으로 제창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남선은 먼저 동서문화 교류의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인도에서 성립된 불교가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전파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어 동아시아불교사에서 삼론종의 승랑(僧朗), 유식종의 원측(圓測), 화엄종의 의상(義相) 등의 역할을 지적한 다음 불교역사상의 원효(元曉)의 업적을 대서특필하였다. 원효는 불교의 교학을 이론적으로 종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론과 실천을 융화하고, 또한 대중적 불교로 전환시킴으로써 일승적(一乘的) 불교의 최후 완성자(完成者)가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원효의 불교는 불교적 구제(救濟)의 실현인 일면에 다시 통불교(通佛敎)·전불교(全佛敎)·종합불교(綜合佛敎)·통일불교(統一佛敎)의 실현인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최남선은 일본의 불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일본불교의 우수성 주장의 논리적 근거가 된 삼국불교전통사관(三國佛敎傳通史觀)의 이해체계를 빌려와서 일본불교의 자리에 한국불교를 대치시킴으로써, 인도와 서역의 서론적(緖論的) 불교, 중국의 각론적(各論的) 불교에 대하여 한국의 불교는 최후의 결론적(結論的) 불교라고 주장하였다. 최남선은 일본 불교학의 역사인식과 방법론을 빌려 삼국불교전통사관이라는 일본 불교학의 역사인식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논리적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최남선은 한국불교 자체 우수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석굴암을 비롯한 불교 예술작품의 우수성과 불교경전 간행의 업적을 지적하였다. 또한 한국이 일본의 고대문화와 일본불교에 끼친 영향을 강조함으로써 일본의 불교문화가 한국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내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이 조선만의 조선이 아니라 전체 동방의 조선, 아니 세계의 조선임을 불교사상으로도 인식함은 동방의 비밀을 깨뜨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최남선의 ‘통불교론’은 그 자체의 타당성 여부보다는 삼국불교전통사관에 입각한 일본의 식민지불교사학의 역사인식에 대항하여 아시아 불교사에서 한국불교의 위치를 새롭게 정립시키려는 논거로서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일본 불교사학이 삼국불교전통사관에 입각한 불교사의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 최남선의 주장은 아직 살아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가마쿠라시대의 교넨이 창안하고 메이지시대의 무라카미 센쇼가 계승 발전시킨 삼국불교전통사관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일본에 와서 완성되었다고 하는 주장으로서, 일본불교를 궁극에 두는 일종의 교판론(敎判論)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불교 우월의 교판론은 식민지사관에서 한국불교의 모방성과 종속성의 담론이 형성되는 배경을 이루는 심층의 인식틀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화 과정에서 일본 중심주의를 뒷받침하여 대동아공영권 아래 국수주의의 논리를 제공하여 적극적인 대외침략전쟁에 협력하는 전시교학(戰時敎學)을 성립시키게 하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397호 / 2017년 6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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