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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찬란한 화엄의 세계-화엄경변상도

기자명 정진희

난해한 ‘화엄경’ 내용 쉽고 명료하게 표현

▲ 화엄경변상도, 조선 1770년, 비단에 채색, 281×255㎝, 송광사 성보박물관 소장, 국보 314호.

순천 송광사 성보박물관이 새롭게 문을 열면서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소중한 불교 보물들을 전시하였다. 그 많은 유물들 가운데 불화를 전공하는 필자가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화엄경’의 내용 가운데 정수만을 간추려 요점 정리하듯 그린 ‘화엄경변상도’이다. 1770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미타회(彌陀會)라는 불교결사단체가 발원하여 무등산 안심사에서 화련 스님을 비롯한 12명 화승들의 참여로 제작이 되었고 그림이 완성된 이후 송광사로 옮겨와 소장되고 있다.

화엄종사 활동사찰 중심으로
18세기~19세기 많이 그려져
화엄사상 고취 시대상 반영
지역·시대에 따라 도상 변화

우리가 ‘화엄경’이라 말하는 경전은 부처가 되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하는 원인들과 그것에 의해 성취되는 갖가지 공덕을 설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경전의 권수에 따라서 40화엄, 60화엄, 80화엄으로 나뉘며 경을 설한 장소(處)와 경을 설하는 모임(會)에 따라 60화엄은 7처8회, 80화엄은 7처9회로 구분 지을 수 있지만 내용이 크게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그려진 ‘화엄경변상도’는 80화엄에 따라 7장소에서 9번 화엄법회를 열었던 모습을 그림으로 도해하고 있어 ‘화엄회도’ ‘화엄7처9회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1765년에 만들어진 김룡사 화장암을 비롯하여 1770년 송광사, 1780년 선암사, 1790년 쌍계사 그리고 19세기 초반에 그려진 통도사 작품이 남아 있었다. 아쉽게도 18세기 만들어진 네 점의 작품 가운데 김룡사의 작품은 기록만 남겨진 것이고 선암사, 쌍계사 소장의 ‘화엄경변상도’는 도난을 당해 현재 남겨져 전하는 작품은 송광사 소장본뿐이어서 2009년 이 작품은 국보 제314호로 지정되었다.

난해한 ‘화엄경’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쉽고 명료하게 보여주는 ‘화엄경변상도’가 이 시기 다수 만들어지고 있었던 사실은 화엄사상에 고취되었던 당시 분위기를 잘 전해준다. 선사상을 중심으로 교리와 염불을 수행방식으로 삼고 있었던 조선후기, 승려들의 교육기관이었던 강원에서는 대교과의 교과목인 ‘화엄경’ 강의가 성행하였고 경전을 해석하여 주해를 단 화엄 관련 서적들이 출판되기도 하며 수많은 대중이 운집한 화엄법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실제 ‘화엄경변상도’를 소장하고 있던 사찰 가운데 송광사와 선암사, 쌍계사는 지리적으로 서로 인접하고 뛰어난 화엄 종사가 활동한 화엄사상의 중심지이며 화엄대법회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였다.

▲ 향수해 연꽃과 찰종, 53선지식,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부분.

송광사 ‘화엄경변상도’가 경전의 전체내용을 충실히 반영하여 서술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에 비해 선암사와 쌍계사의 작품은 경전의 해석에서 오류가 보이고 도상의 생략이 나타나기도 하며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대체적인 도상의 구성은 거의 동일한 형식을 보이고 있어 당시 송광사와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화승집단인 조계산화파 화사들의 교류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이들 세 작품에 비해 1811년에 그려진 통도사 ‘화엄경변상도’는 교학을 상징하는 ‘화엄경’의 내용에 천수관음보살과 준제관음보살이라는 형상을 통해 함축적으로 당시 대중에게 호응이 높았던 염불문인 ‘천수경’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화엄경변상도’는 화엄이라는 엄격한 교리를 그림으로 그려낸 불교회화였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이기에 지역과 시대의 차이에 따라 도상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송광사 ‘화엄경변상도’의 화면은 크게 위에서 아래로 단을 이루고 있으며 각각의 법회는 상서로운 구름으로 구분 짓고 있는데 위의 2줄은 천상에서 설법한 도리천회, 야마천궁회, 도솔천궁회, 타화자재천궁회를 아래 2줄은 지상에서 행한 보리도량회와 3번의 보광명전회, 시다림회가 그려져 있다. 사실 그림에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화면의 분할도 많이 되어 있어 ‘화엄경’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가 없이 이 그림을 보면 무척 난해하여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 제8 보광명전회의 노사나불,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부분.

일단 화면을 크게 분할하여 아래에서부터 살펴보면 가는 먹선으로 표현한 물결무늬 위에 곱게 피어난 주홍빛 연꽃은 이 그림의 내용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향수해(香水海) 바다 속에서 피어난 연꽃 속에 감추어진 연화장세계를 그린 것임을 암시한다. 연꽃 위에 그려진 크고 작은 원은 찰종(刹種)이라는 것인데 불찰, 사찰처럼 찰은 땅, 곳(處)이라 번역되니 찰종은 곧 화엄세계에 있는 여러 국토의 종류를 의미하고 20중 세계로 이루어진 찰종 가운데 인간이 사는 사바세계는 제13층에 속한다. 이 그림에서 찰종은 제1회 설법인 보리도량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품으로 표현된 것인데 19세기 후반이 되면 이 부분이 독립되어 ‘연화장세계도’라는 새로운 불화양식으로 제작되기도 한다.

그림의 향 우측 찰종이 그려진 윗부분에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53선지식을 찾아 길을 나선 선재동자의 모습이 앙증맞다. 화면에서 선재동자가 법을 구하는 선지식 53명 가운데는 보살뿐만 아니라 승려. 소년, 소녀, 뱃사공, 선인과 외도, 바라문도 있어 ‘화엄경’에서 현상세계는 무한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사무애(事事無?) 법계연기(法界緣起)라는 사상을 나타낸 부분으로 법을 구하는 마음에는 계급도 종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구도의 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을 그린 화승은 선재동자를 표현하면서 고려 불화의 선재동자처럼 천의를 휘날리며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과 더불어 색색의 도포를 입고 있는 조선시대 동자승의 모습까지 다양하게 변화를 주어 자칫하면 단조로워질 수도 있는 화면구성을 피해가는 재치를 보이고 있다.

그림에서 각각의 설법회는 ‘화엄경’의 교주인 비로자나부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현보살, 문수보살, 법혜보살 등 설주보살에 의해 설법이 진행되고 있으며 법회의 상석에 앉아 있는 부처님은 양 손을 어깨 위로 올려 설법하는 모습을 취한 보살형 노사나불이다. 제9회의 불화에 그려진 노사나불 각각의 모습에는 정수리, 양 눈, 발바닥 등의 불신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하얀 영기(靈氣)와 같은 광명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마치 화엄법회가 진행되면서 법문이 심오해지는 분위기를 나타내는 듯 위로 솟구쳐 올랐다 다시 내려오며 주위를 상서롭게 한다. ‘화엄경’의 교주는 비로자나부처이지만 연화장 세계는 노사나불의 서원과 수행으로 현출된 이상적 세계이기에 그림에서는 노사나불이 연화장 세계의 교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불화에 노사나불이 설법하는 모습은 화엄설법을 상징하는 도상으로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 제5회 39부 장엄중,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부분.

불보살과 성중이 빽빽이 그려 있는 그림에 표현된 다양한 인물의 묘사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여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불보살님이 설하시는 법문의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눈을 굴려가며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고 집중하는 천신이 있는가 하면 불법의 광대무변함을 설하는 화엄의 교리는 도솔천에 살고 있는 천신들에게도 어려웠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축 처진 눈썹에 걱정을 가득 담아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의 천신도 있다.

오랜만에 좋은 작품으로 눈이 호강했던 행복한 날, 이 그림을 실물로 볼 수 있는 인연을 만났다는 것에 감사했다.

정진희 문화재청 감정위원 jini5448@hanmail.net
 


[1397호 / 2017년 6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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