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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주객은 마음의 조작이다

꿈이 본래 없듯이 외계 또한 마음의 투영이다

사다함 명일왕래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아나함 명위불래 이실무불래 시명아나함.

영화는 존재하는 것 아니라
순간 영화관람 현상만 존재
모든 인식과 감각 작용 또한
뇌·외계 연기작용 결과일 뿐

무여열반에 들기까지, 수다원은 7번 인간계에 돌아오고, 사다함은 1번 돌아오고, 아나함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당시 불교인들의 일반적인 믿음이었다. 하지만 ‘금강경’은 이를 부정한다. ‘사다함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아나함은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사다함이고 아나함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7번 돌아오면' 사다함이 아니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나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돌아올 곳이 있거나 돌아오지 않을 곳이 있다면, 무아(無我)와 공(空)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금강경’은 물질적인 삼계(三界)에서 비물질적인 삼계로 비약한다. 진정한 성인은 정신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객(主客)이 공한 것을 깨달았는데 어디, 돌아오고 안 돌아온다는 생각이 드느냐는 것이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은, 인간에게 의식이 생긴 후로, 돌아올 곳이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다. 몸이 왕래하지 않을 때에도, 마음은 한없이 넓은 의식의 세계를 왕래한다.

의식의 세계는 명색(名色)의 세계이고, 명색의 세계는 우리 뇌의 구성물이다. 본래 그런 모습(名)과 색(色)은 없다. 뇌의 구성물은 머무르지 않는다. 대상에들어가려면 대상이 있어야 하지만, 대상이 없으므로 들어갈 수가 없다. 꿈에 들어간다 해도, 들어간 바가 없다. 꿈이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깨비·물거품·그림자·이슬·번개도 마찬가지이다. 영화(映畵)는 있지만 동시에 없다. 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설사 배우가 되더라도 영화에는 들어간 게 아니다. 상영되지 않을 때 영화는 없다. 상영될 때도 영화는 없다. 단지 관람이 있을 뿐이다. 자막과 영사기와 관객이 있을 때 비로소 ‘영화관람’이라는 현상이 발생한다.

무형의 세계는 우리 마음(識)의 구성물이다. 대상은 우리가 이름(名)을 붙여줄 때 비로소 생긴다. 게리맨더링이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 족과 북극지방의 이누이트 족에 의하면, 아이의 생명은 자기 이름이 생긴 후에 시작된다. 아이가 기형이거나 부모가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아이를 죽인다. 이들의 믿음에 의하면 아직 이름이 없을 때는 생명이 아니므로 살인이 아니다.) 추상적인 대상은 다른 추상적인 대상들에 의지해 생긴다. 열반은 탐욕·증오·무지·소멸이라는 추상명사들에 의지해 생긴다. 마음은 본래 개별자가 아닌 것에 이름을 붙여 개별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 개별자들이 만든 세계에 드나든다. 마치 설원과 해변에 눈과 모래로 집을 짓고 들락거리는 것과 같다. 하지만 해가 내리쬐고 물이 밀려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인연으로 생기는 것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그래서 본시 없는 것이다.

감각의 세계도 우리 마음이 구성한 것이다. 사고로 팔을 잃은 사람도 마치 팔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가려움도 느낀다. 전투에서 팔을 잃은 넬슨 제독은 환상통(幻想痛 phantom pain)을 영혼의 존재의 증거로 보았다. 팔에서 오는 감각정보를 토대로, 뇌는 팔에 대한 이미지(像)를 만든다. 팔을 관장하는 뇌 부위에, 팔이 제공하는 것과 똑같은 정보가 제공되면, 뇌는 팔이 거기 있는 걸로 판단한다. 뇌는, 신경을 통해서 팔에 대해서 판단하지, 따로 제3의 초자연적인 인식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안·이·비·설·식(眼耳鼻舌識)도 마찬가지이다. 외계는, 뇌가 가상세계를 만들도록 유발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 있는 그대로 뇌에 반영되는 게 아니다. 감각은 뇌와 신경과 외계 사이의 연기작용일 뿐이다.

돌아오고 안 돌아오는 것은, 업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의지의 소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의 의사결정 과정은 거의 자동적이다. 일종의 소프트웨어이다. 자유의지란 소프트웨어를 향상시키거나, 바뀐 상황에 맞추어 바꾸는 과정이다. 세상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변한다. 사물도 환경도 생명체도 그렇다. 돌아오지 않는다. 설사 돌아와도 이미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돌아올 곳과 돌아올 자도 없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을 곳과 돌아오지 않을 자도 없다. ‘돌아오니, 안 돌아오니’ 할 대상과 주체가 원천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97호 / 2017년 6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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